김학철전집1 격정시대 상-8

더좋은래일 | 2023.10.18 09:35:57 댓글: 4 조회: 318 추천: 4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09843


8

매축공사장에는 정해놓은 휴식일이란게 없었다. 휴일은 하늘이 결정하였다. 즉 하늘이 비를 내리시는 날이 곧 휴일이였다. 인부들은 복잡한 마음으로 비오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고된 일에서 풀려나 하루이틀 쉬는것이 나쁠것이 없었다. 그러나 골치덩이는 그 논 날자만큼 삯전을 못 받게 되는것이였다. 늦가을 궂은비가 제법 소리를 내며오는중에 씨동이가 헌 가빠를 뒤집어쓰고 한정희를 보러 그의 하숙집으로 갔다. 가는 걸음에 쌍년이에게 잠간 들렸더니 쌍년이가 반색하며 좀 들어와 앉았다 가라고 하였다.

<<이 주제를 해가지구 어떻게 들어가니.>> 하고 씨동이가 물이 줄줄 흐르는 가빠를 이쪽저쪽 굽어보니 쌍년이는

<<벗어서 걸면 되잖아, 여기다.>> 하고 마루기둥에 박힌 못을 가리켰다. 씨동이가 시키는대로 가빠를 벗어서 기둥에 걸고 마루에 걸터앉아 생선비린내가 풍기는 장화를 한짝씩 한짝씩 차례로 뽑아서 대돌우에 쌍굴뚝처럼 세운 다음 두발을 들고 엉뎅이로 삥그르르 돌아서 마루로 올라왔다. 다다미방에 들어와 주저앉자마자

<<그놈의 두상 요전날 어떻거니? 염병을 부렸겠지.>> 하고 물으니 쌍년이는 킥 웃고

<<한바탕 야단이 나는줄 알았었는데... 의외로 무사했어.>> 하고 대답한 뒤 야마다의 흉내를 내서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며 목소리를 사내 음성으로 변해가지고

<<다시한번 내 눈에 띄는 날이면... 주재소 소장한테 말해서 년놈 다 아주 요정을 낼테네... 그런줄 알아라.>>

말하고 다시 제 본 목소리로

<<이러잖아, 글쎄.>> 하고 웃었다.

<<그래 넌 어떡했니?>>

<<어떡하긴 어떡해? 그저 날 잡아잡수 했지.>>

<<아무 말두 않구?>>

<<말이 무슨 말이여. 그저 고개 푹 수구리구 대죄를 하는 판인데.>>

<<손찌검은 안하구?>>

<<난 꼭 쥐여박히는줄 알았어. 그런데 웬 일인지 그놈의 두상 손찌검은 안하데.>>

쌍년이가 무사했다는 말을 듣고 씨동이가 좋아서 허허 웃는데 쌍년이가

<<그런데.>>하고 미진한 말을 마저 하려고 하여 씨동이는

<<그런데 무어?>> 하고 쌍년이의 입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나를 살살 달래면서 딴짓 않구 조신하게 있으면... 금반지를 사주겠다잖아.>>

<<금반지? 야, 거 수가 났구나.>>

<<그러다가 또 당장 왜관으로 이사를 시키겠다구 으르지 뭐야. 년놈이 다시 만나지 못하게.>>

<<저런 놈 보아.>>

<<그뿐이면 오히려 또 괜찮게, 아주 일본으로 데리구 가서 살겠다는거야, 아무두 모르게.>>

<<저런.>>

<<그게 정말이라면 어떻거지?>>

<<망할 놈의 두상, 죽어두 놓진 못하겠단 수작 아니야?>> 하고 쓴입을 다시였다. 쌍년이가 말끄러미 씨동이의 얼굴을 쳐다보니 씨동이는

<<그 늙은것이 렴치없이 너한테 홀딱 반한 모양이다.>> 하고 히쭉 웃었다.

