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1 격정시대 상-15

더좋은래일 | 2023.10.21 11:12:46 댓글: 4 조회: 337 추천: 3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10728


15

무사분주한 선장이가 하교하는 길에 공연히 장마당을 한바퀴 휘돌아 집으로 오다가 그나마 곧바로 오지 않고 쌍년이네 집이 있는 골목까지 에돌아왔다. 쌍년이네 집 산울타리옆을 지나다보니 울안에서 쌍년이가 늙수그레한 마누라쟁이 하나와 무었을 하고있었다. 다시 보니 그 마누라쟁이는 언젠가 저의 외가집에 와 푸닥거리를 하던 무당인데 쌍년이도 지금 살풀이를 하려고 그 무당을 청해다가 푸닥거리를 하는 모양이였다. 선장이가 향긋한 향내를 풍기는 노가주나무잎사이로 구경을 하려니까 무당이 주발에 담은 흰밥을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서 여기저기 고수레하면서

<<고수레야 고수레야.>>

웨치는데 쌍년이는 지대밑에 차려놓은 전물상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선장이가 일년에 몇번 밖에 못 얻어먹오보는 흰밥을 땅바닥에 훌훌 뿌리는것이 아까와 군침을 꼴딱 삼키는데 전물상앞에 꿇어앉았던 쌍년이가 어느결에 보고

<<가지 말구 거기서 좀 기다려.>> 하고 소리치니 고수레하던 무당이 맞갖잖아 입속으로 무어라고 웅얼웅얼하였다.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부정을 탄다는 뜻인지 아니면 전물상에서 제가 차지할몫을 아이놈에게 뜯기울가봐 심사가 틀려서 그러는것인지? 아무튼 선장이는 가지 않고 산울타리밖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무당이 푸닥거리를 총총히 몰아마치고 전물상에 놓았던 전물들을 한 절반 잘되게 목판에 갈라담아 머리에 이고 활개짓하며 가버린 뒤에 쌍년이가 선장이를 부엌으로 불러들였다. 일본식부엌 마루간에서 푸닥거리하고난 음식을 한상 푸짐히 차려놓고 둘이 마주앉아 먹는데 쌍년이가 약주를 한보시기 따라 선장이를 주면서

<<옜다 받아라. 귀신이 먹다남은 술... 우리두 한잔씩 먹자.>> 하고 웃어서 선장이는 입안에 든 육포를 꺼귀꺼귀 씹으면서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난 술 먹을줄 모르우.>>

<<사내체것이 술을 못 먹어? 그렇거던 네 그 불알두 저레 떼 팽개쳐라! 그까짓거 달구 다녀선 뭘 하겠니?>>

쌍년이가 타박을 하고

<<냉큼 받지 못할가!>>

강권하는 바람에 선장이는 마지못해 받아서 오만상을 찌프리며 조금 마시고 술보시기를 도로 쌍년이에게 돌려주었다. 쌍년이는 눈 흘기며

<<멍텅구리!>>

욕을 하고 곧 보시기를 잡아채듯이 받아서 목을 늘이고 남은 술을 단숨에 죽 들이키였다. 그리고

<<어떠냐?>> 하고 웃으며 빈 보시기를 턱 내려놓고 저가락을 집어들었다. 선장이가 육포 먹고 백설기 먹고 또 육포 먹고 백설기 먹고... 아귀아귀 먹는중에 눈언저리와 뺨이 불그레해졌다. 이것을 보고 쌍년이가

<<고걸 먹고 취해? 멍텅구리 같으니!>> 하고 비웃는데 비웃는 쌍년이의 얼굴도 도홍빛으로 상기하였었다. 선장이가 시퉁스레

<<저두 그러면서.>> 하고 마주 비웃으니 쌍년이는 두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한번 눌러보고

<<나두 그러냐? 그럼 우리 둘이 다 취했구나!>> 하고 깔깔 웃었다. 쌍년이가 저가락을 집어들어서 먹느라고 정신이 없는 선장이의 정수리를 한번 툭 때리고

<<내 소리 하나 할게... 너 들어보련?>> 하고 곧 이어 상언저리에다대고 저가락으로 장단을 치면서 <<사발가>>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석탄백탄 타는데 연기나 퍼벌썩 나지만
요 내 가슴 타는덴 연기도 김도 안 난다
......
님 오실 땐 됐는데 원쑤년의 비봐라
님 계신 곳을 알아야 나막신 우산을 보내지
......

