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1 격정시대 상-23

더좋은래일 | 2023.10.24 17:36:15 댓글: 2 조회: 301 추천: 4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11566


23

학기시험이 끝나면 끝나는 그 시각부터가 곧 방학이므로 학생승차할인권(반할인) 같은것은 미리미리 학교에서 단체로 수속을 해야 하였다. 넉달동안 객지살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학생들의 마음은 이때부터 벌써 들뜨기 시작하였다. 하숙의 식비도 미리미리 치러주고 또 고향에 갖고 갈 선물들도 미리미리 장만하고 손 모아두고 하였다. 7월 17일 오후부터 19일 밤중까지... 약 50시간동안에 경부선, 경의선, 경인선, 경원-함경선을 리용하여 서울안 중학생의 약 70퍼센트 가량이 13도에 방방곡곡으로 흩어져갔다. 그래서 그 길목인 서울역은 수를 헤아릴수없이 많은 학생들로 하여 마치 좁은 해협의 썰물떼 같은 장관을 이루군 하는것이였다.

학생들의 성적표는 추후에 우편으로 부쳐주는것이 관례이므로 시험친 결과는 다들 모르고 떠나게 되는데 개중에는 턱없이 자신만만하여 상투가 국수버섯 섰듯한 돈 끼호떼형도 있고 또 공연히 마음을 졸이며 미리부터 파김치가 되여가지고 시름없이 행장을 수습하는 하물레트형도 있었다. 서선장이는 국수버섯파도 아니고 또 파김치파도 아닌 제3파-무관심파 즉 될대로 되라는 파이므로 대체로 태평이였다.

선장이가 벌써부터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이 살같아서 학기시험도 건둥반둥하는것을 보고 박숙자는 무엇을 잃어버린 사람같이 가슴 한귀퉁이가 비여서 허전한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씨 무던하고 인정이 깊은 어멈은 선장이가 여러달 보지 못한 친부모, 친동기와 만나게 되는것을 제 일 같이 기뻐하였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좀 락심도 하였다.

<<도련님이 가시구 없으면 난 적적해 어떻거지요?>>

<<마흔날이야 마흔날... 눈 깜박할 사인데 뭘 그래.>>

<<그래두요.>>

<<래달 29일엔 꼭 돌아와. 꼭 돌아온다니까.>>

선장이는 어머니, 아버지, 누나, 쌍년이가 보고싶은 마음과 숙자아주먼와 어멈을 떼치기 어려운 마음이 사이에 끼여서 은근히 안팎곱사등이노릇을 하였다.

<<네 성적표는 어디다 부치기루 했냐?>>

숙자아주머니의 묻는 말을 선장이는 괴이쩍이

<<여기다 부치지 어다다 부쳐요.>>

대답하고 곧 그 묻는 말의 어취를 짐작하고

<<아이 념려 마세요, 내가 아주머니를 조금이라두 홀하게 여길리 있에요?>> 하고 위로하니 숙자아주머니는 말없이 선장이의 손목을 끌어당겨 앞에 가까이 세워놓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숙자아주머니는 선장이가 저의 성적표를 원산 본집으로 직접 부치라고 주소를 적어넣지 않았나 의심을 하였던것이다.

<<성적표가 오거든 내 보구 그날루 곧 부쳐주마. 그리구 만일 아저씨가 허락만 하신다면... 내가 성적표를 가지구 친정나들이겸 원산길을 한번 하겠다.>>

선장이가 들었다 보았다 하고 손벽을 치며

<<그럼 더욱 좋지요! 나랑 같이 명사십리 가 해수욕이나 실컷하십시다.>>하고 좋아하였다. 선장이는 숙자아주머니가 원산은 와놓은게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였다. 왜냐면 안해가 집에 없어주기만을 항시 바라는 연갑수가 그 안해를 가지 말라고 붙들리는 만무하였기때문에. 그리고 박숙자 자신도 그런것을 잘 알면서 남편이 자신을 가장 아껴주는듯한 환각을 조성하려는것에 불과하였으므로. 이젠 선장이도 그만한 눈치는 다 아는터였다. 아이들이란 남의 집 밥을 먹으면 자연 눈치가 빨라지게 마련이였다.