<<듣기 싫어, 그따위 소리.>>

<<듣기 싫다면 안하지. 나두 그따위 소린 꿈에두 하구싶잖다.>>

<<돈벌이 한다는건 어떻게 돼가오?>>

<<헐찮아, 하루 1원을 벌자면... 이골이 난 실장정두 뼈가 휜대여. 죽을힘을 다했어두 난 아직... 80전을 못 넘겨봤어.>>

<<그럼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비오는 날은 공이야 아무것도 없어.>>

<<그럼 한달에 20원이 고작이겠구먼?>>

<<비슷하지.>>

쌍년이가 한숨을 호 쉬였다. 앞길이 어둡기만 해서였다. 야마다의 식모노릇, 첩노릇을 벗어날 길이 막연하기만 해서였다. 씨동이가 그 마음을 헤아리고

<<산 사람의 입에 거미줄 치랴? 너무 근심 말아, 어떻게든 되겠지?>>

위로하여 말하며 쌍년이를 슬그머니 끌어당기니 쌍년이의 웃몸은 순순히 씨동이의 품으로 실그러졌다.

이윽고 씨동이가 쌍년이네 집을 나와 한정희의 하숙으로 향하는데 곱사등이네 구멍가게앞을 지나려니까 가게안쪽에서 곱사등이가 내다보고

<<여보게 씨동이, 어디 가나?>>

수작을 붙여왔다. 씨동이가 발을 멈추고 돌아보니

<<잠간 들렸다 가게.>>

곱사등이가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씨동이가 물이 흐르는 가빠를 입고 들어갈수도 없고 또 벗기도 귀찮아서 가게문앞에 그냥 선채로

<<나 떡 줄라우, 왜 부르우?>> 하고 엇조로 나왔다. 곱사등이가 일어나와서 문턱을 사이에 두고 씨동이를 쳐다보며

<<자네 요새두 다니나?>> 하고 웃는 얼굴을 보였다.

<<다니우, 왜 그러우?>>

<<벌이가 괜찮겠지?>>

<<쑬쑬하우.>>

<<그런데 우리 집엔 왜 통 아니 오나? 맞돈두 좋구 전표두 좋구... 다 좋은데.>>

<<우리 어머니더러 말하리다, 여기두 좀 들리라구.>>

<<고마웨. 다른데보다 싸게 해드릴테니 꼭 오시라구 말씀하게. 그리구 같이 일하는 친구들에게두 소개를 좀 해주게나그려.>>

<<나를 광고쟁이루 내돌릴 작정이요?>>

<<이 사람아, 이웃사촌이라잖은가.>>

곱사등이가 너스레를 부렸다.

<<광고쟁인 무슨 놈의 광고쟁이여.>>

<<고만하면 알겠소. 나는 가우.>> 하고 걸어가는 씨동이의 등뒤에다 대고

<<이담에 내 한턱 냅세.>>

곱사등이 소리를 쳐서 씨동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 턱은 두었다가 어서 당신이나 먹우.>> 하고 무뚝뚝하게 대꾸하였다.

한정희의 하숙집은 남산밑 우물가의 복숭아나무 두그루가 선 여덟간 초가집인데 찾기가 쉽다더니 그 복숙아나무가 목표가 되여서 과연 찾기가 쉬웠다. 씨동이가 일각문을 밀어여니 문짝에 달아놓은 깡통이 딸그랑딸그랑 소리를 내였다. 그 원시적 초인종소리를 들은 모양으로 안방 장지가 열리더니 여라문살 된 계집아이 하나가 마루로 나와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당안에 들어서는 낯선 사나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빠쓴 소도둑놈이 들어오는거나 아닌가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 저 한정희라는..>> 하고 씨동이가 마루끝의 계집아이를 쳐다보고 말을 묻는 중간에 계집아이가 말을 끝까지 다 듣지도 않고 곧 고개를 건넌방편으로 돌리고

<<아저씨, 손님.>> 하고 소리를 쳤다. 건넌방에서

<<오.>> 하고 소리가 나며 함실아궁이쪽으로 난 창미닫이가 쓱 열리고 그리고 길게 기른 머리가 헝클어진 한정희의 해사한 얼굴이 나타났다. 한정희는 씨동이를 보자 금세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지며

<<어서 벗구 돌라오너라.>>

말하고 창미닫이를 도로 닫치며 곧 마루쪽으로 난 장지를 열고 맞아나왔다.

