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1 격정시대 상-11

더좋은래일 | 2023.10.19 17:03:38 댓글: 4 조회: 361 추천: 4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10175


11

원산의 소문난 무정부주의자 조시원은 <<조선일보>>의 지국장으로서 남산밑 검정목담을 두른 큰 기와집에서 살았다. 근 30한 사람으로 조혼하여 벌쎄 예닐곱살씩 먹은 아들딸까지 두었는데 부친은 년전에 륵막염인가 무언가로 병사하여 3년상이 오래지 않았고 조부모는 다 생존하였었다. 조시원의 자색있는 누이동생 하나가 갓스물에 출가하여 이태를 채 못살고 청상과부가 되여 친정살이를 하는지도 벌써 1년이 넘었었다. 그 청상과부가 저의 오라버니와 가까이 상종하는 사람들중에서 은근히 좋게 보는 사람 하나가 있었으니 그는 곧 용모가 준수하고 학식이 많고 지체가 좋은 한진사의 맏손자 한정희였다.

한정희가 이날 조시원의 그 집으로 찾아오니 바깥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도있던 조시원의 여섯살 먹은 아들이

<<아저씨 아저씨.>>
부르며 두팔을 벌리며 쫒아왔다. 한정희가 반짝 쳐들어 안고

<<누나는?>> 하고 물으니 그 아이는

<<아주머니가... 머리 빗겨주우.>>

대답하고 방글방글 웃었다. 조시원의 이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친구인 한정희를 저의 친삼촌만큼이나 따랐다. 이때 종종머리를 곱게 땋은 조카딸을 앞세우고 중대문을 나오던 그 고모-조시원의 누이동생이 한정희가 흙투성이손을 한 어린 조카를 안고 섰는것을 보고

<<저 손!>>

나직이 소리치고 곧 되돌쳐 안으로 달려들어가더니 잠시후에 물수건을 들고 나와 한정희에게 눈인사하고 안겨있는 조카의 손을 한짝씩한짝씩 말끔히 닦아주었다. 안방에 들어가 누웠다가 누이동생에게 손님이 왔다는 연통을 받고 머리에 붕대를 감은 조시원이 중대문으로 나오면서

<<그놈 내려놓구 어서 올라어게. 저런 넉살 좋은 녀석.>>하고 소리하여 한정희는 비로소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그 고모에게 넘겨주고 앞서서 사랑마루에 올라섰다. 방에 들어와 자리잡아 앉은 뒤에 한정희가

<<자네 머리가 그저 안 나았어?>> 하고 물으니 조시원은 머리를 가로 흔들며

<<뼈끝이 돼 그런지... 애먹이네.>> 하고 대답하였다. 조시원은 적색로조의 습격을 받던 날 부상을 당하였던것이다. 조시원이 분개하여

<<생각할수록 분하네. 그런 봉변이 그래 또 어디 있니? 다들 이를 갈고있네...>> 하고 말하다가 관자노리의 상처가 울려서 아픈모양으로 상을 찡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한정희는 얼굴을 젖혀들고 천정을 쳐다보며 점도록 말이 없었다. 한동안 지나서 조시원이 제풀에

<<하루빨리 동지들을 규합해가지구 설치를 해야잖겠나? 톡톡히 본때를 보여서 다시는 그런 지정머릴 못하게 해야잖겠나?>> 하고 한정희를 쳐다보니 한정희는 그제야 젖혀들었던 얼굴을 바로하고

<<자네두 그날... 주제소놈들이 강건너 불구경하듯하는걸... 봤겠지?>> 하고 동문서답격으로 되물었다.

<<그야 보았지.>>

<<이거 우리가 그놈들 좋아할 일을 하는건 아닌가?...>>하고 한정희가 의문을 제가하니 조시원은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잠자코 눈만 끔벅끔벅하였다. 한참만에 한정희가 또

<<우리가 이거 동족상생을 하는거 아닌가, 원쑤들을 눈앞에 두구?...>> 하고 의문을 되물이하여 제기하니 조시원은 물끄러미 한정희의 얼굴-심각한 얼굴-을 쳐다보며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원쑤들이 좋아할 일을 하는건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구 자넨 생각잖나?>>

