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1 격정시대 상-24

더좋은래일 | 2023.10.25 09:30:41 댓글: 2 조회: 294 추천: 3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11662


24

쌍년이가 장을 보러 나왔다가 다래끼에 무슨 찬거리를 그들먹이 사 이고 치마바람이 나게 걸어오는 정실이와 마주쳤다.

<<언제 봐두 바쁘구나 넌.>>

<<손님들이 오셨으니까 점심을 해 내가야지... 어떻거니.>>

<<선장이 잘 있다던?>>

<<응 내 이따 가께... 괘찮겠니?>>

<<와라, 령감태기는 큰마나님 모시구 일본 큰댁에 다니러 갔다. 덕분에 나두 한 두어달 신역이 좀 편해지는 모양이다.>>

<<그럼 내 가께... 할 말이 많다.>>

<<기다리마.>>

석후에 느지막이 정실이가 놀러 와서 방안의 불은 꺼버리고 시원한 마루끝에들 걸터앉아 말을 주고받았다.

<<선장인 래달 중순께 방학을 한다구 편지 왔다.>>

<<그럼 이젠 한달두 못 남았구나.>>

<<응.>>

<<내 말은 없구?>>

<<왜 없어, 탕약에 감초지! 네 말이 빠지겠니. 문안을 드렸더라.>>

<<그러면 그렇겠지.>>

<<방학에 내려오면 너게부터 쫓아올게다.>>

<<한번 보자. 어떻게 변했나.>>

<<선희 오빠 혼사말이 있다더니... 어떻게 됐니?>>

<<탈났어.>>

<<탈이 나다께... 왜?>>

<<진흥상회 너 알지? 그 진흥상회 송회장네 막내딸하구 말이 있었는데...>>

<<그 집 막내딸이 혜경이지... 이쁘게 생겼더라. 그렇지만 좀 건방지잖아? 제가 젠척.>>

<<교육을 받았으니까 그렇겠지, 고등녀학교출신인데.>>

<<고등녀학교를 나오면 다 그렇게 저 잘난체해야 하니?>>

<<그 집 언니들은 다 안 그렇다더라.>>

<<그러게 말이지.>>

<<이번에 도련님의 일을 무사타첩이 되도록 힘을 써준게 바루 그 송회장이야. 송회장이 부(府 즉 시)의 무슨 의원이라서 그의 말이라면 경찰에서두 무시는 못한대. 그런데 그 송회장이 젊어서 댁 령감마님의 덕을 본 일이 있었다나봐. 그런데다가 한진사댁 장손을 사위로 삼을 욕심까지 겹쳐서 발벗구 나섰던거래.>>

<<그러게 내 뭐라던... 가재는 게편이라구... 부자집 자식은 경찰에서두 달리 취급한다구... 내 말하잖던. 송회장이 아무리 세력이 있어두 가난한 집 아들 같으면 빼내놓기가 어려웠을거야.>>

<<그야 물론 그렇겠지.>>

<<그런데 탈은 무슨 탈이 났단 말이냐?>>

<<글쎄 마님이 사람을 내세워 알아볼것 다 알아보구 또 운까지 떼구나서 송혜경이 말을 꺼내니까 도리머리를 흔들다러지 뭐냐.>>

<<도리머리를 누가 흔들어?>>

<<누구는 누구여, 도련님이지.>>

<<아니 왜?...>>

<<싫다는거지. 죽어두 싫단대. 그러니 탈 아니야.>>

<<그거 참 괴상하구나. 서루 대면들은 했을테지?>>

<<대면이 다 뭐야, 서루를 잘 아는 사이라는데.>>

<<그런데 왜 그럴가?>>

<<모르지, 더 속내야. 아무튼 그 말만 꺼내면 질색을 하니까 마님두 이젠 더 세우지는 못하셔.>>

<<그래 한진사는 간참 않구 가만있어?>>

<<왜 간참을 안하시겠니. 중간에 끼여서 마님만 죽어나서지.>>

<<흥 그러구보니 아닌게아니라 탈났구나.>>

<<천상배필인데 거참 까닭을 모르겠다구 다들 머리를 흔들지뭐냐.>>

<<아마 무슨 살이 끼였나보다. 살풀이나 한번 해보라지.>>

<<넌 못하는 소리가 다 없구나.>>

씩둑꺽둑 지껄이다보니 사금을 뿌린듯한 뭇별들이 은하수 한복판으로 흘러내리는 중천에 큰 귤쪽 같은 이지러진 달이 떠있었다.