숙자아주머니는 선장이를 데리고 화신백화점에 가 여름에 입는 하얀 운동복 한벌과 까만색수영복 하나를 사주었다. 어멈은 선장이의 안팎옷들을 다 벗겨다 빨고 풀먹이고 다려다 입히면서

<<아주 새신랑 같으시네요.>> 하고 그러잖아도 가는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선장이가 밤에 자기전에 수영복을 꺼내서 한번 입어보았다. 손바닥마한 거울에다 이리 비춰보고 저리 비춰보고 하느라고... 꼬리에 리봉을 달아놓은 강아지모양 자꾸 뱅글뱅글 돌았다. 선자이가 난 뒤 처음 수영복이라는것을 몸에 걸쳐본것이다. 송도원이나 명사십리에서 일본사람들, 서양사람들이 수영복을 입고 헤염치고 모래찜질하는것을 보기는 숱하게 보았어도... 저하고는 인연이 멀던 수영복을 열네살 되는 해 여름에 선장이가 처음 방안에서 정가표가 대롱대롱 매달린채로 입어본것이다.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선장이는 같은또래들과 함께 조금도 부끄러운줄 모르고 알몸으로 자지를 드러내놓고 헤염치고 자맥질하고 하였었다. 그렇게 하는것을 당연한 일로 알아왔었다. 선장이는 전등불밑에서 수영복을 입고 대견하여 입이 벌어졌다. 방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미껠란젤로의 <<다위드의 대리석상>> 같은 포즈를 취하였다. 그 멋들어진 포즈를 사진을 찍어서 전람회에 내놓지 못하는것이 유감스러울 지경이였다.

17일 밤 9시, 어멈은 굳이 선장이의 바스케트를 빼앗아 들고 전차정류소까지 따라나왔다. 선장이가 바스케트를 받아들고 숙자아주머니를 따라 전차에 오르면서

<<그럼 잘 있수.>>

인사하니

<<도련님 안녕히...>>

어멈은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며 손등으로 그 납작한 코를 눌렀다.

조명 휘황한 서울역은 가지각색의 트렁크, 들가망, 바스케트를 든 남녀학생들로 붐비는데 흡사 주가가 폭등한 취인소와도 같이 들썽들썽 활기를 띠였다. 그리고 발차시간이 가까와서 개찰구들이 메게 밀려나가가지고 넒은 층층계를 쏟아져내려가는 인파는 마치 물고를 터놓은것과도 같았다. 선장이가 막 떠나려는 객차의 승강구에 서서(이때는 아직 승강구에 문이 없었다) 손을 내저으며

<<이젠 고만 들어가보세요 아주머니.>>하고 소리치니 숙자아주머니는 종시 우물가에 아이 보낸것 같아서

<<덤비지 말구 조심해.>> 하고 다시한번 당부하였다. 선장이가 짐짓 웃으면서

<<네버 마인트(념려 마세요).>>

영어로 안심을 시키니 숙자아주머니는 한번 히죽 웃고 다시 실심한 얼굴로 손을 내흔들었다. 기차가 떠났다. 배웅하는 사람들틈에 끼인 숙자아주머니의 호젓한 모습이 차차로 멀어갔다. 선장이는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하는것을 느꼈다. 붉고 푸른 신호등들이 이리저리 엇갈리는중에 야행렬차는 다음정거장-룡산역을 향하고 달렸다.