<<집이 아주 조용하구먼요.>>

방에 들어와 앉아서 책과 신문들이 어질더분하게 널려있는 방안을 둘러보며 씨동이가 이렇게 말하니 한정희는

<<주인 내외에 딸 하나... 식구가 단출해서 좋다.>> 하는것으로 대답을 삼았다.

<<주인은 무었하는 사람인데요?>>

<<어느 물상객주의 서사노릇을 한다나보더라. 내외가 다 인품이 좋다.>>

<<형님이 보통사람이 아닌걸 아니까... 주인집에서두 특별히 해주겠지요.>>

<<그런 소리 말아. 보통사람은 뭐고 보통사람 아닌건 뭐냐. 사람은 다 마찬가지야.>>

<<사람은 다 마찬가지라지만 실지 량반하구 상놈이 어디 마찬가지요? 다르지, 다르면 여간 달라.>>

<<지금 세상에 량반, 상놈이 왜 있어?>>

<<그럼 선주하구 배군하구 같소? 주인하구 차인하구 같소? 부자하구 가난뱅이하구 같소? 맨 같지 않으것 천진데... 마찬가지란 다 뭐요.>>

<<내 말이 바루 그 말이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구 사람은 나면서부터 다 마찬가지 사람인데... 이놈의 세상이 그렇게 괴까다롭구두 불합리한 차별을 만들어놨단 말이다. 그러게 우린 그 인위적인 차별을 타파하구 본연의 상태루 돌아가게 해야 한단 말이다.>>

<<무슨 뜻이요? 어려운 문자루... 난 잘 못 알아듣겠소.>>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이 세상에서 왕이란것두 없애구 또 총독이란것두 없애구 또 도지사나 경찰서장 따위두 다 없애구...>>

말을 하는 중간에 씨동이가 홀지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왕을 어떻게 없애우? 왕을 없애면... 나라가 망하라구?>> 하고 펄쩍 뛰였다. 그 모양을 보고 한정희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럼 총독이랑 경찰서장이랑은?>> 하고 물었다.

<<그거야 일본놈들이니까 없애치워야지요. 물론. 그렇지만 왕은 안되우. 안되잖구! 절대루 안되지요... 나라님인데.>>

<<그 나라란것부터가 벌써 아무 소용없는 군더더기다... 알겠니?>>

<<그게 말이 되우! 나라가 없으면... 백성이 어떻게 살라구? 왜놈들을 몰아내구 나라가 독립을 해야지요... 우리 조선이. 그러찮으면 안중근이가 왜 이또 히로부밀 쏴죽이구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겠소? 다 그때문이지!>>

한정희가 웃으면서 막 입을 열려는데 마침 밖에서

<<오빠.>>

부르는 소리가 나서 한정희는

<<오.>>

대답하며 일어나 창미닫이를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서 올라오나.>>

누이동생 선희가 오빠를 보러 온것이다.

서희가 우산을 접어서 기둥에 기대놓고 마루로 올라와 장지를 들어오려다가 방안에 손님이 앉았는것을 보고 머뭇머뭇하는것을

<<괜찮다 들어오나, 씨동이다.>>

한정희가 말하여 선희는 비로소 방안에 들어와 씨동이에게 눈인사한 뒤 들고 온 바스케트를 웃목에 내려놓고 살며시 그옆에 쪼크리고 앉았다.

<<왜 오늘 노냐?>>

오빠의 묻는 말을 누이동생이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오늘이 일요일 아닙니까?>>

대답하니 한정희는 허허 웃고

<<로동판으루 돌아다니니 인젠 일요일두 모르구 사는구나. 아무때구 비오는 날이 노는 날이겠거니 생각을 하니까.>> 하고 한탄하듯이 말하며 선희와 씨동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등을 벽에 기대고 얼룩얼룩 얼룩이 진 천정을 쳐다보며

<<궂은비 오는 일요일이라... 서정적이로구나.>>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씨동이가 남매간 정답에 이야기하는데 개밥에 도토리격이 될것 같아서 한정희를 보고