조시원은 묵묵무언뿐...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앉았다. 두 친구가 더 할 말이 없는듯 덤덤히 마주보고 앉았는중에 미닫이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조시원의 소복단장을 한 누이동생이 쟁반 하나를 받들고 들어왔다. 쟁반에는 하얀 밥알이 동동 뜬 식혜 두사발이 놓였었다. 저의 누이동생이 아무때고 한정희만 오면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특별한 대접을 자진해하는것을 조시원은 알고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다 쟁반을 밀어놓고 누이동생이 머뭇머뭇하는것을 보고 조시원은 한정희를 건너다보며

<<이야기는 차차 하기루 하구 우선 식혜들이나 먹세. 속이 좀 후련해지게스리.>> 하고 먼저 식혜 한사발을 집어들고 재차

<<어서 들게.>>하고 권하였다.

누이동생이 빈그릇을 도로 쟁반에 담아가지고 나간 뒤에 조시원은 다시 한정희를 바라보며

<<자 이젠 자네 소견을 똑똑히 좀 털어놓게, 어디 한번 들어보세.>> 하고 말을 자아내였다. 한정희가 고개를 기우뚱하고 한참 생각하다가

<<내 생각엔... 우리가 충동을 눅이구 랭정히 한번 반성을 해보는게 좋을것 같네.>> 하고 말하니 조시원은 펄쩍 뛰다싶이 하며

<<반성? 자네 미치잖았나! 선손을 건것은 저편이야. 우리는 피해자야. 앉아서 벼락을 맞았단 말이야. 반성이란 웬말인가!>> 하고 뗑하였다.

<<선손은... 우리가 걸었어.>>

<<뭐시?>>

<<조합에다 먼저 프락찌야를 박은것은 우리거든.>>

<<거야 피장파장이지.>>

<<안 그래.>>

<<아나 그렇긴 뭐가 안 그래?>>

<<조합측에서 우리 속내를 파보려구 한건... 말하자면 정당방위야. 자기네 조직을 보위할 목적으로 부득이한 조처였어.>>

<<그래서 불한당처럼 불이의 습격을 들이대가지구... 경찰놈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를 망신시켰겠네그려?>>

조시원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비양조로 말하니 한정희는 목소리를 도리여 낮추어가지고

<<이 사람, 오늘은 우리 고만하세. 이담에 머리들을 식혀가지고... 한번 찬찬히 이야기해보세.>>

말하고 왼손으로 저의 오른쪽어깨를 주물럭주물럭하였다. 그도 지난번 충돌시에 어깨죽지를 되게 맞았던것이다.

조시원은 속에 치민것이 종시 내려가지를 않아서 시무룩해 앉았고 또 한정희는 한정희대로 입을 다물고 덤덤히 앉아있어서 자리가 버성기여 마치 소와 닭이 마주보는것과 같았다. 조시원은 청년회관에서 거연히 령좌노릇을 하는 사람이였다. 한정희로 말하면 조시원이 가장 믿고 마음을 트는 친구이자 동지였다. 한정희는 청년회관을 떠받치는 두개 기둥중의 하나였다. 액내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를 조시원의 버금가는 인물로 보고있었다. 두사람은 다 청년회관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하 존재였다. 이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간다는것은 도저히 상상할수가 없는 일이였다.

이날 밤 한정희의 하숙으로 씨동이가 찾아왔다. 씨동이는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한정희를 보고

<<형님, 어떻거기루 했소?>> 하고 물었다.

<<무얼 말이냐?>>

<<아 앙갚음을 해야잖겠소, 우리 회관이 앉은 벼락을 맞구 모두 풍지막산이 됐는데.>>

<<앙갚음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우리 사람을 불러 모아가지구 명석동을 들이쳐서 쑥밭을 만들어놔야지요. 그놈의 조합인가 뭔가를.>>

<<누구 좋으라구?>>

<<누가 좋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너 그날 못 봤니? 경찰서 왜놈들 좋으라구?...>>

씨동이가 대꾸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눈이 멀뚱멀뚱하여 한정희의 얼굴만 쳐다보니 한정희는

<<전번에두 그놈들 좋은 일을 했는데... 그것이 부족해서... 한번 더 좋으라구?>> 하고 씨동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니 어떡하자는거요. 까닭없이 얻어맞구두... 죽여줍시오 하구 가만있자는거요? 그렇게 되면 남우세스러워... 이 낯짝을 어떻게 들구 다니우?>>

<<조개하구 화새가 서루 싸우면... 리득을 보는 놈은 따루 있어.>>

<<그러니 비겁쟁이라구 남들이 뒤손가락질을 해두 좋단 말이요?>>

한정희가 대답을 아니하고 씨동이의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홀지에

<<너 내 고사 하나를 이야기 할게 들어보련?>> 하고 말하니 씨동이는 그 말의 뜻을 잘 몰라서

<<고사가 뭐요?>> 하고 되물었다.