<<그래 만주서는 무슨 소식이 없니?>>

<<소식은 있다. 그렇지만 네 눈으로 한번 좀 봐라. 방으루 들어가자.>>

쌍년이가 앞서 들어가 전등불을 켜놓고 곧 옷장서랍을 뒤져서 꺼내주는 편지를 받아들고 피봉을 보니 편지를 부친 곳은 중국 봉천으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인즉 세상에 짝이 없을 단마디 명창이였다.

<<무사하오. 변함없소. 기다리시오.>>

씨동이의 편지는 고대 로마의 명장 케사르의 보고문-<<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에 비길만한 명문장이였다. 그렇건만 바다가 생장의 천식한 두 녀자는 못내 부족해하고 또 아수해하는것이였다.

<<이거 전보 아니야?>> 하고 정실이가 어이없는 웃음을 웃으니 쌍년이는 애모쁘고 야속하여

<<글자가 많으면 우표를 더 붙여야 하는줄 아는 모양이지?>> 하고 비꼬아 말한 뒤

<<촌놈!>>하고 내뱉듯이 한마디 욕을 하였다.

<<그래두 편지가 왔으니 다행이다. 인젠 맘만은 졸이지 않아두 되잖니.>>

<<누가 아니... 거기라구 일본놈들이 없으란 법 있니.>>

<<외국이라며?>>

<<외국이라두 일본놈들은 속속들이 안 들어가 박힌데가 없다더라.>>

<<그놈들이 정말 불개미떼 같구나.>>

<<누가 아니라니.>>

이무렵 한진사댁 대청에서는 한정희모자가 단둘이서 받고차기로 수작을 하고있었다.

<<대관절 어디가 맘에 안 들어 싫다는거냐? 그 맘 안 드는데를 이 에미두 좀 들어서 알자꾸나. 그만한 규수가 지금 어디 흔하냐... 인물루 보나 학식으루 보나 지체루 보나...>>

<<누가 맘에 안 든다구 했습니까, 그저 맘이 쏠리지 않는다구 했지.>>

<<네 말대루 맘이 안 쏠린다구 하자. 안 쏠리면 그럼 안 쏠리는 무슨 까닭이 있을테지?>>

<<까닭은 무슨 까닭이예요. 그저 맘이 쏠리지 않는단 말이지요.>>

<<그럼 넌 대체 할아버지를 어떻게 아느냐?>>

<<어떻게 아다니요?>>

<<당초에 할아버지께서 말씀이 계시지 않았다면 내가 나서서 주선두 하지 않았을게다. 그러니 이번 일루 내 자의루 한 일이 아니란 말이다. 알겠느냐? 그런데 너는...>>

<<어머니, 혼인이란 일생의 대사가 아닙니까. 그런 대사를 어떻게 어른들의 생각 하나루만 정할수가 있습니까. 맘에 없는 혼인을 하는게 효도란 말씀입니까. 그런 혼인은 가정의 비극이예요. 불행밖에 더 가져올게 없단 말이예요. 어머니.>>

<<그렇지만 송회장이 이번에 발벗구 나서서 네 일에 힘을 써준것두 다 그때문이 아니냐. 이 일이 틀어지는 날이면 할아버지나 내가 다 무슨 낯으루 송회장을 대하겠니? 너 생각 좀 해봐라. 숱한 사람이 류치장에서 맞아서 병신이 되구 징역살이를 하구 하는 판에 무사히 풀려났다는게 이게 하늘같은 은혜가 아니구 뭐냐! 사람이면 은혜란걸 알아야지야. 그러구 또 그런 실업계를 주름잡는 실력가하구 인척관계를 맺어서 후에 해로울게 있느냐. 혹여 색시 어디 흠이나 있다면 또 모르까... 자색이 아름답기루 소문이 나서 지금 원산안 대가들에선 그 색시를 며느리 삼아보려구 다들...>>

