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4-1

3학년2반 | 2022.03.04 06:59:26 댓글: 0 조회: 409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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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4 권


제 1 장 건곤일기대(乾坤一氣袋) 속의 장무기


장무기는 그 광경을 보며 어느 쪽이든 이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
다. 한쪽은 아버지 쪽이고 한쪽은 어머니 쪽이 아닌가! 그는 그
들이 죽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한 명씩 쓰러져 나갈 때마다 마음
이 찢어지는 듯 괴로왔다.

은이정이 상황을 살펴보고 입을 열었다.

"적은 예금(銳金), 홍수(洪水), 열화(烈火) 삼기(三旗)로구나.
청서야, 이쪽은 공동파가 맞서고 있고. 화산, 곤륜에서도 당도했
으니 우리도 가세하자."

그러면서 장검을 허공에다 휘두르자 검에서 윙! 윙! 예리한 바
람소리가 들렸다. 송청서가 즉시 입을 열었다.

"육숙님, 잠깐 저길 좀 보세요. 저쪽에도 많은 적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장무기는 슬쩍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니, 과연 싸움터 밖
수십 장 되는 거리에 사람들이 까맣게 깔려 있었다. 삼대(三隊)
의 인마가 질서 정연하게 배치돼 있었던 것이다. 일 열의 숫자는
적어도 백 명은 넘어 보였다.지금은 삼파와 삼기의 세력이 서로
균등하지만, 이 삼 열의 인마들은 시종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멸절사태와 은이정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은이정이 청
서에게 물었다.

"저 자들이 왜 꼼짝 않고 구경만 하고 있지?"

송청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옆에 있던 주아가 갑자기 그들의 대화에 끼어 소리쳤다.

"척하면 삼천리지, 그것도 모르세요?"

그 말에 송청서는 아무 대답도 않고 얼굴만 붉혔다.

은이정이 주아에게 다시 물었다.

"낭자의 가르침을 받고 싶소!"

"저 삼대인마(三隊人馬)는 천응교입니다. 천응교도 사실 명교의
지파(支派)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오행기(五行旗)와
뜻이 맞지 않아 서로 불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당신네들
이 오행기를 모두 처치하면 천응교에선 오히려 속으로 좋아할 거
예요. 그렇게 되면 은천정이 명교의 교주가 될 수 있을 터이니까
요."

모두는 그제서야 그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영문을 알게 됐다.

"낭자의 가르침, 정말 고맙소."

하고 은이정이 인사를 하자, 멸절사태는 그녀를 노려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금화파파의 무공이 심오하니 과연 그의 어린 제자마저도 대단
하군."

정현이 송청서에게 물었다.

"송소협, 포진(佈陣)이라면 누구도 소협을 따를 자가 없소. 우
리 모두 소협의 호령에 따를 것이니, 사양치 말고 어서 적을 퇴
치할 수 있는 분부를 내리세요!"

"육숙님, 이 조카가 어떻게 감히 명령을 합니까?"

멸절사태가 입을 열었다.

"지금같이 위급한 처지에 무슨 겉치레를 따지느냐. 어서 명령을
내리게!"

송청서는 지금 전체가 급박하다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곤륜파 예금기와 맞서 약간 우세를 보이고 있었고, 화산파는 홍
수기를 맞아 막상막하로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공동파는 점점
위험에 빠져들고 있었다. 열화기에 포위당한 체 처참하게 죽어가
고 있었다.

"세 방향으로 갈라져 공격합시다. 모두 예금기를 겨냥해 집중적
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사태님께선 동쪽으로, 육숙님은 서쪽, 그
리고 저와 정현사숙은 남쪽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그의 명령에 정현은 의구심이 생겨 물었다.

"곤륜파는 별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지만 공동파는 당장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지 않소!"

"네, 그렇습니다. 곤륜파에서 우세를 보이고 있을 때 우린 전력
을 다해 일시에 예금기를 섬멸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남은 열
화, 홍수 양기는 그만 기가 죽을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 공
동파를 도우러 갔다가는 일시에 그들의 위세를 꺾지 못하고 시간
을 끌게 되면, 천응교만 어부지리를 얻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
면 낭패가 아닙니까?"

정현은 그의 설명에 탄복을 했다.

"송소협의 말씀을 듣고 나니 그렇군요."

그들은 송청서의 명령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눠 쳐들어갔다.

주아는 장무기의 팔을 잡아 당기며 말했다.

"오빠, 우린 여기서 더 지체해 봤자 아무 이득도 없으니 그만
여길 떠나요."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송청서가 달려와 검으로 그녀를 가로막았다.

"낭자, 잠깐!"

"아니, 왜 저를 막는 겁니까?"

"아가씨의 내력이 의심스러워 그것을 알기 전엔 여길 떠나게 할
수 없소?"

주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내력이 이상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죠?"

멸절사태는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마교를 모두 죽이고 싶은 이
때, 송청서가 주아와 입씨름하고 있는 것을 보자 어느새 달려와
주아의 등, 허리, 다리 세 곳의 혈도를 찍었다. 그녀가 어찌 멸
절사태의 초수(招手)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그만 무
릎의 힘이 풀리면서 쓰러져 버렸다.

멸절사태는 장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오늘 이 사악한 무리들을 모두 섬멸시켜 버릴 것이다!"

그들은 각기 제자들을 거느리고 예금기를 향해 쳐들어갔다.

곤륜파의 하태충과 반숙한 부부는 예금기를 맞아 싸우면서 승리
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무당과 아미파에서 가세를 하자 성세
(聲勢)가 더욱 대성하였다.

멸절사태의 검법은 얼마나 예리한가! 명교의 제자들은 누구든
그의 삼 초식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녀의 훤칠한 몸집이 동서 할
것없이 사람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휘젓고 다녔다. 삽시간에 일
곱 명이나 그녀의 검에 목숨을 바쳤다.

예금기의 장기사 장정은 전세가 완전히 불리해지자 직접 낭아봉
을 쳐들고 달려가 멸절사태와 맞부딪쳤다. 둘은 눈깜짝할 사이에
십여 초를 주고 받았다. 멸절사태의 아미검법은 점점 예리해지면
그에게 쉴새없이 공격을 가했지만, 장정의 뛰어난 무공도 만만치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은이정, 정현, 송청서, 하태충, 반숙한, 그들도 모두 종횡무진
으로 검을 휘두르고 다녔다. 예금기에도 무예가 뛰어난 고수들이
많지만 그들이 어찌 무당, 아미, 곤륜 삼 파의 협공을 막아내겠
는가? 순식간에 살상자는 늘어만 갔다.