쌍년이가 소리 한마디를 다 부르고나서

<<어떠냐 잘하지?>>

<<촌놈이 소리를 들을줄이나 아나!>> 하고 또 깔깔 웃었다. 쌍년이야 소리를 하건말건 선장이는 제 먹을것만 부지런히 주어먹었다. 배가 맹꽁이같이 되도록 먹고나서 트림을 한번 하고 그대로 일어서니 쌍년이가 쳐다보며

<<갈라니? 그럼 좀 가만있거라.>> 하고 따라 일어나더니 가서 신문지 한장을 갖다가 백설기 남은것을 한덩이 싸주며

<<갖다두었다 굼금할 때 먹어라.>>하고 말하였다. 선장이가 신문지에 싼것을 받아들고

<<나 가우.>> 하고 살미닫이문을 드르륵 밀어열고 나오는데 쌍년이가 뒤에서

<<아이고 책보!>>

소리치고 곧 선장이가 놓고 나온 책보를 집어들고 쫓아나왔다. 선장이가 발을 멈추고 돌아서서 백설기 들지 않은 손을 내밀어 필갑소리가 덜그럭덜그럭 나는 책보를 받으니 쌍년이는 반지 낀 손으로 선장이의 머리를 툭 때리며

<<장가 가는 놈이 불알 떼놓구 가겠다.>> 하고 웃었다. 그리고 다시

<<가거던 누나보고 이따 밤에 좀 오란다구 말해라. 꼭 오란다구... 내가 기다린다구.>> 하고 말을 이르고 잇달아서 혼자말록

<<그 기집애 요새는 통 코빼기두 볼수가 없으니 웬 일이야.>>하고 종알거렸다.

호출을 받은 정실이가 석후에 여공불급하게 출두를 하니 쌍년이는 웃으면서

<<아이구, 한진사댁에 출사를 하시더니만... 눈이 높아져서 우리따위는 인제 거들떠보지두 않는구나? 더러운 년!>> 하고 거짓으로 눈이 샐쭉해졌다. 정실이가 두손으로 싹싹 빌며

<<용서해라 용서해라. 그동안 정말이지 몸을 두쪽으루 내두 모자랄만큼 일이 바빠서 못 왔다. 내가 너를 왜 잊겠니? 오자오자하면서두 틈이 없어 못 왔지. 나두 네가 보구싶어 죽을번했다. 그래 그동안 잘 있었어?>> 하고 사과 겸 발명 겸 위로 겸 말하였다.

밖에서는 이해의 마지막 락엽들이 땅바닥에 떨어져 쌀쌀한 밤바람에 딸딸딸 굴러다니는데 전등불 밝은 방에서는 쌍년이와 정실이 두 다정한 친구가 마주앉아 밤이 이윽하도록 댕갈댕갈 재깔였다.

<<그 대관절 한진사댁에 가 넌 무얼 하니?>>

<<무얼 하긴... 부엌데기노릇하지.>>

<<너 혼자?>>

<<아니야. 식모는 따루 있구... 난 조력군이야.>>

<<누구 반연으루 거기를 들어갔지?>>

<<성춘의 고모 알지? 성춘이 고모의 반연으로 들어갔다. 성춘이 고모가 스물두살에 청상과부가 돼가지구... 이젠 삼년이 지났거든. 그래서 벌써부터 말이 있던 석교다리목 고무신방 젊은 주인의 후취루 갔어. 그가 갈 때 우리 댁 마님께 나를 천거해주어서... 내가 그 대리루 들어가게 됐지 뭐냐.>>