<<이젠 고만하세요 어머니. 잘 알았에요.>>

<<잘 알았다니... 맘을 돌렸단 말이냐?>>

<<누가 그 말이예요?>>

<<그럼 무슨 말이냐!>>

<<글쎄 이 일만큼은 죽어두 순종을 할수가 없으니... 그리들 아시란 말씀이예요. 벌써 몇번 말씀드렸습니까.>>

<<그예 이 에미가 속이 타 죽는걸 보구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아이구 참 어머니두.>>

<<너 같은 녀석은 눈앞에 보구두 싶지 않다, 썩 물러가거라.>>

<<어머니, 화부터 내지 마시구 제 말씀을 좀 들어주세요. 전 벌써 맘속 정해놓은 녀자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또 얻습니까? 색시를 둘씩 얻는단 법은 없지 않습니까.>>

<<아니 벌써 정해놓은 녀자가 있어, 그게 대체 누구냐?>>

<<차차 아시게 될겝니다.>>

<<차차 언제, 이 에미가 성말라죽는걸 보구싶으냐? 어서 말해라, 들어보자.>>

<<차차 말씀드리지요.>>

<<지금 당장 말을 하란데두!>>

<<그렇다면 좋습니다.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디 사는 누구냐?>>

<<정실입니다.>>

<<정실이... 라니?>>

<<아 우리 집에 있는 정실이를 모르세요?>>

<<무엇이 어째, 우리 집에 있는 정실이?>>

<<녜 그렇습니다.>>

<<아니 너 정신이 나가잖았니? 한진사댁 장손이 심부름하는 계집아이를? 그게 될번이나 한 소리냐?>>

<<사람은 다같거든요. 다 마찬가지란 말이예요.>>

<<지체두 생각 않구... 남 부끄러운줄도 모르구... 할압지가 아시는 날이면 생야단을 만날것두 모르느냐?>>

<<할아버지가 그렇게 몰리해한분이라구 전 생각지 않습니다.>>

<<그 기집애를 여적 숫보기루만 알았더니... 세상에 요망스런 불여우구나.>>

<<걔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직 아무것두 모르구있는데.>>

<<두둔 말아! 그 구미여우가 꼬리를 안 쳤으면 이런 망측스런일이 생겼을리 있냐?>>

<<애매한 사람을 의심하면 죄를 받습니다. 어머니두 그만한 딸자식을 두시잖았습니까? 선희를요.>>

<<듣기 싫다! 썩 물러가란데두.>>

화가 꼭뒤까지 치민 마님이 밤새껏 가지가지 궁리를 다한 끝에 마침내 한 꾀를 생각해냈다. 이튿날 아침때가 지난 뒤에 정실이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여태까지 례사 심부름하는 계집아이로만 알고 심상히 보아온 정실이의 용모를 다시 살펴보고 속으로 적이 놀랐다. 들에 핀 찔레꽃같이 고우면서도 싱싱한, 화장이라는것을 통 모르고 사는 얼굴에서 흑산호 같은 두눈이 야생적으로 반짝반짝하였기때문이다. 마님은 속으로

(이런것이 내 아들의 마음을 끌지 않았다면 도리여 괴상하지. 내가 왜 진작 그 눈치를 채지 못했을가!)

이와 같이 차탄을 마지않았다. 그러나 마님의 눈에 한낱 배군의 딸 정실이는 구경은 갈데없는 상것이였다. 백로는 까마귀와 짝을 짓지 못하는 법이였다. 마님은 미리 써서 봉을 단단히 한 편지한통을 정실이에게 건네주며

<<네 이 편지 이모님댁에 좀 갖다 전해라. 알지. 동양양주소?>> 하고 말을 일렀다.

<<녜.>>

<<그러구 가거든 이모님 하라는대루만 해, 알았느냐?>>

<<녜.>>

<<사랑엔 들리지를 말구 곧장 가거라.>>

<<녜 알았에요.>>

영문 모르는 정실이가 마님이 시키는대로 봉을 단단히 한 편지를 받아들고 지체없이 중문을 나서고 또 바쁜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마님의 녀동생 즉 한정희의 이모의 남편이 경영하는 동양양주소에는 늘 심부름을 다녀보아서 잘 아는터였다.

