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1 격정시대 상-21

더좋은래일 | 2023.10.23 23:28:05 댓글: 3 조회: 287 추천: 2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11357


21

해마다 5월이 되면 종로에 야시가 섰다. 종로네거리의 인경이 달려있는 보신각앞에서부터 종로 3정목-동구안대궐 즉 창덕궁이 직선으로 바라보이는데까지 길 남측 포도를 따라 한줄로 늘어선 로점이 그 수를 헤아릴수없이 많은데 거기서 사고파는 물건들이 다종다양하였다. 석후에 소풍 겸 구경을 나온 사람들과 물건을 사러 나온 사람들로 붐비는 좁고 긴 야시장은 밤서울의 없지 못할 풍물시였다.

선장이가 숙자아주머니를 따리 이 시장을 처음 나와 돌아보다가 크게 흥미를 느낀것은 잡지들을 파는 로정이였다. 그 로점에서는 <<깅구(국왕)>>니 <<웅변>>이니 <<문예춘추>>니 <<개조>>니 <<소년구락부>>니 하는따위의 50전짜리 일본잡지들을 한두달 지났건 두석달 지났건 일률적으로 홑 5전씩 팔았었다. 선장이가

(이게 웬 땡이냐!)

생각하고 떡본 도깨비처럼 달려들어 단꺼번에 네책을 골라잡으니 숙자아주머니는

<<왜, 책이 다 날아날가봐?>> 하고 웃으며 가상히 여기는 눈으로 선장이의 하는양을 바라보았다.

비누갑에 인두에 석쇠에 조리에 필통에 양말대님에 구두솔에 빗에 목책에 접칼에 쥘부채에... 오만가지 일용잡화를 되는대로 벌여놓고

<<15전에 두가지! 15전에두가지! 맘대루들 골라잡읍소! 15전에 두가지!...>> 하고 웨치는 장사치가 있는가 하면 바나나를 산더미처럼 무져놓고 딱따기를 딱딱 쳐가며 100몸메(돈중)에 얼마라고 싸구려를 부르는 장사치들도 있는데 그런것이 다 선장이의 눈에는 새로와보이고 또 신기로와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선장이를 가장 놀라게 한것은-

어느 로점앞에 손님 하나가 발을 멈추고 서서 물건흥정을 하다가 에누리를 너무 많이 하니까 흥정을 그만두고 발길을 돌려버렸다. 로점상인이 곧 그 손님의 등뒤에다 대고 급한 말로

<<여봅시오 여봅시오! 값을 잘해드릴테니 사십시오!>> 하고 웨치다가 그 소님이 못 들은체 그냥 가니까 이번에는

<<여보 여보!>>

말씨를 한급 낮추어 불러보다가 그래도 그냥 가니까 나중에는

<<야 야!>>하고 놀림조로 하대해 부르는것이였다. <<야 야!>> 불러놓고 저 혼자 싱글싱글 웃는 그 젊은 로점상인의 유들유들한 얼굴을 보자 선장이는 혼자

(저 자식이 정말 갈데없는 망나니로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숙자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런자들은 에누리를 사람 보아가며 하는데 가령 1원짜리 물건이라면 1원 50전도 부르고 2원도 부르고 2원 20전,3원... 드리없이 막 부른다는것이였다

탑골공원 맞은편까지 와서 이제 고만 돌아가자고 햐여 선장이가 숙자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전차길을 건너서니 파고다공원(즉 탑골공원) 철격자문앞과 인사동 길어구에 풋나무를 실은 소바리들이 웅긋쭝긋 서서 살 사람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들은 동대문밖 또는 동소문밖에서 시내에를 들어오기는 낮에 들어왔으나 나무가 팔리지 않아서 허행을 할수는 없고 하여 그러고들 있는것이였다. 그나마 경찰의 단속이 두려워(시내에서는 자전거든 인력거든간에, 마차나 소바리도 마찬가지로... 밤에 등이 없으면 취체를 당하였다) 양초 한가락씩을 사서 불을 켜가지고는 종이쪼각에 말아쥐고 섰는 모양이 보기에 딱하고 또 가련하였다.