<<이젠 집을 알았으니까 앞으루 또...>>

말하며 일어나려고 하니 한정희가 손을 홰홰 내저으며 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그대루 앉았어. 이 비오는데 가선 뭘 하겠니. 좀 이따 나하구 같이 회관에나 나가보자.>>

한정히가 말하는 회관이란 청년회관의 략칭으로서 이때 원산에서는 뜨르르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도회청이였다. 씨동이가 도로 주저앉는것을 보자 선희는 부지런히 바스케트의 뚜껑을 열고 그속에 송편이 수북이 담긴 양푼 둘을 둘어내더니 그중의 하나를 들고 일어서며 저의 오빠를 보고

<<엄마가 만들어보낸거예요. 내 주인댁에 먼저 좀 갖다드리구 올게요.>>

말하고 장지를 여닫으며 안방으로 건너가더니 잠시후에 소반 하나를 들고 돌아오는데 거기에는 물그릇과 저가락들이 놓였었다. 선희가 소반을 내려놓더니 송편 담긴 양푼을 얹어가지고 모 꺾어앉은 두사람앞에 갖다놓으면서

<<어서들 드세요.>>

도거리로 권한 뒤에 저의 오빠를 보고

<<엄마가 송편소에다는 설탕을 넣지 않는 법이라는걸... 내가 콱 쏟아넣었더니... 굉장히 달게 됐지 뭐예요.>> 하고 상글상글 웃었다. 한정희가

<<집에선 그러더라두 이담에 시집을 가설랑은 아예 그러지 말아, 성미 고약한 시어미한테 쫓겨날라.>> 하고 우스개소리 한 다음 앞으로 나앉아서 저가락을 집어들며 씨동이를 보고

<<어서 다가앉아라... 먹자, 정성으로 가져온건데.>> 하고 말하였다. 둘이 마주앉아 송편을 먹으면서 한정희가

<<이렇게 단 송편을 먹어보기는 내가 삼십 평생에 처음이다.>> 하고 선희를 돌아보며 웃은 끝에

<<너두 같이 좀 먹자꾸나.>> 하고 말하니 선희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고

<<난 집에서 실컷 먹구 왔는걸요.>>하고 방색하였다.

<<은희두 데리구 오지.>>

<<그 애는 엊저녁부터 만화경인가 무언갈 만드느라구 정신이 없다니까요, 숙제두 안하구.>>

<<네 바이올린은 어떠냐?>>

<<계속하지요 뭐.>>

<<진보가 있냐?>>

<<쑬쑬하다구나 할가요.>>

<<그럼 이담에 올 때는 바이올린을 가지구 오나, 한곡 들어보자.>>

<<아무려나.>>

<<아름다운 조선의 꽃이신 녀류바이올리니스트 한선희양이 서울공회당에서 화려한 연주회를 가지게 되신다면 이 오래비두 덩달아 어깨가 우쓱해지렸다.>>

선희는 우스워 죽겠다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깔깔거렸다. 누이동생이 없는 씨동이는 속으로 그들 남매가 몹시 부러웠다.

비가 그쳐서 한정희와 씨동이가 청년회관으로 나가는데 한정희가 선희더러도 같이 가자고 권유를 하즉 선희는

<<내가 거길 가선 무엇해요? 어서 두분이서 가세요. 난 여기 어질더분한것들이나 좀 치워놓구 가겠어요.>> 하고 응하지 않았다.

<<녀류혁명가는 생전 못되겠다.>>

<<그런 대단한 녀걸은 달리 구해보세요. 한선의는 자격이 없습니다.>>

씨동이는 그들 남매가 서로 조고받는 말의 뜻을 잘 리해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여간만 재미있게 듣지 않았따. 인생의 사는 멋이 질질 흐르는것만 같았다.

청년회관은 회색뼁끼칠을 한 목조건물인데 상하 이층이다. 내부구조는 일본식으로서 간살을 지른것도 일본식장자-후스마요 방바닥에 깐것도 역시 일본시깔개-다다미였다. 신작로에서 정구장 하나를 사이두고 서향으로 앉았는데 바로 그 신작로 비슥맞은편에 언젠가 서선장이가 일본사진관집아들을 두드려주고 벌을 서던 주재소가 자리잡고있다. 말하자면 무정부주의자들의 소굴과 일본제국주의의 전초기지가 신작로 하나와 정구장 하나를 격하여 서로 노려보고있는 형국이였다.