정실이를 보내놓고 한식경쯤 지나서 마님은 다시 동자치를 불러다가 분부하였다.

<<자네 조용히 정실이의 옷가지, 이부자리 다 꾸려서 동양양주소 이모님댁에 좀 이여다주구 오게.>>

<<녜?>>

동자치가 어리둥절해하는것을 보고 마님은 다시 분부하였다.

<<녜는 무슨 녜야? 얼른 이여다주구 오라는데!>>

<<녜녜, 알았습니다 마님.>>

<<도련님이나 누구한테 눈치채지 않게 해... 괜시리.>>

<<녜 념려 맙시오, 마님.>>

이날 낮에 한정희가 왜관에 볼일이 있어 올라갔다가 다저녁때 돌아왔는데 여느때없이 사랑에 저녁상을 내온것이 정실이가 아니고 동자치였다. 한정희는 속으로 아마 어디 심부름을 보내서 집에 없겠거니쯤 심상히 지내보내였다. 그런데 이튿날아침에 조반상을 내온것을 보니 또 그 동자치였다. 한정희가 적이 괴이스레 여기기는 하면서도 수양있는 사람이라 평소의 안상한 태도를 변하지 않고

<<정실인 어디... 갔소?>> 하고 상가럽게 물어보았다. 그러잖아도 조마조마해하던 동자치가 서뜻 대답을 못하고 우물우물하는거슬 보고 하정희는 비로소 딴 의심이 들어서 동자치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왜 무슨 일이 있었소?>> 하고 다우쳐물었다.

<<녜 저...>>

<<저 뭐?>>

<<저...>>

동자치는 홀지에 울상을 지으며 허리를 한번 굽실하고

<<지가 말씀드린걸 마님께서 아시면...>> 하다가 뒤말을 삼켜버리고 한정희 얼굴만 쳐바보았다.

<<괜찮소. 맘놓구 말하우, 뒤일은 다 내가 감당할테니.>>

<<저 어제 아침후에 마님께서 편지를 주어서 이모님댁으루 보냈에요. 옷가지랑 이부자리랑은 나중에 지가 다 이여다주구 온걸입쇼.>>

<<이젠 잘 알았소. 안에 들어가거든 아무 소리 말구 가만있수.>>

<<녜.>>

<<정실이네 집에선 이 일을 아직 모를테지?>>

<<그러면입쇼.>>

한정희가 아침을 먹는지 마는지 하고 상을 물린 뒤에 부지런히 외출복을 갈아입고 집을 나와 급한 걸음으로 동양양주소를 향하고 올라오다가 자동차부앞을 지나게 되였다. 몇걸음 그대로 지나쳤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되돌아와 택시 한대를 잡아탔다

<<어디루 모실갑쇼?>>

운전사의 묻는 말을

<<동양양주소.>>

한정희가 대답하니

<<녜?>> 하고 운전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자동차부에서 동양양주소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만한 거리라기보다는 엎어지면 턱이 닿을만한 거리였다. 한정희가 깨닫고 곧 다시

<<아니 거기 가 사람을 하나 태워가지구 갈라구.>> 하고 설명을 하니

<<아 녜.>>하고 운전사는 곧 차에다 발동을 걸었다. 한정희가 속으로 얼뜬 운전사를 미처 비웃기도전에 차는 벌써 동양양주소 대문앞에 와 멎어서서 털털거리며 같잖게 고무방울이 달린 클랙슨까지 울렸다. 모주냄새가 풍기는 대문으로 들어가 오른손편에 난 일각문 하나를 들어서면 거기가 곧 양주소 경영주의 살림집이였다. 한정희가 마당에 들어서니 마침 찾으러 온 정실이가 소통앞에서 빨래를 하고있었다.

<<정실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정실이가 얼굴을 들어보고 놀라서 얼른 일어나며 행주치마에 물묻은 손을 닦았다. 두쌍의 눈이 마주쳤다. 이모가 방안에서 내다보고 질겁하여 마루로 쫓아나오며

<<아이고 너 웬 일이냐, 어서 올라오너라.>> 하고 수선을 부렸다.