<<옛날 력사가 고사지.>>

<<그럼 어서 이야길 하시우, 들어봅시다.>>

<<옛날 중국 전국시대에 조나라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 린상여라는 재사과 렴파라는 장군출신의 재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렴파라는 무공이 많은 재상이 린상여라는 재사을 무공은 없으면서두 급이 자기보다 높은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골탕을 먹여주려구 자꾸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린상여는 조금도 가래지 않구 그럴적마다 번번이 겸야을 했다. 겸손한 태도루 사양을 했단 말이다. 이것을 보구 렴파는 아주 우쭐했다. 제 위풍에 눌려 린상여가 예기가 꺾여서 쩔쩔매는줄 안것이다. 린상여의 부하들이 참다 못해 린상여를 보고 대감께서는 왜 렴파의 코대를 꺾어놓을 생각을 안하시구 창피하게 자꾸 그렇게 겸양만 하십니까 하구 물었다. 그러니 린상여가 대답하기를 지금 강한 이웃나라-진나라가 우리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려보구있다. 그러면서두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것은... 렴파장군과 나를 기탄해서다. 그런데 내가 만약시 나라 일이 중한걸 생각 않구 렴장군과 맞선다구 하면... 두 호랑이가 맞붙어 싸우면 둘이 다 상하는 법이라... 우리 두 사람은 다 상할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가 우리 나라를 넘보고 쳐들어올것은 명약관하의 일이다. 내가 렴장군을 피하는것은 그가 무서워사가 아니라... 나라 일이 중해서다. 이와 같이 대답을 하더란다. 이 말이 굴러굴러 마침내 렴파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렴파두 원래 애국심이 강한 큰인물이라 이 말을 듣구는 크게 깨닫구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래서 즉시 린상여를 잦아가 계하에 꿇어엎드려 청죄를 한즉 린상여는 버선발루 뛰여내려와 붙들어일으키며 우리 나라를 위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구 좋아했다. 이때로부터 두 재상은 생사를 같이할만큼 친한 사이가 됐는데 그들 두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은 강포한 지나라두 감히 침노할 엄두를 못 냈었다. 그러니 우리두 마땅히 나라와 민족의 일을 생각해서 서루 싸울것이 아니라 한데뭉쳐야 하지 않겠느냐. 바꾸어말하면 우리의 원쑤들이 좋아할 일을 하지 말잔 말이다. 시비를 가르는것은... 원쑤들을 이 강토에서 싹 몰아낸 뒤에 가려두 늦지 않아. 내 이 말을 너 알아듣겠니?>>

<<글쎄 알아들은것 같기두 하구 또 알아듣지 못한것 같기두 하구... 그러니 결국 어쩌자는 말이요? 시원히 뚝 찍어서 말을 좀 하시우.>>

<<시비를 가르너가 앙갚음을 하거나 하는따위는 다 일본놈들을 몰아내구 나라가 독림을 한 뒤루 미루자는거지. 한마디루 말해서... 우리의 급선무는 왜놈들부터 몰아내는거란 말이다. 모두들 힘을 합쳐가지구.>>

<<그래 도중 일동의 의견은 다 일치하우? 일치하다면... 나두 그기 따라야지요. 맞갖잖긴 하지만.>>

한정희가 고개를 가로 흔들며

<<도중의 의견은 거의다 너처럼 앙갚음부터 하자는거다. 모두들 이를 갈구있다.>> 하고 한숨섞어 말하니 씨동이는 대번에 눈방울을 굴리며

<<아 그렇다면 중뿔나게 형님 혼자 나서서 밀막을것 무어 있소? 괜히 남의 지청구만 받게스리.>>하고 대단히 못마땅해하였다. 한정희가 하소연하듯

<<지청구 받는다구 도중 일이 잘못되는걸 뻔히 알면서두 입다물구 가만있으란 말이냐?>> 하고 말하니 씨동이는 무뚝뚝하게

<<난 모르겠소. 그럼 형님 맘대루 하시우.>> 하고 훌뿌려 말하였다.
한정희는 진리가 소수사람에게 있을 때 다수사람앞에서 그 진리를 견지한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날 밝히 알았다.