이때 펑! 펑! 펑! 하고 장정이 온 힘을 다해 낭아봉을 내리치
자, 멸절사태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장정은
그녀에게 숨돌릴 겨를도 주지 않고 다시 낭아봉을 내리쳤다. 위
세가 당당했다.

멸절사태는 잽싸게 몸을 피하는 동시에 검으로 순수추주(順水推
舟)의 초식을 그의 낭아봉을 겨냥해 밀쳐냈다. 그러나 장정은 명
교에서나 무림에서나 손꼽히는 고수였다. 그는 천부적으로 뚝심
이 강했고 내공이나 외공이 모두 상승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낭
아봉을 통해 상대의 내력을 느끼자 놀란 기합과 동시에 정면으로
검을 후려치자, 멸절사태의 검은 그만 세 동강으로 부러져 버렸
다. 멸절사태는 팔에 약간의 통증이 오는 것을 느꼈으나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잽싸게 팔을 뒤로 젖히며 의천검을 뽑아들었
다. 순간 그녀의 검에서 한기와 더불어 싸늘한 검빛이 번쩍이는
데 흡사 번개와 같았다. 멸절사태는 철쇄횡강(鐵鎖橫江)의 초식
으로 검을 휘두르며 밀고 나가자, 장정은 손에 쥔 낭아봉이 갑자
기 가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시가 울퉁불퉁 튀어나온 낭아봉
끝이 싹뚝 하고 잘려 나간 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목도 의천검에
의해 절단되었다.

예금기 부하들은 장기사 장정이 죽음을 당하게 되자 일제히 소
리를 질러 대며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들었다. 그 바람에 삼 파의
제자들이 몇 명 희생당하고 말았다.

홍수가 진중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우리의 장기사께서 순교(殉敎)를 했다! 우리 홍수기가 뒤를 받
을 테니 예금, 열화 양기는 후퇴하시오!"

그러자 열화기진의 깃발이 바뀌며 그 말대로 서쪽으로 퇴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금기에선 한 명도 물러서는 자가 없었다. 그
들은 더욱 맹렬하게 덤벼들고 있었다.

홍수기에서 다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홍수기 장기사의 명령이요! 전세가 불리하니 예금기도 일단 후
퇴하고 다음에 복수할 기회를 노립시다!"

이번엔 예금기에서 몇 명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홍수기에서 먼저 후퇴하시오! 그리고 훗날 꼭 우리 대신 복수
를 해주시오. 우리는 장기사처럼 목숨을 바쳐 싸우겠소!"

그러자 홍수기 진중의 깃발이 검은색으로 바뀌면서 누군가 벼락
같이 외쳤다.

"예금기 형제들, 걱정마시오! 우리 홍수기가 꼭 복수를 해드릴
테니!"

그러면서 그들도 서쪽으로 퇴각하는 것이었다.

"당기사, 고맙소."

하늘을 찌르는 듯이 예금기의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쳐댔다.

화산, 공동 두 파에서는 적들이 질서 정연하게 퇴각하면서 십여
명이 손에 금빛이 번쩍이는 둥그런 원통(圓筒)을 휘두르는 것을
보자, 도대체 무슨 병기인지 이상해 더 이상 그들을 뒤쫓지 않고
모두 방향을 바꿔 예금기를 향해 집중 공격해 갔다. 싸움은 이미
판가름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당파에서만 두 명이 왔을 뿐 나머지 네 파에선 모두 정예들만
뽑아 오지 않았는가! 그 반면에 예금기 쪽에서는 장기사가 이미
죽었으니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 하여 도저히 적수가 될 수 없
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의리를 지켜 죽음을 무릅쓰고
장기사의 뒤를 따라 순교할 결의가 되어 있었다.

은이정은 몇 명을 쓰러뜨리고 나자 사실 더 싸울 흥을 잃었다.

"마교의 무리들은 듣거라! 너희들은 지금 죽음밖에 남지 않았
다. 그러니 병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러자 예금기의 부장기사가 광소를 날렸다.

"하하핫.....! 너희 눈엔 명교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느냐? 우리
는 장사형께서 전사하셨는데 어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겠느
냐?"

은이정이 다시 소리쳤다.

"아미, 곤륜, 화산, 공동파 친구들은 마교 무리들이 항복을 하
게끔 뒤로 십보(十步)를 물러나시오!"

그 말에 모두 뒤로 물러났으나 멸절사태만이 검을 휘두르며 미
친 듯이 계속 죽이고 또 죽이고 있었다. 그녀는 마교에게 뼈속
깊이 한이 맺혀 있었다. 그의 의천검(倚天劍)이 부딪치는 곳이면
검이고 칼이고 성해 남지 못하고 모두 부러져 나갔다. 팔, 다리,
머리 할것없이 사방에 피를 뿌리며 떨어져 나갔다.

아미파 제자들은 스승이 혼자서 싸우고 있자 다시 앞으로 쳐들
어가 병기를 휘둘렀다. 이렇게 되니 아미파에서만 예금기와 싸우
게 된 것이다.

명교 예금기엔 아직도 육십여 명이 살아 버티고 있었고, 그 중
에는 무공이 뛰어난 이십여 명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부장
기사 오경초(吳勁草)의 지휘 아래 아미파 제자 삼십여 명과 이
대 일로 싸우며 버티었다. 사실 인원수로 보아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멸절사태의 의천검이 너무나도 예리했다. 그리고 그녀
의 검초 또한 얼마나 날카로운가! 그녀의 의천검 앞엔 그저 모조
리 쓰러지는 것뿐이었다. 예금기에서는 또 순식간에 칠, 팔 명이
나 되는 목숨을 일고 말았다.

장무기는 더 이상 처참한 꼴을 보고 싶지 앓아 주아에게 말했
다.

"이제 그만 떠나자."

그러면서 해혈수법으로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려 했으나, 웬일
인지 몇 번이고 그녀의 등과 허리를 주물렀는데도 주아는 다만
마비되는 느낌만 더 할 뿐 좀처럼 혈도가 풀리지를 않았다. 멸절
사태의 내력이 워낙 심후해서 가볍게 점혈(点穴)했는데도 혈도
깊숙이 찍혀, 쉽게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장무기는 장탄식을 하며 다시 고개를 돌려 싸움을 살펴보니 예
금기 부하들의 손에 들은 병기는 모두 부러져 있었고, 화산, 곤
륜, 공동파에게 사방으로 포위당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추호
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맨손으로도 아미 제자들과 맞서고
있었다.