<<성춘이 고무가 너하구 어떻게 된다구?>>

<<오촌간이야. 오촌아주머니.>>

<<응 그렇게 된 감투끈이였구나. 그래 월급은 얼마나 준다던?>>

<<당분간은 안잠을 자구... 3원이야.>>

<<앞으로는?>>

<<성춘이 고모가 삼년 살구 4원이였으니까... 어떻게 그쯤 되겠지. 나두 잘 모르겠다.>>

<<그런건 다 누가 맡아 하니?>>

<<최서사, 최서사... 다 최서사가 해. 그전에 나리가 살아계실땐 나리가 일일이 알음했었지만... 지금 도련님은 그런건 다 상관안해. 나리하구 맘이 맞지 않아 줄곧 따루 나가 살다가 인제 집안일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 할수없이 집에를 들어오긴 들어왔지만... 이런것 저런것 도무지 다 귀찮아해. 귀찮은것두 귀찮은거지만 그보다두 우선 서툴러서 무얼 잘 모르니 어떻거니. 그런데다가 갓 붙들려온 사슴처럼 맘은 늘 숲속에 가있어. 령감마님의 분부만 아니라면 애당초에 들어오지두 않았을거래. 이런 속내두 다 식모한테 얻어들은거다. 내야 갓 들어간게 어디 잘 아니.>>

<<한진사까지 세상을 뜨게 되면... 그 큰살림이 어떻게 되겠니, 걱정거리다.>>

<<령감마님은 아직두 사실 날이 멀었는데.>>

<<사실 날이 멀었으면 백살 살겠니? 선희 아버지 못 봐, 언제 죽는다구 미리 말하구 죽던?>>

<<그거야 나중 일이지.>>

잠시 동이 끊겼다가 정실이가 다시

<<요즘 댁 사랑에는 조합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데... 무슨일인지 모르겠다.>> 하고 말하니 쌍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조합? 무슨 조합?>>

<<로동조합두 모르니?>>

<<오 명석동패거리! 그래 댁에서들은 좋아하니?>>

<<좋아하긴,>> 하고 정실이가 고개를 가로 흔들고

<<도련님 혼자밖에 좋아하는 사람 하나 없다.>> 하고 말하니 쌍년이도

<<골치덩이로군.>>하고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누가 아니래여.>>

<<그래 넌 지내기가 어떠냐 거기서?>>

<<난 살기 좋다, 댁의 인품이 좋아서. 그동안은 처음 들어가서 일이 서툰것두 있었지만 그보다두 겨우살이준비를 하느라구 몹시 분주했어. 고양이의 손이라두 빌리구싶을만큼 복대겼어. 그렇지만 이젠 김장두 다 담그구 했으니까... 차차 신역이 편해질게다. 이것두 다 식모가 한 말을 되받이하는 말이야.>>

이때 골목길에서 나이 지긋한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가

<<밤엿 사구려! 후추양념의 밤엿을 사구려!>> 하고 웨치는것이 들려서 쌍년이가 벌떡 일어서며

<<오래간만에 밤엿이나 좀사먹자.>> 하고 곧 경대서랍에서 구멍뚫린 백통전 한잎을 꺼내들구 정실이가 미처 붙들 사이도 없이

<<밤엿장수!>>

부르며 장지를 열고 마루로 뛰여나갔다. 귤상자만한 엿궤를 한쪽 어깨에 걸메고 손에다는 가위 대신에 초롱불을 든 엿장수가

<<네 갑니다.>>

소리를 앞세우고 울안으로 들어오더니 지대에 올라서며 곧 마루끝에 초롱을 내려놓고 또 엿궤를 내려놓았다.

<<얼마나 드릴갑쇼?>>

<<10전어치 주세요.>>

<<녜녜, 낱가래루는 2전씩이지만... 10전어치니까 여섯가래 드립니다. 맛이 참 훌륭합지요. 옜습니다.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른다니까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밤엿장수는 미처 밖으로 나가기도전에 또 목청을 돋우어서

<<밤엿 사구려! 후추양념의 밤엿들 사구려! 둘이 먹다 셋이 죽어두 모르는 밤엿입니다.>> 하고 입심 좋게 웨쳤다.

후추가 들어 맵싸한 엿을 둘이 노나먹으면서 또다시 미진한 이야기장을 폈다.