선장이는 차안이 혼잡하여 곽복덕이는 차치하는 여느 얼굴 아는 원산학생들과도 한자리에 앉지 못하였다. 전연 낯모를 큰 녀학새들과 3대1로 한좌석에 앉아가게 되여 선장이는 몸가짐이 여간만 어줍지가 않았다. 그러잖아도 선장이의 마음은 앞에서 어머니, 아버지, 누나, 쌍년이가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또 뒤에서는 어멈과 숙자아주머니가 고무줄처럼 잡아당기는 바람에 몸시 언짢은 판이였다. 통로 건너편 좌석에 앉은 양복차림의 새파랗게 젊은 일본사람 하나가 위생복 입은 렬차원에게 좌석에 앉은채로 기대여 잘수있는, 그조가 복잡한 기차베개를 세내는데 그 렬차원은 같은 일본사람이라고 해서 그런지 대단히 친절하게 기차베개를 갖다가 등받이에 걸어주고 또 사용하는 방법을 자상히 가르쳐줄뿐아니라 시중까지 아주 세심하게 들어주었다. 그 사용료가

<<30전입니다.>>하는 소리를 듣고 선장이는 불현듯 전에 누나가 온종일 자갈추기를 하고 품삯 45전-그나마 물건을 사려고 십일조를 떼는-전표로 받아가지고 오던 일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앞에 와 옆에 앉은 녀학생들이 저희끼리 도란도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있는데 개밥에 도토리인지, 꾸어다놓은 보리자루인지 혼자 멀거니 앉았기가 열적고 게면쩍어 선장이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하고 등받이에 등을 척 붙이고 또 팔걸이에 한팔을 턱 건 다음 지그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였다. 그러나 전후좌우에서 웃고 지껄이는 소리가 쉴새없이 귀속으로 흘러들어 잠은커녕 잠의 동고조팔촌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자는체하고있으려니까 한동안 지나서 세 녀학생은

<<우리 심심한데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나`나 한번 어울려보까?>>

<<아니 그보다두 마스네의 `엘레지`가 더 낫잖아?>>

<<그래 그래 `엘레지`.>>

<<좋아 그럼.>>

<<허밍으로 할가?>>

<<허밍... 좋겠지.>>

이와 같이 소곤소곤하더니 이내 허밍 즉 입을 다물고 코로 노래를 부르는 창법으로 나직이 녀성중창을 하였다. 셋중의 하나는 유하면서도 둥근 말이 나는 알토이고 나머지 둘은 소프라노인데 그 목소리들이 흡사 이른봄에 하늘높이 날아오른 종다리들의 지저귀는 소리와도 같았다. 듣는 사람의 애를 끊는 그 애연한 노래소리에 선장이는 까닭 없는 회심이 들어 감고있는 눈속이 뜨거워졌다. 가사 없는 노래소리가 꺼지듯 사라지듯 끝이 났을 때 선장이는 눈을 감은채

(하늘이 굽어살펴 나를 이런 선녀들 틈에 갖다앉힌것을 공연히 맞갖잖아했구나.) 하고 한편으로는 뉘위치고 또 한편으로는 다행하게 여겼다. 선장이가 눈을 감은채 노래가 더 나와주기를 바랐으나 노래는 그것으로 그만 끝이 난 모양으로 또다시 소곤소곤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영식이만하지?>> 하는것은 맞은편 좌석 차창밑에 앉았는 소프라노였다.

<<응.>>

대답하는것은 선장이 바로 옆에 앉은 알토요,

<<영식이가 누구니?>>

몰라서 묻는것은 정면에 앉은 소프라노였다.

<<우리 동생이야.>>

<<몇살인데?>>

<<열네살.>>

<<이런 제기, 내가 화제에 오르는 모양 아닌가.>>

선장이가 난당하여 속으로 왼새끼를 꼬았다.