토요일날 다저녁때 한정희가 공사장에서 하루일이 끝나서 빈도시락을 옆에 끼고 하숙으로 돌아오니 자기 방 책상우에 글쪽지 하나가 놓였었다. 집어보니 누이동생 선희의 산들바람에 나붓기는 능수버들가지모양의 고운 글씨다.

오빠
오늘 저녁 7시 우리 학교애서 학예회를 여는데 학부형들을 초대하니 오빠도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바이올린독주를 하게 되였는데 사라사데의 <<찌고이네르바이젠>>을 골랐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선희
4시 20분

한정희가 부지런히 몸을 씻고 저녁밥을 재촉하여 잠간동안에 다 먹어치운 뒤에 외출복을 말쑥이 갈아입고 그리고 선희가 노는날 와서 닦아놓고 간 기또구두를 꺼내 신고 집을 나서니 보라빛황혼이 바야흐로 거리를 휩싸고있었다. 7시까지는 아직 반시간도 더 남았기에 서두리지 않고 슬렁슬렁 걸어서 산제동으로 향하였다. 이름난 루씨대학교의 석조교사는 산제동막바지에 자리잡고있었다. 행인이 드문드문 보이는 신작로를 걸어올라가다보니 어느 가게방 끝짝 빈지에 큼직한 광고 한장이 붙었는거슬 지나가는 걸음에 읽어보니

토론회
락(乐)이냐, 악(乐)이냐 어느것이 옳으냐?
모두들 열렬히 토론에 참가해주시기 바람.
자격은 제한 없음. 입장은 무료.
시일: X월 X일 오후 X시
장소: XX회관
주최: XX회

이따위 시시껄렁한 광고였다.
한참 더 가노라니까 이와 비슷한 광고가 또 하나 붙었는데 이번것은

토론회
영웅이 시대를 낳는가, 시대가 영웅을 낳는가?
누구나 다 참가하여 열렬히 토론해주시길 바람.
자격은 제한 없음. 입장은 무료.
시일: X월 X일 오후 X시
장소: XX강당
주최: XX사

역시 밥 먹고 할 일이 없는자들의 잠꼬대 같은 광고였다.

한정희는 혼자 쓴웃음을 웃었다. 경찰서의 집회허가가 너무나 관대무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식민지통치에 털끝만큼이라도 저촉이 되거나 혹은 저촉이 될 우려가 있는 집회의 허가는 락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기만큼이나 얻어내기가 어려운 반면에 껄렁껄렁한 잡소리를 쥐여치는 집회의 허가는 동정 칠백리 내 당나귀 타고 가기만큼이나 얻어내기가 쉬웠다. 더구나 종교미신따위 집회에 대해서는 경찰에서 적극적으로 후원을 못해주어 성화가 날 지경이였다. 극장이나 활동사진관 같은데는 모두 관령으로 경관석이라는것이 서리되여있어가지고 칼차고 제보깁은 경관 둘이 번번이 도사리고 앉아서 감시를 하였다. 극을 상연하거나 영화를 상영하는 도중에 조금만 미타한 대목이 있어도 대번에

<<중지!>>

<<중지, 중지!>>하고 송곳같은 뽀족한 소리를 냅다 질러서 예술의 향기 그윽한 장내를 삽시에 살풍경을 만들어놓군 하였었다.