멸절사태는 아무리 마교와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고 있다 해
도 일파의 장문으로서 병기를 잃고 적수공권으로 버티고 있는 적
들을 죽일 수 없었다. 멸절사태는 갑자기 날으는 듯이 적진을 휘
젓고 다니더니 어느새 오십여 명이나 되는 마교인들의 혈도를 모
두 봉(封)해 버렸다. 그러자 마교인들은 모두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뚝처럼 서 있게된 것이다. 그녀의 이런 상승 점혈수법에 모두
갈채를 보냈다.

이때 동쪽에서 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천응교의 삼
대인마(三隊人馬)가 동쪽, 남쪽, 북쪽 세 방향으로 나뉘어져 접
근해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십여 장쯤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왔다. 그러나 역시 구경만 하고 공격을 취하지 않았다.

주아가 갑자기 장무기에게 말했다.

"오빠, 만약 천응교의 손에 잡히는 날이면 큰일이예요. 우린 빨
리 여기를 떠나요."

장무기는 사실 자기도 모르게 천응교에게 친근감을 갖고 있었
다. 천응교는 바로 자기 어머니의 교파가 아닌가. 장무기는 어머
니가 비록 세상을 떠나 다시는 볼 수 없지만 언제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을 한 번 만나 뵐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는
천응교의 인마가 가까이 접근해 오자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을 보
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져 떠나고 싶지 않았다.

송청서는 멸절사태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선배님, 예금기를 빨리 처치하고 나서 다시 천응교를 상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환이 없게 됩니다."

멸절사태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동쪽 하늘에 해가 떠오르자 몽롱한 햇살이 멸절사태의 큰키를
비추어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그녀가 침묵을 지키며 우뚝 서
있는 자세는 왠지 처절하기도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감마저
들게 하였다. 그녀는 마교인들을 그렇게 쉽게 죽이고 싶지 않았
다. 그녀는 곧 싸늘하게 외쳤다.

"마교인들은 들어라! 누구든 살고 싶으면 무릎을 꿇고 빌어라.
그럼 살려줄 것이다."

그러나 예금기 부하들은 모두 광소를 터뜨릴 뿐이었다. 많은 사
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자 그 소리는 산야를 진동시켰다.

멸절사태는 울화가 치밀었다.

"무엇 때문에 웃느냐?"

오경초가 큰 소리로 대꾸했다.

"우린 모두 장기사를 따를 각오가 돼 있다. 어서 우리를 죽여
라!"

"흥, 좋다! 너희들이 죽기 일보 직전인데도 가증스럽게 영웅호
걸인 척하는구나. 그렇게 쉽게 너희들을 죽일 줄 아느냐!"

그는 장검을 휘둘러 야멸차게 오경초의 오른팔을 잘라 버렸다.
즉시 시뻘건 핏줄기가 뻗쳤다.

오경초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외쳤다.

"우리 명교는 하늘의 뜻에 따라 제세구민(濟世救民)하며 만인에
게 봉사하는 교파다! 죽음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 늙은
계집중아, 우리를 항복시킬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라!"

멸절사태는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다시 세 명의 팔을 잘라 버
리고 나서 살기띤 음성으로 다음 사람에게 다그쳤다.

"이래도 넌 살려달라고 빌지 않겠느냐?"

명교의 제자는 대뜸 욕설을 터뜨렸다.

"이 늙은 도적승아! 개소리 마라!"

어느새 정현이 앞으로 나서 그 자의 오른팔을 잘라 버렸다.

"사부님, 제자가 이놈들을 모두 처치하겠습니다."

그녀가 물어봐도 살려달라고 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정현사
태도 칼을 휘둘러 몇 명의 팔을 절단시켰으나 반항할 힘을 잃은
저들에게 더 이상 잔인한 수단을 전개할 수 없었다.

"사부님, 이놈들은 정말 고집이 대단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정현의 눈빛은 사부에게 용서해 주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멸절사태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다시 말했다.

"먼저 이놈들의 오른팔을 모조리 잘라 버려라! 그러고도 버티면
다시 왼팔을 잘라 버릴 것이다."

장무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새 몸을 날려 정
현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잠깐 멈추시오!"

그 바람에 정현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장무기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런 잔인무도한 짓을 하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소!"

아미파의 제자들은 그의 너무나 당당한 기세에 눌려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일순간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다른
문파의 제자들도 갑작스레 남루한 옷차림의 소년이 나타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곧이어 정현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나 죽이고 싶어하는 사악한 놈들을 처치하는데, 무엇이 잔
인무도하다는 거냐?"

"이 사람들은 모두 의리를 지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
로 봐 영웅호걸임에 분명한데, 어째서 사악한 무리들이라는 거
죠?"

"이놈들이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리들이 아니란 말이냐? 그래
네 눈으로 청익복왕 위일소가 나의 사제, 사매의 피를 빨아 죽인
것을 직접 보고도 요사가 아니란 말이냐? 그럼 뭣이 사악한 놈들
이냐?"

"그 청익복왕은 두 사람만 죽였지만 당신네들은 벌써 그 열 배
나 더 죽였습니다. 그리고 위일소가 이빨로 사람의 피를 빨아먹
어 죽이는 거나, 당신의 사부께서 의천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거
나 사람을 죽이는 건 마찬가지가 아니요?"

정현은 화를 벌컥 냈다.

"네 놈이 감히 내 사부님을 요사들과 같이비교하다니!"

팍! 하고 정현은 그의 얼굴을 향해 다짜고짜 일장을 뻗었다. 장
무기는 재빨리 피했으나 정현은 아미파에서 사문진전(師門眞傳)
을 전수받은 대제자가 아닌가!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
가 장무기의 얼굴을 향해 뻗은 일장은 사실 허식(虛飾)이었다.
장무기가 잽싸게 피하는 바로 그 순간 힘껏 장무기의 가슴을 걷
어찬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오히려
정현의 몸이 뒤로 수 장 밖이나 튕겨져 나뒹굴며 왼쪽 다리가 부
러졌다.