<<아 올라가지 않겠습니다.>>

<<어서 신발 벗구 올라와.>>

<<아니, 싫습니다.>>

<<싫기는.>>

이모가 발에다 고무신을 꿰고 뜰아래로 내려섰다.

<<정실이를 데리러 왔에요.>>

한정희는 제 말 한마디에 이모가 오금 저려 꿀꺽소리도 못하는것을 보고 곧 어리둥절해 서있는 정실이를 향하여

<<얼른 들어가 짐을 챙겨가지구 나와, 밖에 차가 와 기다리구있어.>>하고 말을 일렀다. 큰일 난줄 아는 이모가

<<이 애 정희야!>>하는것을 들은척 않고 한정희는

<<무얼 하구있어? 서두르지 못하구!>>

정실이부터 재촉한 뒤 다시 이모를 돌아보고

<<아주 즈의 집에 데려다주려구요.>>

비로소 찾아온 뜻을 분명히 말하였다. 정실이가 그물에서 빠져나온 고기 같은 마음으로 일변 행주치마를 벗으며 일변 저의 쓰는 뜰아래방으로 뛰여들어갔다. 이불보따리, 옷보따리를 부랴부랴 챙겨서 한아름 안고 나오니 한정희는 한옆으로 비켜서며

<<앞서.>>하고 나갈 길을 틔워주었다. 그런 연후에 소매를 붙잡는 이모를 가볍게 밀어내며

<<이모님은 잘 모르시는 일이니... 그저 잠자쿠 계세요.>>하고 안심을 시켰다. 이모는 떨려나오는 목소리로

<<그렇지만 이 애.>> 하고 하소연하는 눈으로 생질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한정희는 가래지 않고 얼른 발기를 돌려 앞서 나가는 정실이의 뒤를 따랐다.

먼저 보따리를 올려놓고 그다음에 정실이를 태우고 그리고 마감으로 한정희가 올라탔다. 한정희가 자리잡아 앉은 뒤에

<<사대루 갑시다.>>하고 행선을 지시하니 운전사는 자기가 말을 빗들은줄 알고

<<어디루 가잡시오?>> 하고 재쳐 물었다.

<<사대.>>

<<사대. 녜 알았습니다.>>

운전사가 사대를 향하여 차를 달리기느 하면서도 속으로는

(세상에 별사람 다 보겠네. 이 넓은 세상에 어디 갈데가 없어서... 목 잘리워 죽은 원혼들이 득실글거리는... 사형장엘 간담. 택시를 타구 정사를 하러 가나?)

이와 같이 비웃었다.

정실이가 한진사댁에 안잠을 자러 오기전에 시내가 공사장에가 십장녀석에게 떼운 전표를 찾아줄 때 한정희는 처음으로 진짜 녀성미를 정실이의 꾸밈없는 얼굴과 몸가짐에서 보아내고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그때부터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인 한정희의 온 마음을 차지한 녀성은 다름아닌 그 막벌이판에서 험한 로동을 하는 배군의 딸 서정실이였다. 그렇건만 한정희는 아직까지 한번도 정실이에게 그런 내심을 토로한적이 없었다. 어쩐지 그렇게 하면 그녀를 모독하는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제 가슴속에 숨긴 사랑을 드러내보이는것은 경박한 인간들의 하는짓 같기도 해서였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얼기설기한중에 거세찬 정치풍파까지 겹쳐 시간이 천추되여오다가 객관에 의하여 생각지 않은 오늘 이 고조가 들이닥치게 된것이였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좋게 보고 또 탐을 내는 송회장의 막내딸 혜경이는 한정희도 전부터 접촉해보아 잘 아는터였다. 그 녀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자각하고 도 백방으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해보이려고 애를 쓰는 녀자였다. 그와는 달리 서정시리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전연 자각 못하고있었다. 따라서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제게 유리하게 리용해야 한다는것도 통 모르고있었다. 송혜경이를 유리기명에 담아 식탁우에 올려놓은 사과에 비한다면 서정실이는 가을해볕을 담뿍 받으며 가지끝에 그대로 달려있는 사과 같은 녀자였다. 송혜경이는 손톱의 물이나 튀길, 타고난 아가씨이고 또 타고난 장래의 아씨마님이였다. 그러나 서정실이는 진일 마른일못하는 일이없는 평민의 딸이였다. 생활의 어려운 고비를 남편과 같이 군말없이 뚫고 나갈 조력군이였다. 한정희 생각에 자신이 혹시 불행하게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면 송혜경이는 단 3년을 조신하게 기다리기 어려워할 녀자인 반면에 서정실이는 끄떡없이 10년을 기다려줄 녀자라고 생각이 들었었다. 한정희의 마음속에 어깨저울에서 송혜경이를 올려놓은 팔은 가볍게 우로 들리고서 정실이를 올려놓은쪽 팔은 묵직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래서 한정희는 꼭 정실이를 안해로 삼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사대 다 왔는뎁쇼.>>