<<선희는 어떻거구 있니?>>

<<아가씨 말이지. 아가씨는 언제나 내 편이야. 나하구 맘이 꼭 맞아. 그렇지만 이제 서너달 있으면 서울을 갈테니까... 섭섭해서 난 어떻거니.>>

<<공부하러?>>

<<응 전문학교.>>

<<가서 무얼 배운다던?>>

<<음악. 루씨학교 교장-미국녀자... 알지? 그 미국녀자가 다 반했대. 아가씨 바이올린에.>>

<<대단한가보구나.>>

<<전교의 으뜸이래.>>

<<은희는 어떻거구 있니? 그 움파 같은 애... >>

<<애기 말이지? 애기는 할아버지의 귀염둥이라서 서울 못 가. 앞에다 늘 두구보셔야 하니까. 원중으로 갈거야.>>

원중은 원산중학 즉 일본학샐들이 다니는 학교다.

<<원중엔... 조선학생이 아주 적지?>>

<<20대1 꼴이래.>>

<<그럼 한 학급에 두엇두 있으나마나하겠구나.>>

<<그럼 선장인 어떻거니? 선장이두 은희하구 한학급이니까... 래년 봄이 졸업 아니냐?>>

<<내가 너한테 말 안했던가?>>

<<무어 말이냐, 난 못 들었다.>>

<<얘 그 녀석이 글쎄 호박이 떨어졌지 뭐냐, 하늘이 도왔지.>>

<<박참봉네 큰손녀... 알지? 그 괴상한 카우보이옷이란걸 입구 말을 타구 다니는 싱검쟁이... 그 큰누이 말이야. 그 큰누이가 우리 외칠촌아주머니벌이 돼. 그 남편이 서울서 변호사노릇을 하는데... 결혼한지 10여년에 아직두 둘사이에 아이가 없지 뭐냐. 그렇지만 그건 우리 그 아주머니탓이 아니구 남편타이야. 남편이란게 총각때부터 어찌나 바람을 피웠던지... 이제 속이 싹 곯아서 아이를 근본적으루 만들질 못한대...>>

정실이가 하는 중간에 쌍년이가 입을 비쭉하고

<<망할 녀석.>> 하고 욕을 하여 정실이는

<<누가 아니래...>>

맞장구를 친 뒤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ㄱ래서 그 아주머니가 양자할 아이를 물색하는중인데 지난번에 친정엘 다니러 왔다가 우리 외가집 할머니한테두 인사를 하러 왔지 뭐냐. 그런데 마침 그날 선장이녀석이 엄마를 따라 외자집엘 놀러 갔다가 외할머니가 서울아주머니께 인사하라구 시켜서... 꾸뻑 절 한번 한 모양이야. 그 아주머니가 `젖 갓 떨어진걸 봤는데... 벌써 이렇게 컸느냐`고 놀라면서 나이를 물어보구는 `열세살룬 숙성하다`, `얼굴이 동탕하다`, `참말 똑똑하게 생겼다`... 이런 소릴 하더라잖아. 그러다가 우리 엄마 보구 아들이 모두 몇이냐구 물어서 엄마가 아들은 이거 하나뿐이라구 말했더니... 여간 섭섭해하지 않더래.>>

<<탐을 낼만두 하지 뭐. 좀 잘생겼어? 내라두 그러겠다.>>

<<그 아주머니가 이튿날 우리 집엘 일부러 찾아와서 제 눈으로 보구... 살림이 마련 없어서 도저히 아이의 공부를 더 시킬 형편이 못되는걸 안 뒤에 `좋소. 그럼... 장래는 어찌되든간에 우선 아이는 내가 맡아 공부를 시킬테니... 서울중학교에다 지원서를 내도록 하시오. 여기 학교만 졸업을 하면 곧 서울루 올려보내시오` 해서 엄마 아부지두 두말없이 좋다구 했지 뭐냐.>>

쌍년이가 좋아서 손벽을 치며

<<거 잘됐다. 거 잘됐다. 정말 잘됐다.>>하고 마치 저의 친동생이 장원급제라도 한것 같이 기뻐하였다,

<<하늘이 굽어살피잖았더라면 그 녀석이 제 생전에 그래 서울가서 공부할 꿈이나 꾸었겠니.>>

<<그것두 다 제 복이지. 아무튼 내 근심 하나가 덜린 폭이다.>>

말하고 쌍년이가 다시

<<그렇지만 내 근심은 아직 또 하나 남았다.>> 하고 짐짓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여서 정실이는

<<무슨 근심이 또 남았어?>> 하고 물었다. 쌍년이가 정색을 하고 정실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너 시집 보낼 일이 아직 남아있단 말이다.>> 하니 정실이는 대번에

<<네 그 아가릴 찢어놓잖으면... 내가 성이 서가가 아니다!>> 하고 두손으로 할퀴려 들었다. 쌍년이가 얼른 얼굴을 뒤로 젖히고 한옆으로 피해 앉으며

<<좋으면 그거 좋다구 그래...>>하고 더욱 놀리니 정실이는 식식거리며

<<네가 아마 그럴 맘이 있는겟다. 그러찮으면야 푸닥거린 왜 하겠니... 오늘 했다며?>> 하고 마주 놀려주었다.