구스노끼(楠)만년필점앞 불밝은 포도우에 여라문살 먹은 사내아이 하나가 쪼클고 앉아 석필로 콩크리트바닥에다 그림을 그리고있는데 길가던 사람들이 대여섯 발을 멈추고 둘러서서 신기한듯 구경을 하고있었다. 머리가 쑥바구니 같은 그 아이가 몸에 걸친것은 때국이 흐르는 넝마였으나 그 그림 그리는 솜씨만은 일품이였다. 사람, 소, 말, 개, 닭, 비둘기... 어느 하나가 생동하지 않은것이 없었다. 그림과 그림 사이에 놓인 쭈그러진 깡통에는 사람들이 던져준 동전 대여섯잎이 들어있었다. 거기서 불과 몇발자국 안 떨어진 길어구에서는 앞치마를 두른 청료리집 사환 즉 중화료리점 사환이 서투른 조선말로 손에 초불을 든 나무바리임자와 흥정을 하고있었다.

<<그 나무 얼마요?>>

<<60전... 60저이요... -따라가 부리리까?>>

<<60전이 너무 비싸... 50전이 하시오.>>

<<안 비싸오 안 비싸. 나무단을 좀 보구 말하시오. 장궤. 원래는 70전을 꼭 받아야 하는건데... 인젠 날두 저물었구 해서 아무렇게나 부리구 갈 생각으로... 60전을 부른거요.>>

<<그래두 50전이 하시오.>>

<<그렇게는 안된대두요. 60전이면 정말 싸다니까요. 장궤.>>

<<그럼 그만두시오. 딴데두 얼마든지 있는데...>>

밤은 들지, 집은 멀지, 게다가 소, 사람은 다같이 배를 곯지,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된 나무바리임자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더니 초불 들지 않은 손으로 돌아서 가려는 청료리집 사환의 팔소매를 얼른 붙잡았다. 그리고 풀기없이

<<어디요? 갑시다.>>

말하고는 또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길거리에 서서 밤을 지새울수는 없는노릇이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선장이는 온몸의 피가 일시에 끓어오르는것을 느꼈다. 불쌍한 나무장사늙은이를 외통목에 몰아넣고 달고치듯하는 그 청료리집 사환이 밉기가 그지없었다. 강렬한 민족감정이 잠자던 맹수처럼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쳐들었다. 선장이는 곧 달려들어 주먹벼락을 안겨주고싶은 충동까지를 받았다. 그러나 한편, 나무값 10전을 깎아내리는데 성공을 한 청료리집 사환은 팔소매를 붙잡은 나무장사를 돌아보고

<<그럼 잠간 좀 기다리시오. -집은 고대요... 바루 조 조기... 중화원... 멀지 않소.>>

말하고 곧 예닐곱발자국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아무말없이 10전짜리 구멍 뚫린 백통전 한잎을 앞치마에 달린 호주머니에서 꺼내가지고 그림 그리는 거지아이의 깡통속에 달랑 던져넣어주는것이였다. 언제나 구리빛의 동전만이 들어오게 마련인 깡통속에 난데없이 은빛의 백통전이 날아드는 바람에 영문을 모르는 아이가 한손에 석필을 쥔채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앞치마 두른 청료리집 사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흥정해놓은 나무바리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가고있었다. 이 광경을 본 선장이의 머리속에서는 도저히 무어라고 이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해일처럼 뒤설레였다.