운전사의 일깨우는 소리를 듣고 한정희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와서

<<아 그럼 스톱. 그러구 여기서 그대루 좀 기다려주시오, 오래 걸리진 않을테니까.>>

말한 다음 곧 정실이를 돌아보고

<<잠간 내리지... 짐은 그대루 놔두구.>>

말하고 자신이 먼저 차문을 열고 길우에 내려섰다.

한쌍의 남녀가 하나는 앞서고 하나는 뒤서서 아름드리 로송들이 충충한 사대속으로 사라지는것을 바라보고 운전사는 고개를 비틀었다.

(원 별 나중엔... 그 좋은 송도원 명사십리 다 놔두고 이 우중충한 사형장으루 련애를 하러 와? 저것들이 정신이 돈전한가?)

날씨가 차차로 더워지는 하지머리이건만 땅콩밭 한뙈기를 사이두고 바다와 린접한 솔밭속은 바다바람 설레는 송도가 자못 처량하였다. 개미들이 줄을 지어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늙은 소나무밑에 한정희와 정실이가 걸음들을 멈추고 마주 대하고 섰다. 영문을 모르는 정실이는 불안과 황송함과 부끄러움이 뒤섞여 얼굴을 들지 못하고 발등만 내려다보고 섰는데 한정희는 또 한정희대로 애써 흥분을 눌러가며 차근차근 타이르듯 말을 하는것이였다.

<<어머니가 정실이를 본이의 의사두 물어보지 않구 당신 맘대루 이모댁에 보낸건 잘못된 처사야. 사람은 그릇이나 연장이 아니니까 아무나 빌려주구 또 빌어오구 할수는 없거든. 이담에 혹시 또 그런 경우에 부닥치게 되거든 싫다구 거절을 하라구. 인간의 존엄은 목숨보다 더 중한거야. 그러니 이번 일은 내가 어머니 대신 정실이에게 사과를 해.>>

정실이는 하늘같이 높이 아는 도련님의 입에서 나온 <<사과>>두 글자에 놀라서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공연히 발을 갈아디디고 숙인 머리를 더욱 깊이 숙였다. 한정희는 바로 눈앞에 정실이의 가리마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좀 이따 내 저 자동차루 집까지 데려다줄테니 우리 집엔 다시 발을 들여놓지 말라구. 인격적을도 대해주지 않는걸 알면서두 또 발을 들여놓는건 수치스러운 일이야.>>

한정희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눈 딱 감고 아무때고 한번은 꼭 하려던 말-꼭 해야 할 말-을 단숨에 털어놓았다.

<<나는 정실이를 좋아해.>>

정실이가 숙인 고개를 한편으로 돌려서 외면을 하였다.

<<그래서 정실이네 집에다 중매군을 보낼 작정이야.>>

정실이가 고개를 숙인채 반몸을 비틀어서 가리마는 보이지 않고 빨개진 한쪽 귀바퀴가 보였다.

<<그러니까 되구 안되는건 정실이 맘에 달렸지. 그리구 우리 집에서 만일에 어른들이 허락을 안하신다면... 난 집을 버리구 전처럼 또 따로 나와 살 작정이야. 그건 며느리의 자격으루 들어서는거지 다른 무슨 자격으로 들어서는게 아닐거야.>>

정실이는 말 한마디 없이 숨을 죽이고 듣고만 있고 또 한정희는 무슨 꼭 대담을 해야 할 말을 묻지도 않은 까닭에 우중충안 사형장 소나무밑에서의 고백은 남자의 독백으로 시종되였다.