<<아닌게아니라 나두 그럴 맘이 없지 않다. 내라구 한평생 일본놈의 식모첩노릇만 하란 법이 있다더냐.>>

<<네 그 씨동이랑군님이 요새 자꾸 우리 도련님을 찾아오더라.>>

<<두 총각이 잘 맞다들었구나. 서루 맘이 맞으면 좋지야. 하나는 부자총각, 하나는 가난뱅이총각.>>

오래간만에 만난김에 둘이 마주앉아 끝이 없이 지껄이다가 너무 늦으면 야단맞는다고 정실이가 일어나오니 쌍년이도 따라 나오면서

<<그것두 역시 고된 시집살이로구나.>> 하고 스스로 스스로를 비웃듯 한탄하듯 말하니 정실이는

<<녀자루 태여난게 잘못이지...>> 하고 탄연한 어조로 말하였다.숙명적으로 짊어진 십자가는 그대로 짊어지는수 밖에 없다는 체념에서 나오는 말인가?

정실이가 한진사댁 안중문을 들어서니 부엌간에 불이 환하였다. 종종걸음을 쳐가서 부엌분을 열고 들어서니 밤참상을 차리던 식모가 뒤돌아보고

<<마침 맞게 옵시는군. 큰사랑에 손님이 오셧으니 어서 이 상 내가요.>> 하고 말하였다. 정실이가 상앞으로 다가서며

<<어떤 손님이인데요?>> 하고 물으니 식모는

<<애기네 담임선생이래여.>>

말하고 갑자기 모소기를 낮추어 간능스럽게

<<아가씨때문에 오는건 아닐가?>>하고 물었다. 정실이는 잠자코 다 차린 밤참상을 들고 바깥사랑으로 나왔다. 정실이가 마루에 상을 내려놓고 올라가 미닫이앞에 쪼크리고 앉으며 낮게 기침을 하였더니

<<누구야?>> 하고 한정희가 자리에 앉은채 한팔을 늘이여 미닫이 한짝을 잡아당겨 열었다.

<<오 이리 줘, 내가 받아놓을테니.>>

한정희가 상을 받아놓은 동안에 정실이가 김영하선생에게 고개를 까댁하여 인사하였더니 김영하선생은

<<어 정실씨.>>하고 약간 놀란듯한 웃는 얼굴로 인사를 맞았다.

한동안 지난 뒤에 정실이가 상이 났는가 해서 바깥사랑에를 나와보니 물린 상은 벌써 나와있고 방안에서는 주객이 마주앉아 담화하는 소리가 들리였다. 풍경소리같이 맑고 청청한것은 한정희의 목소리요 클라리네트처럼 부드럽고 감칠맛이 있는것은 김영하선생의 목소리다.

<<물론 우리 민족의 급선무는 식민통치의 기반에서 벗어나는거지요. 그렇지만 민중의 철저한 해방은 그것만으룬 얻어지지를 않습니다.>> 하는것은 한정희의 목소리이고

<<그럼 어떡해야 좋습니까? 구체적으루 말씀을 좀 해보시오.>>하는것은 김영하선생의 목소리다. 정실이는 소리르 내지 않으려고 마루에 놓인 상을 마루아래 서서 조심조심 들어내였다. 방안에서는 담화가 계속되였다.