반쯤 열려있는 출입문으로 현관에를 들어서니 세멘트바닥에 흙자국이 점점하다. 신발에서 떨어진것을 쓸지 않은것이다. 아래층은 사람이 없는듯 괴괴하였다. 번개형의 좁은 층계를 올라가니 어느 방에서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와 굵고 낮은 목소리가 무엇을 가지고 열렬히 쟁론하는것이 들렸다. 무슨 바꾸닌이 어떻고 그로뽀뜨낀이 어떻고... 씨동이가 생전 들어본적 없는 말들도 간간이 들렸다. 씨동이가 앞을 서는 한정희의 뒤를 따라 구석진 한 방에를 들어서보니 동쪽벽과 북쪽벽에 창문이 나고 다다미가 여덟잎이나 깔려서 꽤 널직한데 한쪽 구석에 사기재떨이 두엇과 때묻은 목침이 너덧개 딩굴어졌을뿐 알뜰한 빈방이였다. 한정희가 들어서는 길로 다다미우에서 몸 가볍게 재주를 한번 넘고는 그대로 북창밑에 가 퍼더앉으며

<<널직해서 좋다.>> 하고 웃었다. 씨동이가 동쪽 창문밑에 와 앉기를 기다려서 한정희는

<<오늘 조용한 틈에 한번 좀 물어보자. 그래 너는 이 세상사람으루 태여나서...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사니? 사는 목적이 무어냔 말이야?>> 하고 씨동이를 빤히 보며 구두시험을 치듯이 물었다.

<<그야...>> 하고 씨동이가 뒤말을 잇대지 못하니 한정희는 빙글빙글하면서

<<그야... 뭐?>> 하고 다우쳐 물었다.

<<그야...>>

<<그야 소린 고만하구 목적을 말해... 목적을... 사는 목적을.>>

<<목적이란게 뭐 별거 있겠소. 돈을 벌어서 부모처자 다 함께 배불리 먹구 잘사는게 목적이라면 목적이겠지... 난 달리는 더 모르겠소.>>

이 대답을 듣고 한정희가 두손을 짚고 천정을 쳐다보며 큰소리로 하하 웃으니 씨동이는 열적어서 머리를 긁죽긁죽하였다.

<<사람이 사는 목적이... 고작 돈을 벌어서 한집안이 배불리 먹고 사는거라면... 그래 네발루 기여다니는 개짐승하구 다를게 무어냐?>>

씨동이가 잠자코 한정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정희의 얼굴이 차차 엄숙하게 변하며 열기 있는 눈이 샛별같이 빛났다.

<<물론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사는 목적은 각기 다르다. 네 말마따나 돈을 벌어서 배불리 먹구 편히 사는걸 목적으로 하는 사람두 있다. 있기만 한게 아주 썩 많다. 그러나 선량하구 정직한 사람들두 있다. 남을 위해 선선히 자신을 희생하는 의로운 사라들두 있단 말이다...>>

여기까지 듣고 씨동이는 저도 모르게 군침을 넘기고 앉음을 고쳐 앉았다.

<<인간다운 인간이 사는 목적은... 이 세상에서 압박과 착취를 없애구...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다같이 잘살게 하기 위해 분투하는데 있다. 동족의 고난에 외면을 하구 저만을 돌보는 그런것들은... 인간축에 못 들어. 그런것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개짐승이야.>>

씨동이는 몸속의 활시위가 팽팽해지는것을 느꼈다.

<<인류사회의 진보를 위해서 한몸을 바치는게... 이게 참된 인간들의 사는 목적이야.>>

씨동이의 눈에 한정희가 갑자기 거인으로 보였다. 더욱더 우러러보였다. 한정희가 시키는 일이라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해낼 마음이 생겼다.