사실 장무기는 가슴을 차였지만, 상대방의 발이 가슴에 와 닿는
동시 체내의 구양신공이 자발적으로 저항력을 일으켜 그녀를 진
퇴(進退)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정현이 스스로 자신을 걷어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그녀는 장무기를 죽이려고 한 것
이 아니라 그저 오성(五成)의 내공만 발휘했기 때문에 다리만 부
러지고 내상은 입지 않았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장무기는 재빨리 뛰어가 그를 부축했다.

정현사태는 눈을 부라리며 다시 화를 버럭 냈다.

"비켜라!"

장무기는 아무 말도 않고 뒤로 물러섰다. 아미 제자들이 뛰어가
정현을 부축했다.

주위에 있는 군호들은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남루한
차림의 소년이 단 일격에 아미파의 고수인 정현사태를 격퇴시킨
일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멸절사태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소년의 신분은 도대체 뭐지? 며칠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이
소년이 이런 상승 무공을 지녔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
렇다면 이 소년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절정고수란 말인가? 나
자신도 정현을 반탄지력으로 저렇게 멀리 진퇴시키기 힘든
데.....'

멸절사태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 고집스러워졌다. 그녀는 물
론 장무기를 가벼운 상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
려운 존재로는 더욱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장무기의 아래위를
유심히 훑어보고 있었다.

장무기는 예금기 사람들의 상처를 돌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는 잘라진 팔에서 피가 흐르지 않게 혈도를 봉하고 붕대를 감
았다. 그의 수법은 매우 숙련돼 보였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물론 상처를 치료할 때 쓰는 점혈수법(点穴手法)
에 능통한 호수(好手)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모두 자기의 수법이
장무기의 수법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그
가 점혈한 부위는 거의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처를 치료받고 있는 오경초가 정중하게 말했다.

"소협의 의협심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소협의 존함을 알고 싶습
니다."

"소인은 증아우라고 합니다."

이때 갑자기 멸절사태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녀석아, 이리 가까이 와서 나의 검식(劍式)을 세 번 받아
보겠느냐?"

"사태님, 죄송하지만 지금은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게 더 급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장무기는 여전히 상처를 치료하며 마지막 한 명까지 붕대를 갈
아 주고 비로소 몸을 돌려 포권의 예를 올렸다.

"멸절사태님, 소인은 사태님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싸우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쌍방이 모두 원한을 씻어 버
리고 싸움을 멈추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가 말하는 쌍방은 사실 자기 부모나 다름없었다. 소위 명문정
파는 자기 아버지 쪽인 무당이고, 사마외도라 불리워지는 천응교
는 자기 어머니쪽이 아니던가!

"네까짓 놈이 감히 싸움을 멈추라 말라 하다니, 하핫! 네가 무
림지존이냐?"

"무림지존이 무슨 별것입니까?"

"만약 네가 도룡도를 갖고 있다고 해도 나의 의천검과 겨뤄 이
겨야만 무림지존이라 할 수 있다. 그 때 가서 명령을 내린다면
또 모를 일이지!"

하! 하! 핫! 하고 모두들 장무기를 비웃었다. 장무기도 물론 자
기의 나이나 신분으로 싸움을 말릴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두 자기를 조롱하듯 웃자 그만 화가 치밀었다.

"무엇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고 합니까? 이들은 모두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죽이면 이들의
식구들은 어떡합니까? 사태님께선 속세를 떠난 사람이니 자비심
을 베풀어 이 사람들을 살려보내 주십시오."

멸절사태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네놈이 심후한 내력(內力)을 믿고 여기서 큰 소리치는 모양인
데, 좋다. 네놈이 나의 삼장(三掌)받아낼 수 있다면 모두 살려보
내 주겠다!"

"소생은 귀파 제자의 일장도 감당해 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사
태님의 삼장을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겨뤄 볼 엄두조차 나지 않
습니다. 오직 바라옵건데, 자비심을 베풀어 이 사람들을 살려 주
십시오."

오경초가 큰 소리로 외쳤다.

"증상공, 이 늙은 도적승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
린 죽으면 죽었지 그의 거짓된 자비심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멸절사태는 장무기를 노려보며 물었다.

"너의 스승은 누구냐?"

장무기는 아버지나 의부한테 무공을 배운 적은 있지만 그들을
자기의 스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의 스승은 없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모두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장무기가 정
현사태를 진퇴시킨 것을 보고 필시 어느 고인의 제자라고 생각했
던 것이다.

사실 무림에서는 사도(師道)를 제일 존중한다. 가끔 자기의 스
승 이름을 밝히지 않는 피치 못할 경우도 있지만, 있는 스승을
없다고는 절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무기가 스승이 없다고 하
니, 그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라고 믿었다.

"자, 내 초식을 받아라!"

멸절사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가볍게 일장을 떨
쳐냈다.

장무기는 도저히 그의 장풍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
신을 바짝 차리고 두 손을 내밀어 정면으로 그의 장풍을 막았다.
그러나 자기를 향해 뻗쳐오던 멸절사태의 손이 갑자기 밑으로 미
끄러지며 마치 물고기처럼 장무기의 두 손 사이로 빠져나가 탁!
하고 가슴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장무기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의 체내의 구양진공
이 자연적으로 멸절사태의 장풍과 부딪치려는 찰나 갑자기 멸절
사태의 손이 밑으로 빠져나가자 어떻게 할 줄 몰라 멈칫거리는
순간, 쇠망치와 같은 엄청난 힘이 자기의 가슴을 후려친 것이다.
장무기는 벌렁 뒤로 나동그라지며 입에서 선혈을 토했다.

멸절사태도 장력을 자유자재로 뻗고 거두고 했던 것이다. 그녀
는 일단 상대의 내력을 유도해 내고 나서 그 빈틈을 타 다서 내
력을 뻗은 것이다. 실로 내가(內家) 무학 중에서도 제일 오묘한
수법이었다.

그의 그런 묘수에 모두는 갈채를 보냈다. 주아는 크게 놀라며
뛰어가 장무기를 부축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무릎이 마비되며 쓰
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장무기가 당하는 것을 보자 마음이 급해
뛰쳐나갔지만 아직 혈도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우 오빠.....!"

장무기는 가슴으로부터 뜨거운 피가 거꾸로 솟구쳐 오르는 느낌
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아를 향해 손을 휘젓휘젓 흔들었다.

"난 괜찮아.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그러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 남은 요인들의 오른팔을 모두 잘라 버려라!"