<<나라가 독립을 하더라두... 대다수의 민중이 여전히 헐벗음과 굶주림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면... 애써 독립을 할 보람이 어디있습니까?>>

<<잘사는 사람두 있구 못사는 사람두 있는것이 인간세상이 아닙니까? 이 빈부의 차이는 력대루 존재해왔습니다. ... 수백년 수천년을 두구두구 말입니다.>>

이튿날아침 작은사랑에서의 일이다. 최서사이하 여러 아래도리 일하는 사람들에게 령감마님이라고 불리는 한진사의 아침진지상을 내갈 때, 의전례하여 그 며느리 즉 한정희 삼남매의 어머니가 정실이에게 상을 들려가지고 나갔다. 정실이가 상을 들고 마루앞에까지 와 서면 앞서서 마루에 올라간 며느님이 먼저 미닫이문을 연 다음에 그 상을 받아서 방에 들여다 시아버님앞에 놓는다. 이렇게 하는것이 하루 삼시 판에 박은것처럼 되풀이되는 법식이였다. 단지 외간의 손님들이 오셧을 때만은 례외였다. 이날 아침상을 물린 뒤에 며느님이 막 사아버님의 방에서 물러나오려는데 시아버님이

<<내가 할 말이 있으니... 너 있다 아침후에 좀 나오너라.>>하고 말을 일러서 며느님은

<<녜.>>

대답하고 나와서 물린 상을 떠받든 정실이를 앞세우고 안으로 들어왔다.

한식경이 지난 뒤에 작은사랑에서는 시아버님과 며느님 사이에 이런 말이 오고갔다.

<<너두 알다싶이 정희는 이 집안의 장손이야. 그런데 나이 스물일굽에... 일굽이냐 여덟이냐?>>

<<여덟이예요 아버님.>>

<<그래 나이 스물여덟에 아직 장가를 못 들어? 그게 어디 될 말이냐. 그러니 어떻게 해서라두 마땅한 규수를 수소문해... 혼인을 정하두룩 해야겠다. 이 말을 하려구 너를 나오라구 한것이다.>>

<<녜, 저두 그일루 해 노상 속을 끓이구있사와요. 아버님. 그렇지만 이런 마른하늘의 벼락 같은 일을 당하구보니 또 생각지두 않은 대삼년이 아니구 뭡니까. 대삼년이 끝나면 그 애가 나이 서른이 넘사와요. 아버님.>>

<<대삼년... 대삼년이 왜 있을고! 나는 죽지 말란 법이 있더냐? 나 죽으면 또 거상. 너는 죽지 말란 법이 있다냐? 너 죽으면 또 거상... 그러다간 이 가문의 장손을... 총각으로 늙혀죽이기가 쉽겠다! 안될 말.>>

<<그러니 어떡했으면 좋겠습니까 아버님.>>

<<대삼월... 대삼월... 대삼월이면 족해. 아무리 조상의 법이라 할지라두 시대에 맞지 않는건 고쳐야 해. 죽은 사람대문에 산 사람이 못사는 법도를 그대루 묵수한다는건 우매한짓이야. 곧 서둘러 개춘전에 대례를 치르두룩 해.>>

<<녜 알았습니다. 아버님.>>

<<인생칠십이 고래희야. 내 나이 이젠 칠십을 넘었는데 언제 어떻게 될줄 알구... 서둘러라! 죽기전에 손자며느리 얼굴이나 좀 보자. 잘하면 증손을 안아볼수도 있으렷다.>>

<<안아보시다뿐입니까.>>

<<진홍사회 송화장네 딸이 여럿인데... 그 막내가 몇살인지 한번 알아봐라. 그집 딸들이 자색이 있어. 덕두 있구.>>

<<녜, 아버님 분부대루 거행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시아버님과 며느님 사이에 오고가는 말을 장지 하나 사이에 둔 마루방에서 물걸레질을 하며 정실이가 자연히 엿듣게 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수작이 장차 저하고 무슨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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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39.♡.172) - 2023/10/21 12:28:50

하하..혹시 정실이가 이집 며느리가 되는거 아닐가요?
글을 어찌나 잘 쓰셧는지 글속에 자꾸 빨려들어갑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당

더좋은래일 (♡.136.♡.131) - 2023/10/21 16:40:13

저도 정실이가 그렇게 될거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ㅋㅋ

qjsrotqmf (♡.50.♡.175) - 2023/10/22 13:37:35

오늘두 잘 보구 갑니다 .

산동신사 (♡.79.♡.155) - 2023/10/22 18:57:52

잘 읽고 갑니다. 수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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