<<귀염성스럽게 생겼지?>>

<<쉬, 들을라!>>

<<들으면 어때?>>

<<숙녀의 에티케트(례의)... 몰라? 애두.>>

한동안 잠잠하다가 정면에 앉은 소프라노가 좌석에서 일어서는 기척이 있더니 이어 선반에서 무엇을 들어내리는듯 버스럭소리가 났다. 불시에 무엇이 와르르 쏟아지는 바람에 선장이가 놀라서 감았던 눈을 번쩍 떠보니-사과벼락... 난데없는 올사과벼락이였다. 정면의 소프라노가 바스케트를 들어내리다가 제대로 잠기지 않은 뚜껑이 펄떡 열리면서 그속의 올사과들이 앞을 다투어 지구의 인력에 호응을 한것이다. 소프라노는 부끄러워 얼굴이 금세로 홍당무가 되여가지고 어찌할바를 몰랐다. 선장이가 엉겁결에 벌떡 일어섰다가 얼른 다시 허리를 구푸리고 통로로 좌석밑으로 산지사방 굴러나는 올사과들을 부지런히 따라잡고 주어모으고 하였다.

<<이키 이게 웬 사과야.>>

<<원 이런!>>

<<예까지 굴러왔네!>>

<<거기두 있소 그 발밑에두.>>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소리와 낄낄거리는 소리를 귀로 들어가며 선장이는 주어모은 사과들을 도로 다 당황망조한 소프라노의 바스케트에 담아주고 제자리에 와 앉았다. 앉은 뒤에 둘러보니 전후좌우에서 구경하는 눈들이 모두 저의 몸과 가리마가 앞으로 보이도록 얼굴을 옷깃에 파묻은 사과임자-소프라노에게 쏠리였다.

그러나 렬차가 계속 달려 어느 자그마한 정거장 하나를 지났을 때 차안의 분위기는 어느새 상태를 회복하였다. 쟁을 친 바스케트임자가 그제야 살며시 고개를 들고 선장이를 쳐다보고 방그레 웃었다. 그리고 바스케트에서 그중 큰 올사과 한개를 골라쥐더니 곧 접칼을 꺼내 껍질을 벗기는데 돌려벗기는 껍질이 동강이 나지 않고 구불구불 그대로 드리웠다. 다 벗긴 다음에 두손가락으로 꼭지를 집어들어 대롱대롱하는 사과를 선장이앞에 내밀었다. 선장이는 주눅이 들어서 대번에 얼굴이 지지벌개졌다. 감히 받지도 못하고 또 감히 안 받지도 못하고 참으로 난처해 죽을 지경이였다. 옆에 앉은 알토가 웃으며

<<어서!>> 하고 받기를 조이고 또 비슥맞은편의 소프라노도 상글거리며 얼른 받으라고 손짓으로 격려하는 바람에 선장이는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두 소프라노와 한 알토는 접칼을 하나를 서로 돌려가며 사과들을 벗겨먹으면서 질의문답 쇰직하게 엇갈아가며 캐여물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장이의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묻고 또 집을 물은 다음에 차창밑에 앉은 소프라노가

<<형님 있소?>> 하고 물어서 선장이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그럼 동생은?>>

선장이가 또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그럼 누나는?>>

<<누난 있습니다.>>

<<나이 퍽 우요?>>

<<스무살이든지 스물한살이든지... 잊어먹었습니다.>>

고지식한 선장이의 열적어하는 모습을 보고 세 녀학생이 서로 돌아보며 한바탕 웃고난 뒤에 이번에는 알토가 물었다.

<<누나 시집갔소?>>

<<아니.>>

<<학교 다니오?>>

<<아니.>>

<<그럼 뭐 하오?>>

선장이가 대답을 안하고 두눈만 깜작깜작하는것을 보고 료량있는 알토가 넌지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서울서는... 하숙을 정했소?>>