하는 멸절사태의 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는 다급하게 소리쳤
다.

"당신의 장풍을 세 번 받아내면 이 사람들을 모두 살려 주겠다
고 약속하지 않았소!? 아직 두 번 남았소이다!"

멸절사태는 일장을 뻗고 나서 예측한 대로 장무기의 내력이 심
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장무기가 절대로 이 요사들과
한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이 소년의 내력이 자기가
배운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그것은 실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멸절사태는 장무기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너하고 상관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아라. 넌 비록 나이가 어리
지만 옳고 그릇된 것은 분별해야 할 게 아니냐? 방금 전개한 일
장은 단지 삼성(三成)의 공력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느냐?"

장무기는 가가 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
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처음 일장에 삼 성의 공력을 사용했으니
두 번째는 그보다 더 웅후한 공력을 전개할 게 뻔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장무기가 아니었다. 예금기의 사람들이 제대로 반항도 못한 채
난도질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장무기는 이를 악물
었다.

"분수를 모르는 놈이라 비웃어도 좋으니, 다시..... 다시 사태
님의 장력을 받아 보겠습니다!"

다급해진 것을 오히려 오경초였다. 그는 황급히 소리쳤다.

"증상공! 우린 상공의 은덕에 깊이 감사를 하고 있소. 그 의협
심에 탄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러니 더 이상 무모한
행동을 하지 말아 주시오!"

한편, 멸절사태는 주아가 장무기 옆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눈에 거슬리는지 왼쪽 소매를 살짝 떨쳤다. 그 즉시 주아의 몸이
그의 소매에 말려 뒤쪽으로 날아갔다. 주지약이 얼른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 그녀의 몸을 받아 천천히 땅에 내려놓았다.

주지약이라는 것을 확인한 주아가 급해 소리쳤다.

"주 언니, 그가 무모한 짓을 못하게끔 말려 주세요. 언니가 만
류하면 틀림없이 들을 거예요!"

주지약은 멍해졌다.

"그가 왜 내 말을 듣는다는 거죠?"

"그는 마음 속으로 언니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예요. 언니는
그것을 모르고 있나요?""

주지약은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이때 멸절사태의 냉랭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네가 정녕 영웅호걸의 흉내를 내겠다면,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
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저승에 가서라도 날 원망하지 말아라!"

말을 내뱉기 무섭게 그녀의 오른손이 허공에 떨쳐졌다. 거기에
따라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일며 한 갈래의 무지막지한 힘줄기가
장무기의 가슴팍으로 향해 휘몰아쳐 갔다.

장무기는 이번에 감히 정면으로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옆으
로 미끄러지면서 그녀의 장풍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뜻대
로 될 리가 만무했다. 멸절사태의 오른팔이 곡선을 그리며 급회
전되더니 도저히 불가능한 각도에서 가로 뻗쳐왔다. 팍! 그녀의
장풍이 정확하게 장무기의 등줄기를 강타했다. 순간, 장무기의
몸뚱아리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허공을 붕 떠올라 급속도
로 땅에 떨어졌다. 모래밭에 묻히듯이 쓰러진 장무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멸절사태가 전개한 이 초식은 절묘하기 이를데 없어 주위에서
갈채가 터져나와야 마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무기의 협의지
심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 터라 그가 불행을 당하자 놀
란 외침을 토하거나 탄식을 할 뿐 좋다고 법석을 떠는 자는 없었
다.

가장 안타까와하는 것은 역시 주아였다.

"주 언니, 제발 부탁이예요. 지금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니 어
서 가서 보살펴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주지약은 가슴이 철렁했다. 더욱이 주아의 간곡
한 부탁을 듣자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많은 눈이 지켜보
는 가운데 다 큰 처녀가 한 젊은이의 상세를 보살펴 준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자기 스승님에 의해 젊은이가 부상을
당했으니, 달려나간다면 설령 사문에 대한 배반 행위가 아니라
해도 스승님에 대한 불경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하여,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내딛다가 다시 움츠렸다.

이 즈음, 날이 환하게 밝아와 눈부신 햇살이 사장(沙場)에 뿌려
졌다. 그 찬란한 햇살 아래 장무기가 쓰러져 있었다. 향 반 자루
가 타는 시간이 경과되자 장무기의 몸이 꿈지락거리더니 곧 안간
힘을 쓰며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팔로 몸을 버티는 순간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하며 다시 스러졌다. 그는 의식이 흐릿
했다.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그냥 누워 있고만 싶었다. 그러나
아직 일장을 더 받아내야 예금기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는 생
각만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버텨야만 했다. 그는
길에 숨을 들이키며 끝내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하지만 고주망태
가 된 것처럼 상체가 흐느적거리며 언제라도 다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그를 주시했
다. 주위엔 수백 명이 서 있었지만 바늘이 떨어져도 그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시간마저 정지된 듯한 이 조용한 순간에 장무기는 불현듯 구양
진경에 적혀 있는 몇 마디가 뇌리에 떠올랐다.

----- 강하면 강한 대로 내버려 둘지어다. 바람은 산을 훑고 지
나가느니라, 사나우면 사나운 대로 내버려 둘지어다. 달빛이 강
을 어루만지느니라. -----

골짜기에 있을 당시엔 이 몇 마디에 담긴 참뜻을 이해할 수 없
었다. 한데 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멸절사
태는 강하고 사나워 자기로선 도저히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런
데 구양진경에 수록된 그 참뜻은 상대가 제 아무리 강하고 사나
워도 산을 훑고 가는 바람과 강을 어루만지는 달빛으로 생각하라
는 것이다. 아무리 절대적인 힘이라 할지라도 단지 스쳐갈 뿐 파
괴를 하진 못할 것이다.

장무기는 경문의 다음 귀절을 떠올렸다.

-----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나는 한 모금의 진기로 대항할지어
다. -----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막힌 강둑이 터지듯 지혜의 물결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단정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경문에 수록
된 방법에 따라 운공조식(運功調息)하자, 단전으로 부터 훈훈한
기운이 용트림하며 삽시간에 사지백해로 번져 나갔다. 구양진경
의 진정한 위력이 비로소 그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피를
토할 정도로 심한 외상을 입었지만 내력과 진기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멸절사태는 그가 스스로 운공료상(運功療傷)하는 것을 보자 과
연 범상치 않은 소년이라 생각하며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가 처음 전개한 일장은 표설천운장의 한 초식이며, 두 번째로 전
개한 것은 절수구식(截手九式) 중에 제 삼식으로써, 모두 아미파
장법의 정예였다.