선장이가 넉달이 채 못되는 첫 한 학기 동안에 학과외에도 보고 듣고 겪어서 배운것이 여간 많지가 않았다. 유도시합에서 뛰여난 솜씨를 보여준 두 상급생-4학년의 <<곰보>>와 <<백발귀>>를 선장이를 특히 우러러보았다. 동화책에서 읽은 헤라틀레스나 삼손 같다고 생각하였다(그들은 각각 희랍과 이스라엘의 용사들이였다). <<곰보>>는 얼굴이 약간 얽었고 또 <<백발귀>>는 머리에 새치가 많았다. 선장이도 새 유도복을 입고 새 다다미를 깐 도장에서 한주일에 두시간씩 유도를 배웠다. 그러나 웬 까닭인지 늘 그식의 장식으로 재주가 늘지를 않았다(금년에는 흰 띠, 래년에도 흰 띠, 후년에도 역시 흰 띠... 흰 띠로 시종일관하는축에 들었다. 초단이상의 유단자들은 모두 검은 띠를 띠고 또 1급까지의 유급자들은 파랑띠, 밤색띠 따위의 색띠를 띠는 법인데 선장이는 종시 그런 영예를 지녀보지 못하고말았으니 아마도 타고난 팔자인가보았다).

학교에는 이습회라는, 학생들이 자치를 운영하는 조직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체벌을 가하는것은 봉건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야만적행위라고 열변을 토하는 학새이 잇느것을 보고 선장이는 크게 감동하고 또 경탄하였다. 그 학생의 금장을 보니 <<4>>자가 붙어있었다. 4학년생이였다. 그 학생은 진일보하여-

<<교외에서 서루 만나 경례를 할 때두 그렇습니다. 하급생이 먼저 경례를 해야만 상급생이 답례를 하는것두 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구 나는 생각합니다. 경례는 어느 편이건 먼저 본 사람이 먼저 하는것이 좋다구 생각합니다. 구경 우리 여기는 학원이란 말입니다. 병영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창의까지 하였었다. 그런데 선장이를 더욱 놀라게 한것은 상급학생들이 절대적우세를 차지하고있는 그날의 모임에 결국에 가서는 그 학생이 창의를 찬동하는 결의를 한것이다. 선장이는 <<곰보>>나 <<백발귀>>를 우러러보는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 그 김봉구라는 4학년의 웅변가를 우러러보았다. 나중에 선장이가 곽복덕이를 보고

<<그 4학년의 김봉구... 참 대단하더라.>>하고 탄복하는 어투로 말하니 곽복덕이는

<<그치 별명이 `키케로`지 아마.>>하고 말하였다.

<<키케로? 키케로가 뭐냐?>>

<<키케로가 뭔진... 나두 잘 모른다.>>

<<좋다는 뜻이야 나쁘다는 뜻이야?>>

<<모르지 무슨 뜻인지... 낸들 아니.>>

<<뺑덕할미 같은게!>>

선장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여나오니 곽복덕이는 놀라서

<<아 자식이.>> 하고 누가 듣는 사람이나 없나 황망히 사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눈방울을 굴리며

<<죽구싶니?>> 하고 선장이를 타박하였다.

저녁밥상머리에서 단둘이 마주앉아 밥을 먹다가 선장이가 숙자아주머니에게 어둔 밤에 홍두깨로 불쑥

<<키케로란게 뭡니까?>>하고물으니 숙자아주머니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무슨 로?>>하고 재쳐 물었다.

<<키케로.>>

<<키케로? 어디에 나오는 말이야?>>

<<우리 학교 상급생의 별명. 연설을 썩 잘하는.>>

<<오, 키케로! 난 또 무슨... 키케로란 사람은 옛날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야. 그리고 또 고금에 드문 웅변가이기두 하고. 아주 유명하지. 유명하다뿐이야. 너의 아저씨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그 키케로하구 미라보야... 프랑스의 미라보.>>

<<로마가 어딥니까?>>

<<지금의 이딸리아... 그렇지만 키케로는 2천년전 사람이야. 너 아직 서양사를 안 배워서 잘 모르는구나.>>

선장이는 자신의 천식함을 통절히 느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공부를 잘해야 하겠다고 속으로 발분하였다.