이때 복도로 통하는 장지밖에서 젊은 남자의 야무진 목소리가

<<한정희동지 여기 있소?>> 하고 물어서 한정희는 얼른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아 나 여기 있소, 왜 그러우?>> 하고 대답하였다. 장지를 열고 들어오는것을 보니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키가 작달막한 생기덩어리다. 그 생기덩어리가 옆에 낯선 사람이 있는것을 보고 누군가 묻는 눈치로 한정희를 쳐다보니 한정희는

<<아 나하구 같이 일하는 동무야. 무슨 일인데?>> 하고 서있는 생기덩어리를 쳐다보았다.

<<다음 토요일날 밤으루 예정돼있는 우리 그 강연회에 대해서...>> 하고 생기덩어리는 섰던 자리에 그대루 주저앉으며 곧 책상다리를 하고 말을 이었다.

<<주재소에서 말썽을 부리는구먼요.>>

<<무슨 말썽을?..>>

<<조시원.한정희 두 연사의 연제가 불온하다는거요.>>

<<아닌게아니라 나두 그렇게 교섭을 해봤지요. 그러나 연제란 내용을 개괄하는것인만큼 필시 그 내용두 온당치 못할것으루 생각되므로 사전검열을 해야겠다는거요.>>

<<만약시 불응한다면?>>

<<물론 집회금지... 허가할리 없지요.>>

한정희가 쓴입을 다시고 한참 생각해보다가

<<이따 저녁에 모여서... 공론들 해봅시다.>> 하고 말하니 생기덩어리는

<<무허가집회가 되면 또 어제처럼... 일장풍파-류치장바람이 일걸요.>>하고 미간을 찌프렸다.

<<죽일 놈들.>>

<<누가 아니라우.>>

<<그런 사달이 또 나지 않게 미리 두슨 대응책을 세워야지.>>

<<아무튼내 그런 의취루 돌아다니며 일르리다. 여섯시 반쯤이 좋겠지.>>

<<수고를 좀 하시오.>>

<<그럼 앉아 말씀들 하시우.>>하고 생기덩어리는 씨동이에게 인사성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하고 총총히 일어나 나갔다. 그 사람이 나간 뒤에 한정희는 씨동이를 돌아보며

<<넌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루 알았니? 입을 두구 말을 못하는 세상... 조선 팔도가 송두리채 감옥이야, 살창 없는 감옥!>> 하고 탄식섞어 분개하였다.

씨동이가 앉아있는 동안에 한정희와 일을 의논하려고 들락날락하는 사람이 차차 많아져서 씨동이는 눈치없일 굴지 않으려고 이젠 고만 가보겠다고 일어서니 한정희도 더 붙들지는 아니하였다. 강연회를 여는 일이 순조롭지 못하여 청년회관안에 일말의 초조와 불안이 감도는것 같았다.

비온 뒤끝에 늦가을의 해볕이 내리쬐는 원산항의 풍경은 봄과 가을이 한데 어우른듯 숙살하면서도 또 화창하였다. 기러기떼, 고니떼, 갈매기떼가 먼 북쪽나라 씨비리 캄챠카에서 떼떼이 날아올 계절이 된것이다. 원산항은 일년사시절 눈내리는 겨울 암질러 경치만은 으뜸이였다. 물가도 어지간히 싼편이였다. 닭알이 한알에 1전이면 얼마든지 있었고 씨암탉도 한마리에 30전 밖에 안하였다. 입쌀 한말에는 55전, 콩 한말에는 30전 그리고 소고기 16냥중 한근에는 15전, 고래고기 한근에는 홀 5전... 그렇건만 서민들의 살림은 구차하였다.

이른아침에는 돈 한냥 즉 10전을 가지고 장에로 나가면 두부 한모에 2전, 묵 한모에도 2전, 거기다가 콩나물 2전어치, 참기름을 2전어치 그리고 고추가루와 깨소금을 각각 1전어치씩... 이렇게 장을 보아다가 국 끓이고 찌개 끓이고 밥으르 짓는 세워리였건만 살림들은 구차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 기댈 곳을 찾게 되였다. 하느님에 기대보려고 례배당을 찾아가는 사람에, 부처님의 도움을 바라고 포교당을 찾아가는 사람에, 서른여섯가지 꿈중에서 돈벼락 맞는 꿈을 꾸고 <<야회(押会)>>로 달려가는 사라에, 맨주먹으로 악착한 세상을 강정 부시듯 아싹아싹 부셔볼 일념에 청년회관으로 모여드는 사람에, 뭉치는게 힘이다, 싸워야 산다는 리치를 깨닫고 적색로조로 모여드는 사람에... 이밖에도 또 천도교요 천주교요 도사요 무당이요 지관이요 복술쟁이요 관상쟁이요... 이렇듯 복잡다단한 삶의 흐름이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원산시민들은 그래도 꾸준히 한장한장 달력을 뜯어갔다.