첫 번째 출수에는 삼 성의 공력밖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두 번째
는 공력을 칠 성으로 끌어올려 설령 장무기를 죽이지 못한다 해
도 전신의 뼈마디가 으스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믿었
다. 그런데 지금 버젓이 책상다리를 한 채 운공조식을 하고 있으
니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정민군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증가야! 나의 스승님의 세 번째 장력을 받을 자신이 없
으면 일찌감치 멀리 꺼져 버려라! 네가 거기 쪼그리고 앉아 평생
토록 운공조식을 한다면 우리도 평생토록 기다려야 한단 말이
냐?"

주지약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나직이 말했다.

"조금 더 쉬도록 내버려 둬도 상관 없잖아요?"

정민군은 대뜸 눈을 부라렸다.

"뭐라고? 네가 우리의 적을 감싸다니 혹시 저 녀석에게....."

그녀는 원래 모독적인 말을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해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주위 사
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
었다.

주지약은 부끄럽고 당황해져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한데, 그
녀는 변명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소매는 단지 본문과 사존의 위명을 생각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서 쓸데없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한 말씀 드린것 뿐이예
요."

정민군은 아연해졌다.

"쓸데없는 말이라니?"

주지약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분문의 무학은 이미 천하에 그 명성을 날리고 있어요. 게다가
스승님은 당세에서 으뜸을 다투는 선배고인이시니, 저런 젊은 후
배에게 출수하는 것조차 위신에 손상될 거예요. 단지 그가 워낙
건방지고 겁없이 날뛰는 바람에 윗어른으로서 훈계를 하려는 것
이지 정말 그의 목숨을 앗아가겠어요? 본문의 협의지도(俠義之
道)는 이미 백 년을 이어왔으며, 스승님의 너그러움 또한 모르는
자가 없어요. 저 젊은이는 한낱 촛불에 불과하니 어찌 일월(日
月)과 같으신 스승님과 비교가 되겠어요? 그가 설령 앞으로 백
년 동안 무공을 연마한다 해도 역시 우리 스승님의 적수가 되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운공조식을 조금 더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
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것
같았다. 멸절사태는 더욱이 기뻐했다. 이 작은 제자가 각파의 고
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본문을 널리 빛낸 것이라 생각했다.

체내에 진기가 유전(流轉)하자 장무기는 이내 정신이 맑아졌다.
그는 주지약의 말을 한 마디도 빠짐없이 귀담아 들을 수가 있었
다. 그녀가 자기를 위해 스승님으로 하여금 살수를 전개하지 못
하도록 미리 말로서 묶어놓은 것이다. 장무기는 내심 감격하며
곧 몸을 일으켰다.

"사태님, 소생은 끝내 군자를 흉내내야겠으니 마지막 남은 일장
을 마저 전개해 주시오."

멸절사태는 그가 짧은 시간 동안 운공조식을 하여 멀쩡하게 회
복되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녀석의 내력은 정말 불가사의하군. 대관절 어디서 저런 내
력을 쌓은 것일까?'

"넌 왜 나한테 공격을 하지 않느냐?"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소생의 이 쥐꼬리만한 무공으로는 사태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반격을 할 수 있겠습니까?"

멸절사태는 냉소를 날렸다.

"네 주재를 안다면 일찌감치 떠나야 할 게 아니냐? 내 손아귀에
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만, 오늘 만큼은 너의 그 젊은 패기를
높이 평가해 파격적으로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장무기는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는 정중하게 몸을 숙였다.

"호의에 우선 감사를 드립니다. 이 예금기의 사람들에게도 자비
를 베푸시는 겁니까?"

멸절사태의 축 늘어진 눈썹이 더욱 아래로 처졌다. 그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나의 법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선배님의 법명은 '멸'자, '절'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 됐다. 사악한 무리들을 멸절시키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멸절이란 법명을 벌써 바꾸었을 것
이다."

장무기는 더 이상 말해 보았자 시간 낭비임을 알았다.

"정녕 그러하시다면 어서 세 번째 장풍을 발출하십시오."

멸절사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
로선 여지껏 이렇게 완고한 젊은이를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마음
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녀지만 문득 연민의 정을 느꼈다.

'내가 세 번째 장풍을 격출하면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다. 보아
하니 사악한 무리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젊은 나이
에 이대로 죽는다면 너무 아까운 일이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세 번째 출수
는 장무기의 단전 요혈(要穴)을 노릴 작정이었다. 내력을 적당하
게 전개해 그의 단전을 격타하면 즉시 숨이 막혀 정신을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므로 마교 예금기의 무리들을
전부 처치한 후에 다시 정신이 들게 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왼쪽 소매를 떨치며 막 출수를 하려는데 홀연 이상한 외
침이 들려왔다.

"멸절사태, 잠깐만 손을 거두시오!"

이 음성은 흡사 뾰족한 바늘처럼 듣는이의 고막을 찔렀다. 꼬집
어 이유를 말할 수 없지만 모두들 꺼림직했다.

여럿의 시선이 집중돼 있는 가운데 서북쪽으로부터 흰 장삼을
입은 남자가 손에 쥘부채를 흔들며 느긋하게 걸어나왔다. 걸음을
내딛음에 있어 먼지 한 점 일지 않고 마치 구름에 달가듯 하였
다. 이 백의인의 옷깃 왼쪽에 날개를 활짝 편 작은 검은 독수리
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천응교의 지위가 높은 인물
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알고보니, 천응교도의 복장은
명교와 같이 흰 장삼이었다. 단지 명교도의 장삼에 붉은 불길이
수놓아져 있는데 반해 천응교는 한 마리의 검은 독수리가 수놓아
져 있었다.

백의인은 멸절사태와 삼 장의 간격을 두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운 채 공수의 예를 취했다.

"사태, 공연히 끼어들어 미안하오만 그 세 번째 장풍을 이 몸이
대신 받으면 어떻겠소?"

멸절사태는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그대는 대관절 누구요?"

백의인의 대답도 간단했다.

"성은 은(殷), 자는 야왕(野王)이라 하외다."