한정희가 한참 더 걸어가니 신작로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타고 지나간 밀차레루가 나섰다. 두팔을 벌려 바다를 안고있는 형상의 원산 시가지는 초생달 모양으로 휘우듬하게 길이만 길고 폭이 좁아서 산을 헐어 바다를 메우는 매축공사가 이때 대대적으로 진행되는중이였다. 남산의 북쪽 날가지를 헐어서 바다를 내메우고 거기다 시장과 어시장을 신설하고 또 배 닿을 안벽을 쌓는데 거기에 쓸 돌과 흙을 실어나르는 밀차들이 지나다니는 레루가 바로 이 레루였다. 그동안에 라이징 썬 석유회사의 부두매축공사가 준공이된 까닭에 한정희, 양씨동 등 청년회관에 속하는 여러 사람은 이리로 일자리를 옮겼었다. 그러므로 한정희는 자기가 낮에 밀차를 밀고 다니던 레루를 지금 외출복차림으로 건느는것이였다.

한정희가 루씨녀학교 교정에 들어서서 뒤를 돌아보니 발밑의 시가지에는 벌써 불들이 켜졌었다. 장덕삼과 방파제와 갈마반도 끝에서는 등대불이 명멸하였다. 바다에서는 밝기도 다 다르고 또 빛갈도 각기 다른 여러가지 선등이 미끄러지듯 오고가고하였다.

학예회는 미국인 교장이 영어로 하는 개회사를 한복차림의 안경 쓴 녀선생이 통역하는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한정희는 저의 누이동생이 각광을 받으며 무대에 선것을 처음보는 까닭에 매미날개 같은 조선옷을 입은 그 아름다움에 새삼스레 경탄하였다. 저게 정말 어려서 내게 볼때기를 쥐여질리고 비줄비줄 울던 계집애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듣는 사람의 가슴을 걷잡을수없이 설레게 하는 <<찌고이네르바이젠>>의 선률이 꼬리를 끌면서 꺼지듯 사라지자 청중들속에서 박수가 터지는데 보니 유지인사들을 모시고 맨 앞좌석에 앉았는 미국인 녀교장이 무대우에서 곱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선희를 향하여 특히 열렬하 박수를 보내고있었다.

(눈에 든 모양이구나.)

한정희는 이와 같이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떡하다 또 보니 자기하고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둔 옆자리에 앉았는 제년갑의 남자 하나도 출연자에게 보통이 아닌 박수를 보내고말았다. 그게 어떤 누구이든간에 제 누이동생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는것은 조금도 싫을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 친구 혹시 우리 선희에게 무슨 딴맘을 먹은건 아닌가?) 하는 공연한 의심도 들어서 대체 어떤 작자인가 하고 넌지시 그 남자의 인물을 다시한번 살펴보았다. 그 남자는 제 옆얼굴에 눈길이 쏠리는것을 알아차렸던지 홀지에 이편으로 얼굴을 돌려 한정희를 맞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 남자의 얼굴에는

(어? 어디서 꼭 보던 얼굴 같은데. 어디서 보았을가?) 하는 의혹이 환히 드러났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생면부지였다. 피차에 처음 보는 사람이였다. 그 남자는 고개를 기울이고 잠시 생각해보다가 생각해낼 가망 없는 생각을 그만두구 다시 얼굴을 무대로 향하였다. 학예회는 홍란파 작 <<봉숭아(봉선화)>>의 합창으로 막을 내렸다.

한정희가 퇴장하는 사람들의 뒤를 청처짐하게 따라 강당밖에를 나왔을 때

<<오빠!>>하고 부르는 소리가 나 뒤를 돌아보니 한손에 바이올린케스를 든 선히가 상기된 얼굴로 뒤좇아왔다. 한정희가 잠시 발을 멈추고 누이동생이 오기를 기다려서 남매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데 뒤에서 또 누가

<<선희언니!>>하고 불러서 남매는 다같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정희가보니 선희보다 자칫 작은듯한 녀학생 하나가 웬 남자 하나와 같이 오면서 선희를 부른것인데 그 남자는 다른 누구가 아니고 바로 아까 제 옆자리에 앉아서 가장 열렬히 박수를 치던 그 남자였다. 선희가 그 남자를 한눈에 보자 곧 오빠를 돌아보고 속삭이듯

<<은희네 담임선생.>> 하고 귀띰해주었다. 한정희가 알아차리고 곧 얼굴에 웃음을 띠고 급히 두어걸음 앞으로 나가서 손을 내밀며

<<모르구 실례했습니다. 저는 한은희의 형되는 사람입니다. 한정희라구 합니다.>> 한즉 김영하선생은 의외롭고도 반가워서 얼른 한정희의 손을 마주잡으며