<<아니.>>

<<그럼?...>>

<<아주머니집에 있습니다.>>

<<오 그래... 아주머닌 무얼 하오?>>

<<아무것도 안합니다.>>

<<그럼 아저씨는?>>

<<변호사.>>

<<변호사? 성함을 어떻게 쓰시는데?>>

<<연-갑-수.>>

세 녀학생이 서로 돌아보다가 쟁을 친 녀학생이 피끗 떠오른듯

<<오. 있어 있어... 생각나.>>

말하고 곧 선장이를 돌아보며

<<견지동... 그렇지?>>

면바로 짚어서 선장이는 맞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이때 손에 펀치를 든 일본인차장이 조선인 렬차원 두 사람을 거느리고 출입문안에 들어와 서서

<<승객 여러분, 이제부터 검찰을 시작하겠습니다. 승차권을 준비해주십시오.>>하고 알리며 곧 검찰을 시작해 3대1의 질의문답은 자연히 뒤전이 되였다. 검찰을 할 때에야 비로소 선장이는 알토와 비슥맞은편의 소프라노는 함흥까지 가고 그리고 쟁일 친 소프라노는 안변에서 하차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검찰이 다 끝나자 갑자기 차내의 조명들이 희미해졌다. 이젠 고만 지껄이고 잠들이나 자라는 뜻이다.

선장이는 고단해 어느 틈에 잠이 들었다. 처음에는 꼿꼿이 앉아 자다가 나중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웃몸이 실그러졌다. 알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로 곤히 자다가 기차가 어느 역에 섰다가 왈칵 떠나는 바람에 잠이 깨여 눈을 번쩍 떠보니

(아, 이런 실례가 또 어디 있을가!)

선장이가 깜짝 놀라 얼른 몸을 일으켜서 꼿꼿이 앉으며 죄송해 몸둘바를 몰라하니 알토는 누님다운 자애로 빙그레 웃으며 선장이의 목을 그러당겨 다시 제 어깨를 베워주었다.

<<어서 그냥 자요.>>

어둠을 뚫고 달리던 기관차가 힘차게 기적을 울렸다. 굴을 지나려나 철교를 건느려나. 아니면 어느 정거장의 신호등이 바라보이나.

석왕사를 오니 벌써 날이 환히 밝았다. 안변서 하차할 소프라노가 내릴 마음이 급하여 미리부터 행구를 주섬주섬 손모아놓고 또 머리를 쓰담듬는것을 보고 선장이는 까닭도 없이 아수함을 느꼈다. 저도 따라내리고싶은 야릇한 충동까지 느꼈다.

<<집에서 마중들 나왔겠지?>>

<<나왔을거야. 그럼 잘들 가.>>

<<편지할거 잊지 말아.>>

<<응 너희들두.>>

선장이가 얼른 일어나 승강구까지 짐을 들어다주니 안변소프라노는 홈에 내려서서 선장이를 쳐다보며 상냥하게

<<고마와요, 그럼 우리 또 만나요. 안녕.>>하고 상끗 웃었다. 그 녀학생은 간밤에 물어보아서 선장이의 이름을 알지마는 선장이는 그 녀학생의 이름을 알지 못했었다.

선장이가 좌석에를 돌아와본즉 마침 거기서는 안변역에서 막차에 오른 점잖게 생긴 서양인신부 하나가 제법 알아들을만한 조선말로 함흥소프라노에게 말을 묻는중이였다.

<<이 자리에 앉아두 좋습니까?>>

<<녜 좋습니다, 어서 앉으세요.>>

<<아 고맙습니다. 아가씨.>>

선장이가 서양신부하고 마주앉아 가게 되는것이 신가하여 눈알이 파란 얼굴과 목에 걸린 은십자가를 유심히 바라보니 신부가 눈치를 차리고

<<학생 어디 갑니까?>>

부드러운 바리톤으로 붙임성 좋게 말을 걸어왔다.