<<아저씬 오늘두 또 늦게 들어오시려는가보지요?>>

선장이가 숙자아주머니를 가엾이 생각하여 위로조로 이렇게 말하니 숙자아주머니는 말없이 눈만 샐쪽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듯이

<<너 오늘 숙제 많니?>> 하고 물어서 선장이가 고개를 가로 흔드니

<<그럼 나하구 활동사진구경이나 가자.>>

말하고 곧 숟가락을 부지런히 놀리기 시작하였다. 숙자아주머니의 그러한 태도에서는 자포자기하는 기미와 보복의 기미가 엿보였다.

남녀 칠세 부동석으로 활동사진관 즉 영화관에도 부인석이라는게 따로 마련되여있던것이 남녀평등권운동의 바람이 부는통에 기강이 흐슬부슬해져서 이때는 남녀가 같은 좌석에 앉아 영화를 관람하여도 괴변으로까지는 여기지들 아니하였었다.

이튿날아침, 선장이 조반상을 들여놓아주던 어멈이 상글거리며

<<도련님, 엊저녁 활동사진구경 재미있었에요?>> 하고 물었다. 선장이가

<<응, 재미있었어. 오늘밤 나하구 둘이 가볼가?>> 하고 마주 웃으니 어멈은 호들갑스럽게

<<어머, 그런델 지가 어떻게 간대요.>>

말하고 얼굴을 옷깃에 파묻었다. 그런데를 가면 무슨 큰 변이 나는줄 아는 모양이였다. 어멈이 나간 뒤에 선장이가 밥을 먹으며 혼자 생각하였다.

(얼마나 불공평한 세상이냐, 다같은 인간인데!)

그러자 불현듯 원산에 있는 누나와 쌍년이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선장이는 무엇인가 아픈것이 제 가슴속에서 꿈틀하고 돌아눕는것을 느꼈다.

(가엾은 사람들!)

학교에서 학생들이-주로 삼사학년 학생들이- 그동안에 준비해온 연극을 상연하게 되였다(일이학년은 아직 좀 어리고 또 5학년은 상급학교입학시험준비가 바빠서 이런 활동에는 덜 참녜하였었다). 교장이하 전교 칠팔백명 사제가 다같이 지켜보는 가운데 막이 열리니 무대는-그럴듯하게 꾸며진 청공장의 내부였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작업복차림을 한 철공들이였다. 무대장치에 교묘하게 전기를 리용한 까닭에 모루에다 메질을 할 때 불꽃이 튀는것이 진짜 같았다. 선장이가 넋놓고 파고 보는중에 무대에서는 착취당하는 철공들의 분노가 터졌다. 이어 착취자의 피착취자 사이의 모순과 투쟁이 고조에 다달았다가 마침내 철석같이 단결을 한 철공들이 승리를 거두는데서 막이 내렸다. 마지막 순서는 교장선생의 강평이였다. 선장이는 교장선생이 학생들의 이러한 연극을 어떻게 평하나 들어보려고 귀를 도사리였다.

<<학생이면 학생들답게 학원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어야지 학업하구는 아무런 인연두 없는 무슨 프로레타리아니 계급투쟁이니 착취니 스트라이크니... 그게 다 무슨 가당찮은짓들인가?>>

강교장은 맞갖잖아 이렇게 뇌까리고 다시

<<본인은 본교의 교장으로서 그런 학업에 유해한 괴외활동은 금후 절대루 허용하지 않을터이니... 미리 그리들 알아두라.>> 하고 강평을 마치자 그는 락태한 고양이상을 해가지고 페회도 기다리지 않고 쮜 혼자서 퇴장을 해버렸다. 불수이거(拂袖而去)란 바로 이런것을 말하는것이다. 교직원들이 분분히 일어나 그뒤를 따라나갔다. 교장이 퇴장을 하는데 수하인 자신들이 뒤에 남아있으면 체모에 어긋날가봐서였을것이다. 뒤에 남은 학생들이 서로 돌아보고 어이없어하는중에 무대에서는 얼굴에 환을 그리고 또 몸에다 작업복들을 걸친 학생소인극의 배우들이 제각기 절썩절썩 볼기짝들을 치며 앙천대소를 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교장의 입내를 내여

<<본인은 본교의 교장으로서 그런 가당찮은짓을 절대루 허용하지 않을테다! 알았느냐?>> 하고 웨치니 장내에서는 박수소리와 함께 폭소가 터졌다.