<<김영하라구 합니다. 이렇게 뜻밖에 만나뵈게 돼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하였다. 그리구 곧 옆에 섰는 녀학생을 돌아보고

<<어서 한선생님께 인사 올려라.>>

말하고 다시 한정희를 보고

<<제 조카아입니다. 이 학교 2학년생입니다.>> 하고 소개를 하였다. 알고보니 김영하선생은 그 조카딸의 학부형자격으로 학예회에 출석을 하였었다. 선희는 김영하선생에게 그리고 김영하선생의 질녀는 한정희에게 각각 나와 인사한 뒤 두 녀학생을 뒤딸리고 한정희와 김영하선새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산제동 내라막길을 내려왔다. 맑은 하늘의 휘영청 밝은 달이 빛을 아끼지 아니하여 온 누리가 대낮과도 같이 밝았다.

<<어쩐지 어디서 꼭 뵌적이 있는분 같다구 생각했더니... 알구보니까 그렇구먼요. 전형이 어찌나 비슷한지... 모르구 보더라두 형제분 남매분인걸 대번에 짐작하겠습니다.>> 하고 김영하선생이 감탄하며 웃으며 한정희도 따라 웃으면서

<<그렇게 같아보입니까?>> 하고 새삼스레 저의 누이동생을 한번 돌아보았다.

<<같아보이다뿐입니까.>>

<<그렇지만 성질은... 삼남매가 다 제각각입니다.>>

<<글쎄요,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만.>>

<<댁이 어디쯤입니까?>>

<<남촌동례배당 아시지요? 바로 그 례배당 비슥맞은쪽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남촌동은 아카시아가 줄지어 늘어서서... 정취 깊은 인상을 주는 동네지요.>>

<<그런데 왜 요전에 댁에 가정방문을 갔을 때... 뵙지 못했을가요?>>

한정희가 잠시 자저하다가

<<그럴 사정이 있어서... 저는 따루 나와 삽니다.>>하고 말하니 김영하선생이 지레짐작을 하고

<<아, 녜, 세간을 나셨구먼요.>> 하고 말하여 한정희는 더욱 어색해져서 발명 비슷이

<<아니 아직 미장가전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김영하선생은 놀라서

<<아, 그렇습니까, 그러세요. 실례했습니다.>> 말하고 무슨 곡절이 있는듯싶어 다시 더 그 말을 묻지 않았다. 그는 어릴적부터 소명한 사람이였다. 둘사이의 수작이 잠시 동이 끊겼다가 김영하선생이 다시

<<밤이 들라면 아직 멀었는데... 지나는 걸음에 저의 집에 잠간 들렸다 가시지요. 비록 초면이긴 하지만... 어쩐지 일면여구루 흉금을 털어놓구 이야기를 나눌수 있을것만 같습니다.>> 하고 말하여 한정희가

<<글쎄요. 그리 이르지두 않은데두...>> 하고 대답을 근지하니 김영하선생은

<<래일이 일요일 아닙니까, 좀 늦으면 어떻습니까.>>하고 들렸다 가기를 죄였다. 일요일은 막벌이군 한정희의 휴일이 아님을 그는 알 까닭이 없었다. 한정희가 마음을 질정하고

<<좋습니다. 그럼 잠간 들렸다 가지요.>>하고 대답하니 김영하선생은 좋아서 싱글벙글하며

<<매씨두 함께 들리도록 하십시다.>>하고 결정을 짓듯이 말하였다.

한정희가 남매 같이 김영하선생네 집에 들려서 이야기하고 놀다가 눌러 밤참까지 얻어먹고 나와 누이동생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혼자 달그림자를 밟으며 하숙에를 돌아오니 벌써 자정이 가까와 야경 도는 사람의 딱따기소리가 딱딱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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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4) 선물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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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신사 (♡.80.♡.246) - 2023/10/19 17:27:43

잘 읽었습니다. 수고 합니다.

로즈박 (♡.39.♡.172) - 2023/10/19 22:51:23

오늘도 올려주셧네요..
고맙습니당~~

qjsrotqmf (♡.50.♡.175) - 2023/10/20 17:03:06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잘보구 갑니다

행운7 (♡.101.♡.74) - 2023/10/22 02:3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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