<<그러구 이 돈을 이달 공전이니까 받아줘요. 당당히 받을 돈이지만 치사스레 우리 짐으루 받으러 올건 없이. 자 넣어두어요.>>

싫다고 뿌리치는 손을 억지로 붙들어서 손아귀에 지전 한장을 밀어넣어준 뒤

<<그럼 우리 고만 나가지.>> 하고 한정희는 정실이를 재촉하여 앞세우고 솔밭을 나왔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극히 순결하고 극히 고상하면서도 좀 싱거운 데이트는 택시를 기다리라고 숲앞에 세워놓고 불과 15분 동안에 이렇게 끝이 나버렸다. 이 사대는 예전에 지방관아의 통인 하나가 성정이 혹독한 군수의 나이 젊은 소실하고 은근히 정을 통하다가 발각되여 사령들에게 끌려나와 목을 잘리운것으로 소문이 난 곳이였다. 그러므로 그런 래력을 잘 알고있는 운전사가 그들 둘 젊은 남녀를

(저것들이 혹시 그 통인의 귀신이 씌운게나 아닐가?) 하고 의심을 한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인젠 어디루 모실갑쇼?>>

<<저 아래장마당뒤 잔교께루 갑시다.>>

<<녜녜>>

정실이는 자동차를 타고 길우를 다리는것이 아니라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것만 같았다. 뭐가 뭔지 분간을 못할만큼 정신이 황홀하였다. 너무나 돌연적인 도련님의 고백에 귀가 잉 울리고 또 머리가 띵하였다. 그리고 가슴이 찡하는것도 같고 또 울렁거리는것과 같았다.

가난뱅이배군의 집앞에 택시가 와 서고 또 거기서 한진사댁 도련님과 정실이가 내리는것을 보고 이웃사람들은 불시에 들이닥친 도장관의 행차라도 구경을 하듯이 술렁술렁하였다. 한정희가 토방앞까지 들어와서 선장이 어머니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간 뒤에 정실이는 동네녀펴네들의 캐여묻는 말을 어물어물 대답해주고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따라들어와 옆에 붙어앉으며

<<대체 어떻게 된거냐?>>

속이 달아 묻는것을 정실이는 그저 간단히

<<고만두구 나왔에요.>>

<<아주?>>

<<녜.>>

<<왜?>>

<<이젠 손이 딸리잖아 사람이 더 필요 없대요.>>

<<아니 본래 들어갈 때는...>>

<<오 참... 옜수 돈... 마지막 월급이요.>>

<<아니 웬게 이렇게 많으냐? 이거 백냥(10원) 아니냐?>>

<<저녁에 아버지 약주나 좀 받아다드리시오. 그러구 또 돈이 다 녹아없어지기전에 엄마두 얼른 옷 한가지 장만하구요. 밤낮 그런 누데기만 걸치구 다니니까 남부끄럽소.>>

<<어째 지쳐보이누나. 좀 누우련?>>

어머니가 내려다주는 베개를 베고 정실이가 반듯이 누워서 눈을 뜨고 만물상처럼 얼룩이 진 천정을 쳐다보았다.

(이게 꿈이냐 생시야? 정녕 꿈을 꾸는건 아니겠지?)

<<이놈의 개, 부엌엔 또 왜 기여들어오니!>>

어머니의 개를 꾸짖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가 아니라 어느 아득한 딴 나라에서 들여오는것 같이 멀게 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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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101.♡.155) - 2023/10/25 11:02:58

드디여 핑크빛 사랑이 시작되나요?ㅋㅋ
근데 진짜 하필이면 사형장 소나무밑에서 사랑고백을 하시다니..한정희라는 분 사람 볼줄 아시네요..
두사람이야말로 천생연분같애요..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앗음 좋겟어요...
근데 어르신들이 쉽게 허락안해주실건데 살짝 걱정되네요..

산동신사 (♡.173.♡.19) - 2023/10/25 14:09:00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지금 엮여나가는 이야기를 보면 이제 시작인것 같습니다. 매일 올려주어서 그다음 내용이 궁금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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