다음다음날 월요일 아침에 선장이가 등교를 해보니 책상마다 등사한 격문 두장씩이 들어있었다. 선장이로서는 생후 처음 받아보는 격문인지라 자신이 어른이 되기라도 한것 같아 마음에 대견하였다.

<<강규황은 민족적지조를 굽히고 외세에 아부하는 패덕한이다. 강규환은 일본제국주의가 그 식민통치를 공고히 할 목적으로 내리먹이는 노예교육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날뛰는 일제침략자의 충실한 노복이며 주구이다. 우리 700명 전교 학생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강규황을 단죄하는 동시에 노예교육의 독소로 오염된 학원을 정화하기 위하여 강규황의 인책사직을 요구한다. 전체 학생들은 중간운동시간에 뽈없이 도수로 운동장에 모여가지고 강규황의 퇴진을 교섭할 대표를 선출하자.>>

강규황이란 더 말할것도 없이 강교장이다. 그리고 중간운동시간이란 오전수업을 두시간 본 뒤에 20분 동안 운동장에 나가 뽈을 차는 시간을 말하는것이다. 그 시가에는 들어가 축구뽈 두개씩 내다가 전교 학생이 일시에 어울려 차는데 그 20분 동안 넓은 교정에는 수십개의 축구뽈이 콩튀듯하였다.

선장이는 공연히 조바심이나 영어 한시간, 식물 한시간을 건성으로 보고 하학종이 나기가 바쁘게 운동장으로 뛰여나갔다. 그러나 조바심을 하여 그 시간을 기다린것은 선장이 하나만이 아닌 모양이였다. 실내화를 벗어놓고 외출화를 갈아신는 신발장칸이 우 몰려든 학생들도 출근혼잡시간의 전차칸처럼 붐비였기때문이다. 선장이가 사람에 북대기며 간신히 구두를 갈아신고 구두끈도 매지 못한채 밖으로 뛰여나오니 뽈 하나 보이지 않는 운동장에는 벌써 동서 량쪽 현관으로 꾸역꾸역 쏟아져나온 학생들이 떼떼이 몰려섰었다. 심상찮은 기운이 떠도는것이 한눈에 알렸다. 시간이 되였는데도 뽈을 가지러 오는 학생이 하나도 없는것을 보고 괴이쩍게 여긴 감독석생들-유도선생 한진희와 체육선생 김보영-이 어찌된 영문을 알려고 어슬렁어슬렁 중앙현관으로 나와가지고 축대끝에 나섰다. 조회시간도 아닌데 축대밑에 와글와글 모여선 학생드를 내려다보고 상고머리 유도선생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뽈을 찰 생각두 안하구?>>

4학년 키케로-김봉구가 늘씬한 다리도 두어걸음 앞으로 나서서 축대우를 쳐다보며 소리쳐 대답하였다.

<<이습회에서 비상대뢰를 소집했습니다.>>

<<그런 대회는 왜 방과후에 소집 못하구?...>>

<<그러게 비상이라잖습니까?>>

<<누구 허락을 맡구.>>

<<이습회의 간사들이 결정을 한거니까... 선생들은 간섭할 생각 마시구... 고만 도루 들어들 가십시오.>>

학생들 틈에서

<<옳소!>>

<<옳소!>>

성원하는 소리가 일시에 튀여나오고 또 련달아 튀여나왔다. 유도선생은 물계가 좋지 못한것을 보고 무슨 말을 좀더 하려다가 중지하였다. 그리고 곧 체육선생과 서로 눈짓한 뒤 둘이 함께 급한 걸음걸이로 되돌아들어갔다. 그러자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 눈이 검실검실한 김봉구가 돌층계를 급히 뛰여올랐다. 맨 웃단에 서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조용들 하라고 두팔을 벌려 가라앉히는 형용을 하였다. 그리고 청중이 정숙하기를 기다려가지고 열기 띤 선동연설을 내리쏟는것이였다.