은야왕! 군호들은 이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이 강호
에 알려진 것은 이미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무림인들은 그의
무공이 부친인 백미응왕 은천정과 거의 비슷하다고들 말했다. 그
는 천응교 천마당의 당주로서 바로 교주 다음가는 권좌였다.

멸절사태는 날카롭게 그를 훑어보았다. 나이는 줄잡아 사십, 눈
에서 쏟아지는 정광만 보아도 내공이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멸절사태는 그를 감히 얕잡아볼 수 없었
다. 더군다나 그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터라 냉랭하게 물었다.

"이 녀석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대신 일장을 받겠다는
거요!"

장무기는 속으로 외쳤다.

'그는 나의 외삼촌이요! 외삼촌! 혹시 그가 날 알아본게 아닐
까!'

은야왕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말했다.

"난 그와 생면부지요. 그러나 그가 젊은 나이에 그 협의지심을
내세워 온갖 추잡한 짓을 자행하는 작자들과는 달리 진정한 장부
의 기개를 지녔기에 도와주려는 것뿐이오. 그리고 사태의 공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소."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실로 당돌하며 멸절사태를 안중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멸절사태는 별로 화를 내지 않고 장무기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몇 년 더 살고 싶으면 어서 떠나거
라!"

장무기의 태도는 너무나 단호했다.

"소생은 죽음 따위가 두려워 의리를 저버리진 않습니다!"

멸절사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나서 이번에는 은야왕에게
말했다.

"이 녀석은 아직 나에게 일장을 빚진 것이 있소. 우선 이 쪽 빚
을 청산하고 나서 귀하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소."

은야왕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멸절사태, 그렇게도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싶으면 이 소년을
죽여도 좋소. 그 대신 만약 이 소년이 죽으면 아미파의 사람도
모조리 이곳에 뼈를 묻히게 될 것이오!"

말을 끝낸 그는 즉시 표연히 뒤로 물러나 짤막하게 외쳤다.

"나와라!"

그의 외침을 신호로 하여 돌연 모래를 뚫고 무수한 사람머리가
솟아나왔다. 그들은 각자 방패 하나를 앞에다 세우고 시위에 화
살을 걸어 군호들을 겨냥했다. 천응교의 제자들은 모래 속에 땅
굴을 뚫어 벌써 군호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호들은 멸절사태와 장무기의 장풍 대결에 정신이 팔려 다른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송청서 등 조심성이 많은 사람들도 단
지 천응교도들의 기습에만 대비했을 뿐 그들이 부드러운 사토(沙
土)를 이용해 삽시간에 땅굴을 뚫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군호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화살 촉이 햇볕 아
래 파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것으로 미루어 맹독이 묻어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만약 은야왕이 공격 명령을 내린다면
각 문파의 무공이 고절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생명을 잃을 위험이 있을 것이다.

멸절사태의 성격은 매우 고집스러운데다가 오기 또한 대단했다.
그는 눈앞의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장무기에게 독살스럽게 말했다.

"이놈! 저승에 가서라도 날 원망 말아라!"

갑자기 그녀의 몸에서 으드득 하는 소리가 연거푸 들리며 마치
전신의 뼈마디가 모조리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들리
는 가운데 오른손을 장무기의 가슴을 향해 격출해냈다. 이 일장
은 바로 아미파의 절학으로서 불광보조(佛光普照)였다.

어떠한 장법, 혹은 검법이라 할지라도 여러 개의 동작이 이어짐
으로서 하나의 완벽한 형태가 이루어진다. 많은 것은 수백 초식
에 이르며, 최소한 서너 초식은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매 초식마다 변화가 숨겨져 있어 그 세세함을 따진다면 최소한
십여 개의 동작을 주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불광보조의 장법은 오직 한 초식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한 초식은 별다른 변화도 없었다. 일 초식을 쭉 뻗어내 상대방의
가슴팍을 노리든, 등줄기를 노리든, 아니면 어깨 혹은 면상을 노
리든 간에 초식 자체는 평범할 뿐 기교는 전혀 담겨져 있지 않
다. 하지만 그 위력은 아미구양공에 바탕을 둔 것이니 만치 불가
사의했다.

일단 일장을 전개하면 적은 도저히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재간
도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그 위력의 테두
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당금 아미파에서도 멸절사태를 제
외하고 이 초식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멸절사태는 본디 장무기의 단전을 공격해 잠시 그로 하여금 정
신을 잃게끔 만들려 했다. 그러나 은야왕이 나서서 노골적인 위
협을 하는 바람에, 오기로 뭉쳐진 멸절사태는 생각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성깔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처음 생각대로 장무기
에게 관대함을 베푼다면 은야왕의 위협에 굴복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장을 장무기의 목숨을 거두기로 작정한
것이다.

한편, 장무기는 그녀의 전신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본능적으로 자신이 생사존망의 기로에 놓이게 된 사실을
감지했다. 바로 이 순간 경문의 한 귀절을 다시 뇌리에 떠올렸
다.

-----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나는 한 모금의 진기로 대항할지어
다. -----

그의 생각은 곧장 행동으로 옮겨갔다. 그는 피하거나 정면으로
맞설 생각을 않고 한 갈래의 진기를 흉복(胸腹)으로 끌어모았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펑!

하는 굉음이 터지며 멸절사태의 일장이 정확하게 장무기의 가슴
팍을 강타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놀란 외침을 토했다. 장무기는 영
락없이 전신의 뼈마디가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지거나, 아니면 몸
뚱아리가 사분오열될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모든 사람의 생각이
빗나가고 말았다. 장무기는 비록 만면에 의아한 빛이 역력했지만
멀쩡하게 서 있었고, 오히려 멸절사태의 안색이 죽은 송장의 낯
가죽처럼 잿빛으로 변해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허공에 들어올
린 그 오른손마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알고보면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멸절사태의 불광보조 초식
이 아미구양공에 바탕을 둔 것에 반해, 장무기가 연마한 것은 그
뿌리가 되는 구양신공이 아닌가!

아미구양공은 왕년에 곽양이 각원대사가 읊조린 구양진경의 귀
절을 주어 들어 나름대로 편성한 것이니 진정한 구양신공과 비교
해 위력이 판이하게 달랐다. 물론 당사자의 내공에 따라 위력의
높낮음이 있겠지만 본질은 같았다. 아미구양공이 구양진공과 맞
부딪치게 되자 흡사 강물이 바다로 유입되듯 이내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멸절사태가 앞서 전개한 표설천운장과 절수구식은 구양신공에
속한 무학이 아니므로 장무기로 하여금 부상을 입고 피를 토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무기는 물론 망연자실했고 멸절사태 역시 상대
방의 내력이 워낙 심후하여 부상을 입지 않은 것이라 단정할 수
밖에 없었다.