씨동이가 거치장스러운 가빠를 접침접침 접어서 한쪽 어깨에 걸치고 장화 신은 발로 터벅터벅 걸어오는중에 앞길에 말탄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윤기가 흐르는 순혈종의 흰 점박이 밤빛말도 놀랍거니와 그것을 탄 사람은 더욱 놀라왔다. 왜냐면 그 사람이 미국영화 서부활극에 나오는 카우보이와 똑같았기때문이다. 큰 갓처럼 전이 넓은 모자를 쓴것이며 류바처럼 아래가랭이가 퍼진 바지를 입은것이며 지어는 그 얼굴 생김생김까지가 다 양기 같았기 때문이다. 그 스크린에서 금세 빠져나온것 같은 가짜카우보이는 원산의 친석군의 대지주 박참봉의 큰손자로서 서선장이의 외칠촌숙이 되는 사람인데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뒤손가락질을 하는 이른바 집안 망할 자식이였다. 나이 스물다섯살이 되도록 아무 하는 일이 없이 돈을 물쓰듯하며 저의 할애비, 애비가 모아놓은 천냥을 탕진하는 판이였다.

가짜카우보이는 왜관 일본인 마사회(马事会)의 회원이였으므로 그가 타는 말은 그 마사회의 값나가는 경주마였다. 종래로 활동사진을 즐겨서 하루도 빼놓잖고 구경을 다니는 위인인데 그중에도 서부활극에 나오는 카우보이에 미쳐서 왜관 일류 양복점에 특별히 맞추어 카우보이색을 지어입고 그리고 말을 타고 멋을 부리며 큰거리를 누비는 판이였다. 씨동이가 다시 보니 그 가짜카우보이 집안 망할 자식은 안장앞에다 아이 하나를 앉혀가지고 오는중이였다. 그 아이가 씨동이를 보자 이마에 흰 점이 박힌 말머리 너머로 손을 내저으면서

<<형님-!>> 하고 불렀다. 씨동이가 발을 멈추고 다시 보니 그 아이는 곧 선장이라

<<오 너 오늘 호사하는구나.>> 하고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 온것을 보니 선장이는 카우보이아저씨하고 말을 타는것이 마음에 좋아 입이 함박만큼이나 벌어졌었다. 박가 집안 망할자식은 안장우에서 거드럭거리며 씨동이를 내려다보고 또 마사회의 값나가는 순혈종경무자는 막벌이군을 업신여기듯이 씨동이를 아니꼽게 가로보았다.

추천 (4) 선물 (0명)
IP: ♡.50.♡.65
로즈박 (♡.39.♡.172) - 2023/10/18 19:44:38

혹시나 해서 들렷더니 역시 오늘도 올려주셧군요..잘 보고갑니다~~~

더좋은래일 (♡.50.♡.65) - 2023/10/18 19:50:43

글에 혹시 틀린글이 있거나 문장에 잘 안맞는 구절이 있으면 지적해줬으면 합니다
이글에서 마지막 세번째줄에 <<가까이 온것을 보니 선장이는 카우보이아저씨하고 말을 카는것이>>에서 <<말을 타는것인데 >> 금방발견해서 고쳤네요 ㅋㅋ

로즈박 (♡.39.♡.172) - 2023/10/18 20:07:25

하하..괜찮습니다...
알아서 잘 보구잇네요..
이 많은 글들을 타자하시는게 얼마나 힘드신지 알기에 늘 고마운 마음으로 잘 보고잇답니다..

산동신사 (♡.173.♡.19) - 2023/10/19 10:02:09

덕분에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이많은 글을 타자하느라 시간도 걸리겠는데 속도가 짐작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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