<<제군! 우리는 그동안 참을만큼 참았습니다. 그러나 참는것두 한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학교엘 들어온 목적은... 어떻게 하면 더 충실한 노예가 되겠는지를 배우거나 연구하려구 들어온게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인류사회의 진보에 이바지할 유용한 지식을 배우려는데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물질적재부와 귀중한 문화유사는 로동에 의해 창조가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학원을 그러한 로동이나 로동하는 사람과 동떨어진... 무슨 지상락원따위를 만들어놓구... 무슨 에덴동산따위를 만들어놓구... 일본상전의 맘에 들 노복들을 길러내려구... 지금 존경하는 우리의 교장선생 강규황씨는... 밤잠두 못 주무시구 로심초사를 하구계십니다...>>

전체 학생들의 폭풍 같은 박수와 갈채가 연설을 무질러버렸다. 쌓이고쌓인 불만이 일시에 터져나온것이다. 선장이는 탄복을 한 나머지 김봉구 발밑에 가 엎드려 절이라도 한번 하고싶은 충동까지 받았다. 선장이 가슴속에 언제나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를 차지하고있던 위인 나뽈레옹을 슬쩍 밀어내고 그 자리에 한낱 중학생 김봉구가 대신 들어섰다. 4학년의 키케로-김봉구가 선장이의 온 마음을 차지한것이다

<<이런 노복제조자가 계속 교장실 회전의자에 앉아서 우리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것을 우리는 그대로 참구 보고있어야만 합니까?>>

김봉구의 호소는 노도와 같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못 참는다!>>

<<더는 참을수 없다!>>

<<강규황이를 몰아내라!>>

<<노예제조자를 이리 끌어내라!>>

<<민족반역자를 타도하자!>>

<<강규황이를 생매장해라!>>

분노의 웨침이 교정이 울려퍼지는중에 어느 놈의 기차고동같이 새된 목소리가

<<반대, 반대, 절대 반대!>> 하고 고함을 냅다 질렀다.

<<어느 놈이야?>>

<<도발자를 타도해라!>>

<<그 자식을 부저가락으로 집어내라!>>

<<강규황이의 졸개들부터 솎아내자!>>

분격이 물끓듯하였다.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이것을 본 김봉구가 높은데 서서 또 한번 두팔을 벌려 가라앚히는 형용을 하였다. 가라앉기를 기다려서 목청을 돋우어가지고 찬부를 물었다.

<<강규황씨가 교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찬성자들의 쳐든 팔이 빽빽한 숲을 이루었다.

<<좋습니다, 내려주십시오. -이번엔 바라지 않는 사람... 손을 들어주십시오.>>

한쪽에 몰켜섰는 네댓 녀석이 손들을 드는데 그중의 두 녀석은 도발적으로 팔을 한껏 쳐들고 그 나머지 두세 녀석은 어줍은 태도로 따라 들었다. 김봉구가 히쭉 웃고

<<700대5!>>

승리적으로 웨치니 학생들 틈에서 환호성이 폭발하였다. 한줌도 못되는 반대자들은 수레바퀴에 치인 버마재비꼴이 되였다. 이어 구두호천으로 오륙명의 대표가 선출되였다. 김봉구를 위시한 대표들이 교장실에 들어가 담판을 하는 동안(교장도 체면이 있어서 경찰에다 전화를 걸지는 않았었다) 운동장에서 교가를 부르고 또 응원가를 불러서 기세를 올렸다. 멋지게 생긴 응원대장-3학년학생-의 지휘에 따라 700명이 일시에 절주있게

<<빅토리(VIXTORY) 빅토리 빅토리! 보이 아이 씨 티 오우알와이(VIXTORY)!>> 하고 웨치는소리가 학생들의 사기를 한껏 돋우었다(빅토리는 영어로서 승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교장실에서의 담판은 담벽에 부딪쳐 아무러한 진전도 없었다. 강교장은 노기가 등등하여 도끼눈을 뜨고 학생대표들을 하나하나 노려보며 악증을 내는것이였다.