<<원산... 원산 갑니다.>>

<<오 그렇습니까. 원산... 이제 세 정거장.>>

신부가 손가락 셋을 내들어보이고 다시 그 손을 저의 가슴에 얹으면서

<<나는 덕원 갑니다.>> 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 붙임성 좋은데 끌리여 옆에 앉았던 알토가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스스럼없이

<<그럼 신부님은 독일분이 아니십니까?>> 하고 물으니 신부는 대번에 희색이 만면해지며

<<맞습니다 맞습니다... 더이최 더이최... 맞습니다.>>하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원산서 북으로 한 정거장 떨어진 덕원에 독일사람들이 세운 규모가 굉장히 큰 성당-천주당이 있는것을 다들 잘 아는터였다. 선장이는 속으로

(오, 독일말로는 독일이 더이최로구나.)

생각하고 독일말을 한마디 얻어배운데 적잖이 만족감을 느꼈다. 이윽고 신부는 두눈을 지그시 감고 기도를 하는지 명상을 하는지 조각상처럼 고요히 움직이지 않았다. 선장이는 그 엄숙한, 성스러워까지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지고 또 경건해지는것을 느꼇다.

원산이 시시각각 가까와왔다. 선장이는 두 함흥녀학생과 특히는 옆에 앉은 알토와 갈라질 일을 생각하니 난감하였다. 무작정 함흥까지 따라가고싶은 마음까지 났다. 그러나 막상 차가 원산역에 와닿아 미리 선번에서 내려놓았던 바스케트를 들고 일어서는데 두 녀학생이

<<그럼 잘가요.>>

<<우리 또 만나요.>>

다정하게 작별인사를 할 때는 선장이는 인사말 한마디도 변변히 못하고 우물쭈물 차를 내려버렸다. 목이 꽉 메여서 말이 나와주지를 않은것이다. 그러고보니 소년 서선장이는 다정다감한 사내꼬부랑이였었다. 선장이는 개찰구를 나서서야 어려운 고비를 넘어선것 같은 안도감에 숨이 후 나가며 어깨가 거뜬해졌다. 누가 등뒤에서 가방 같은것으로 넙적다리를 툭 건드려

<<너 어느 칸에 탔었니?>> 하고 물어서 선장이가 돌아보니 량손에 들가방과 바스케트를 하나씩 갈라들고 또 어깨에 멜가방까지 멘 곽복덕이의 잠이 부족한 얼굴이 바로 뒤에 있었다.

<<도부장사를 할라니! 웬 짐이 그리두 많으냐?>>

<<제기, 누가 아니! 짐이 많아서 싫단데두 자꾸 가져가라 가져가라... 성가셔 죽겠다.>>

<<누가?>>

<<누군 누구야, 우리 그 아저씨하구 아주머니지.>>

<<쩔쩔매지 말구 하나 이리 내라, 내 좀 들어다주마.>>

전에는 대단한 건물로 보이던 원산역이 선장이 눈에 별나게 납작한게 볼품이 없어보였다. 괴이스레 여기며 다시 역전광장둘레의 건물들을 둘러보니 역시 모두 납작납작한 무슨 궤짝 같은게 답답하고 초라해보였다.

<<야 저 집들이 왜 저렇게 모두 키가 줄어들었냐?>>

<<딴은 그렇구나.>>

<<이게 우리가 살던 그 원산 맞아?>>

곽복덕이가 한참만에

<<아마 우리가 서울서 그동안 우뚝우뚝한 층집들만 보다 와서 그런가보다.>> 하고 깔깔 웃으니 곽복덕이도 하하하 따라웃었다.

<<우리가 반지빠르게 눈들이 높아진 모양이다.>>

<<이러니 왜 서울놈들이 시굴놈을 깔보지 않겠니.>>

<<우리는 반지기다 반지기... 반지기 서울놈.>>

<<반지기 서울놈... 하하하!>>

<<하하하!...>>

난생처음 고향을 멀리하였다가 오래간만에 다시 그 고향땅을 밟아보는 두 소년은 술 한잔씩 마시기나 한것처럼 기분들이 들떴다. 도대체 고향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취하게 만들가.