<<꼭뒤의 피두 안 마른 녀석들이 되지 못하게... 하늘이 높은지 땅이 낮은지두 모르구... 출학처분이다, 출학처분! 실뱀 한마리가 온 바다를 흐리게 한더더니... 과시 옳은 말이다. 학원의 순결성을 보전하기 위해선 너희같이 스승두 몰라보는 불한당들은 한번 단단히 본때를 보여줘야 해. 출학처분 아니? 출학처분! 이 학교에서 쫓겨나면 평생 막벌이군노릇밖에 못해먹어.>>

교장실에서 물러나온 대표들에게서 이 전말을 전해 들은 학생들은 모두 부아통을 터뜨렸다. 단 기름가마에 물기 있는 생선을 들이뜨렸을 때처럼 짜그르르하였다. 대표들이 축대우에서 머리들을 한데 모으고 잠시 공론하더니 그중의 두엇이 곧 급한 걸음걸이로 돌층계를 내려와 사람 서넛을 불러데리고 부리나케 교정을 빠져나갔다. 김봉구가 다시 돌층계 맨 웃단에 나서서 두팔을 벌려 왁자지껄 야단스럽게 술렁거리는것을 가라앉히고나서

<<제군, 인젠 실력행사를 하는수 밖에 없습니다!>> 하고 선언하니 <<옳소!>> 소리가 수백명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튀여나왔다. 김동구의 부름에 따라 <<곰보>>와 <<백발귀>>를 선두로 굵직굵직한 운동선수 네댓이 출대우로 뛰여올라갔다. 일이 어떻게 벌어질는지를 모르는 선장이는 긴장하여 손에 땀을 쥐였다. 행동대가 중앙현관으로 돌입하였다. 두 감독선생이 마주 나오며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선생님하군 상관 없는 일이니 밀막지 마십시오.>>

<<곰보>>가 유도선생에게 말하고

<<괜히 이러지 마십시오. 700명이 다 쏟아져들어오면 그땐 어떡하시겠습니까?>>

<<백발귀>>가 체육선생에게 말하는 동안에 나머지 운동선수들은 김봉구의 지휘하에 복도에 올라섰다.

얼마만에 볼골 사납게도 강교장은 네패잡이에게 네다리를 들려서 나오는데 그래도 속은 살았다고 두다리를 자꾸 버둥거렸다. 박수갈채속에 강교장이 돌층계를 들려서 내려오니 마침맞게 조금전에 교정을 빠져나갔던 학생 네댓이 빈 인력거 한채를 끌며 밀며 쏜살로 달려들어왔다. 이때 교직원사무실 창문마다에는 이 광경을 각기 다른 심정으로 구경하는 선생들의 얼굴이 주렁주렁 열렸었다. 그리고 동서현관 모퉁이에는 사환들과 매점일군들이 몰켜서서 수군거리고있었다. 발버둥이치는 강교장을 세를 내온 인력거에 억지로 잡아실어가지고 또다시 엉싸엉싸 끌며 밀며 교문밖으로 나가는데 선장이도 뒤질세아 따라나섰다.

수백명의 학생이 인력거 한채를 전후좌우에서 옹위하고 거리를 휩쓸며 나가는데 길가던 행인들은 물론이요, 량편 길녘 상가들에서도 다들 눈이 휘둥그래져가지고 내다보았다. 질서없는 왁자그르한 대렬은 고등상업학교앞을 지나고 창경원앞을 지나고 또 대학병원앞을 지나서 배오개네거리까지 왔다. 놀란 교통순사의 호르래기소리를 무시하고 동쪽으로 꺾어서 꼿꼿이 동대문을 향하고 밀려나갔다. 그 바람에 한때 전차길, 자동차길이 다 막히였다. 고등상업학교앞에서 대학병원 뒤문과 련못골 사이의 큰길로 나오면 종로 5정목이 직선이라 길이 훨씬 가깝건만은 망신살이 뻗친 강규황교장에게 길호사를 시키느라고 일부러 길을 에돈것이였다.

미구에 먼지가 덕지덕지한 홍인문, 속칭 동대문이 나섰다. 동대문을 끼고돌면 청량리로 나가는 큰길이 나서는데 거기서부터는 시외구역이므로 길이 아스팔트길이 아닐뿐더러 전차길도 복선이 아니고 단선이였다. 차량들의 통행이 현저히 뜸해진 대통로를 동으로 서너마장 더 나가면 오른편에 펑퍼짐한 구릉지대 같고 엄청난 분량의 쓰레기였다. 거기가 바로 서울장안의 쓰레기란 쓰레기는 다 실어다버리는 쓰레기처리장이였다. 서울시내의 분뇨는 다 왕십리로 실어내는 까닭에 서울사람들은 엉뎅이를 왕십리라고도한다.

<<왕십리 저리 좀 돌리지 못해? 이 자식아!>>

이렇게 말하는것이다. 동대문밖의 쓰레기처리장은 비록 왕십리처럼 그렇게 널리 사람들의 입으로 퍼져 전해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역시 아름답지 못한 곳으로 소문은 날만큼 났었다. 그러한 쓰레기처라장에다 서울교육계의 유지라는 강규황교장을 이른바 철 없는 아이들이 쓰레기취급을 하여 실어내다버렸으니 그 안면이 어찌될것인가!

쓰레기처리장에서 죽을상이 되여가지고 귀가를 한 강규황씨는 소문에 들으면 대문간에 들어서면서부터 대성통곡을 하여 집안이 온통 초상집 같았었다고 한다. 이튿날 강규황씨는 분해서 이를 갈면서도 하릴없이 사표를 내고 그리고 교육계에서 아주 물러나버렸다. 그후 출판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소문이 있기는 있었으나 진적한 소문인지 아닌지는 다들 잘 몰랐다.

강교장을 욕 보인 날 밤 김봉구가 경운동 그 하숙에서 곧바로 경찰성에 런행이 되였다. 이틀날 등교하여 이것을 알게 된 학생들은 또 한바탕 큰 란리를 꾸몄다. 그 덕에 김봉구는 쉬이 풀려날수있었고 또 출학처분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요시찰인으로 된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할것이다. 김봉구가 다시 학교에를 나왔을 때 전체 학생들은 그를 마치 개선장군과도 같이 열광적으로 환영을 하였다. 그가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두손을 높히 쳐들어 흔들어보일 때 선장이는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만 열세살이 아직 채 못된 선장이가 당세의 인물을 바로 눈앞에서 본것이다.

한 사나흘 지나서다. 곽복덕이가 선장이 귀에 입을 갖다대고 속삭였다.

<<키케로가... 공산당이란다.>>

<<공산당? 누가 그러던?>>

<<그렇게들 수군덕거리더라.>>

선장이가 한참 생각해보다가

<<어쨌든 인물은 난 인물이야.>> 하고 감복하는 어투로 말하니 곽복덕이도

<<그야.>> 하고 고개를 끄덕거려 수긍하였다.

추천 (2) 선물 (0명)
IP: ♡.208.♡.227
더좋은래일 (♡.208.♡.227) - 2023/10/23 23:28:41

저두 뒤이야기가 궁금해서 한편을 써서 올립니다 ㅋㅋ

산동신사 (♡.79.♡.155) - 2023/10/24 05:45:14

소설이 그때 당시전경을 너무 상세하게 묘사해줘서 실제로 보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읽으면서 많은걸 새로 알고 배우게 되는것 같습니다. 나무사는 사환같은 사람은 너무 생각밖인 인물입니다. 잘보고 갑니다.

로즈박 (♡.39.♡.172) - 2023/10/24 22:12:57

옛날에 우리 웃반 언니 이마가 좀 벗겨졋다고 별명이 뺑덕에미엿엇는데..ㅋㅋ
글이 아주 구수하고 재밋습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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