선장이가 곽복덕이네 약방앞까지 무엇이 들었는지 보기보다 묵직한 하나를 들어다준 뒤에 혼자 덜렁덜렁 집을 찾아오다가 곱사등이네 구멍가게앞을 지나게 되였다. 앙증한 오또기같이 생긴 곱사등이가 키가 저만큼이나 큰 마당비를 들고 가게앞의 길을 쓰는것을 보고 선장이가 인사성으로 교모를 쓴채 고개를 한번 꾸뻑 하였더니 곱사등이는 비질을 멈추고

<<누군가?>>

선장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금장이 달린 고구라양복을 입고 흰 줄이 둘린 교모를 쓰고 또 반들반들한 편상화를 신고 그리고 손에다 신품의 바스케트를 든 서울학생이 뜻밖에 인사를 하는 바람에 곱사등이는 좀 어리둥절한 모양이였다.

<<나 선장이요. 선장이를 몰라보시우? 선장이.>>

<<선장이라니... 서서방네?...>>

<<인제 옳게 아셧소.>>

<<아니 네가 서서방 그 말썽쟁이란 말이냐? 어디 좀 다시 보자. 오 참말 틀림없는 그 녀석이루구나. 언제는 심술도 우리 집에다 죽은 뱀을 들이뜨리던 놈이 오늘은 모슨 바람이 물어서 격에 맞잖게 그렇게 쭉 빼구 돌아다니느냐, 될된 녀석 같으니라구.>>

곱사등이의 류별난 환영사를 등뒤에 들으며 선장이는 부지런히 걸어서 오매에도 그립던 자기 집앞에 와 섰다. 축축한 염분을 실은 무거우 바다바람이 흐뭇한 해초냄새를 풍기며 얼굴에 와 부딪쳤다. 이 얼마나 몸에 익고 또 몸에 밴 감촉이냐! 선장이가 유난히 작고 허술해보이는 게딱지같은 집의 괴괴히 지쳐있는 사립짝으르 살그머니 열었다. 어머니에게 깜짝이야를 하려고 살금살금 색시걸음을 걸어 마당안으로 들어왔다. 어디서 난 네눈박이강아지 한마리가 토방에 엎드렸다가 놀라서 뛰여 일어나며 그 주제에 또 집을 지킨답시고 같잖게 캥캥 짖어대며 자꾸 뒤걸음질을 쳤다. 어머니도 일을 나간 모양으로 집은 비여있었다. 선장이가 생각해보니 삼복지경-고등어절이기에 한창들 바쁜 때였다. 바다가주민들은 고양이손도 빌어쓸 계절이였다.

선장이가 저 없는 동안에 이 집 식구가 된것으로 짐작이 드는 강아지부터 우선 손아귀에 넣으려고 부지런히 바스케트뚜껑을 열고 먹다남은 과자부스레기를 꺼내였다. 집지킴체것을 하던 강아지란 놈은 대번에 짖는것을 걷어치우고 유심히 선장이의 손끝을 지켜보았다.

(대체 무얼가?)

연구를 하였다. 선장이가 과자맛을 보이고 누워서 떡먹기로 단 5분도 채 못 걸려 그놈을 고분고분 말 잘 듣게 졸개로 만들었다. 고놈이 재롱 부리는것을 들여다보고있을즈음에 바다쪽에서 목이 갈린것 같은 낮은 배고동소리가 들려왔다. 떠나는 배인가 들어오는 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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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39.♡.172) - 2023/10/24 22:10:14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이죠..
나도 고향갈때면 항상 설레고 그랫는데..ㅎㅎ
빨리 가고싶네요..

산동신사 (♡.173.♡.19) - 2023/10/25 09:01:58

학교다닐때 반년을 기다려야 방학에 집에 갈수 있었는데... 기차 17시간씩 타고 빨리 가고싶어서 좌석표도 없이 몇시간 그냔 서서 다닌지가 벌써 30년도 많이 지나갔네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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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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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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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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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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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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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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