주위에 있는 수백 명은 나름대로 더욱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멸
절사태가 젊은 인재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꼈으며 오파의 사람들
이 천응교의 독화살에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아 취한 행동이라고
풀이했다. 물론 일부분의 사람은 멸절사태가 겁을 집어먹고 은야
왕의 위협에 굴복한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장무기는 몸을 숙여 읍을 했다.

"사태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데 대하여 사의를 표합니다."

멸절사태는 어색한 입장을 감추려는 듯 연방 냉소를 날렸다. 그
녀는 장무기에게 다시 공격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대로 순순히 천응교에게 굴복하기에는 심사가 뒤틀렸다.

그녀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춤하는 사이에 은야왕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역시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자가 현명한 자요. 멸절사태는
과연 소문에 듣던 대로 당세의 고인이구료."

그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활을 거두어라!"

천응교의 교도들은 즉각 몸을 굴리며 뒤로 물러났다. 거기에 따
라 방패와 즐비한 활이 질서정연하게 이동되었다. 은야왕은 병법
(兵法)에 대하여 깊은 조예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멸절사태는 어느 때보다도 입장이 난처했다. 자기가 일부러 장
무기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
다. 설령 침을 튀기며 변명한다 해도 군호들은 믿지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고지식한 성깔로 누구에게 변명 따위를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장무기를 한 차례 무섭게 쏘아 보고 나서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은야왕! 정녕 내 장력을 시험해 보고 싶다면 당장 앞으로 나오
시오!"

은야왕은 입가에 미소를 걸고 공수의 예를 취했다.

"오늘은 사태께서 나의 체면을 살려 주셨는데 어찌 무례한 행동
을 할 수 있겠소. 다음에 필시 기회가 있을 것이외다."

멸절사태는 손을 획 내두르더니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제자들을
이끌고 서쪽을 향해 떠나갔다. 곤륜, 화산, 공동 각 문파의 사람
들과 은이정, 송청서도 곧 뒤를 따랐다.

주아는 아직 혈도가 풀리지 않아 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
급히 장무기에게 외쳤다.

"어서 날 데리고 이곳을 떠나세요!"

그녀는 은야왕과의 대면을 피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장무기
는 은야왕과 그냥 헤어질 수가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는 곧 은야왕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도움을 주신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은야왕은 그의 손을 잡고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너의 성이 증이냐?"

장무기는 당장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삼촌!'하고 외치고 싶
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감정을 억제했다. 그러자니 눈시울만
붉어졌다. 외숙을 대하기를 어머니같이 하라는 말이 있다. 무기
는 부모를 잃은 후 은야왕이야말로 십 년 만에 처음 대하는 혈육
이었다.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은야왕도 그의 격앙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도
와준데에 대한 고마워하는 감정이려니 생각했다. 그의 눈빛은 장
무기로부터 땅에 누워 있는 주아에게로 옮겨지더니 빙긋이 웃으
며 말했다.

"아리야. 그 동안 잘 있었느냐?"

번쩍 고개를 쳐드는 주아의 눈엔 원독(怨毒)이 가득했다. 그러
나 곧 고개를 힘없이 떨구어 잠시 동안 입술을 움직이더니 나직
하게 불렀다..

"아버지!"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장무기는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그의 뇌리엔 여러 가지 생각이 한데 어우러져 주마
등처럼 돌아갔다. 그러자 먹장구름을 뚫고 햇볕이 쨍 하고 비치
듯 일순간에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보니 주아는 외삼촌의 딸이었군. 그렇다면 나의 사촌동생
이 되는 셈이고..... 그녀는 작은 어머니를 죽였고 생모마저 죽
게 만들었으며, 아버지가 자기만 보면 죽이려 한다는 것도.....
맞아! 그녀는 천주만독수를 전개해 은무록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들 형제는 주인의 뜻에 따라야 하니 주아 모녀에게 푸대접을
한 모양이군. 은무복과 은무수는 비록 그녀에 대한 미운 감정이
끓어올랐지만 직접 손을 쓸 수는 없었겠지. 그래서 '셋째 아가씨
였군' 하는 말을 남긴 채 은무록을 안고 떠나갔던 거야.....!'

그는 새삼 주아를 유심히 살피며 다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어쩐지 그의 거동이 어머니를 닮았다고 느꼈는데 역시 나하고
는 한 핏줄이며, 나의 어머니가 바로 그의 친고모가 되는 셈이
군.'

이때 은야왕의 냉소가 들려왔다.

"넌 아직도 날 애비라 생각하고 있느냐? 흠! 난 네가 금화파파
를 따라간 후로부터 애비와 천응교를 완전히 잊은 줄로만 알았
다. 못된 것 같으니라고, 네 어미와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느냐?
그 무슨 천주만독수를 연마한다고? 흥! 거울이 있으면 너의 꼬락
서니 좀 비쳐보아라. 그 꼴이 뭐냐? 우리 은씨 집안엔 너 같은
못난이가 없다."

주아는 원래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었으나 갑자기 고개를 쳐들
어 똑바로 부친을 응시하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님이 지난 일을 언급하시지 않았다면 저도 들춰내지 않을
거예요. 이왕지사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분명히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왜 버젓이 어머님을 아내로 맞았으면서도 다시 작은
어머니를 끌어들였죠?"

은야왕은 대뜸 눈을 부라리며 발끈했다.

"이런..... 이런..... 죽일 년이 있나? 사내 대장부 치고 삼처
사첩(三妻四妾)을 거느리지 않는 놈이 어디 있느냐? 너는 천륜을
거역하는 불효를 저질렀으면서도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어른들
이 하는 일에 미주알고주알 하니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그는 즉시 손을 휘둘러 은무록, 은무수에게 명했다.

"이 계집을 데려가라!"

장무기는 얼른 주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은..... 선배님, 은 낭자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은야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저 계집은 내 친딸이지만 서모를 살해하고 생모마저 죽게 만들
었으니, 저런 짐승만도 못한 것을 어찌 살려 둘 수가 있겠는가?"

장무기가 얼른 주아를 위해 변명을 해 주었다.

"그 당시 은낭자는 나이가 어려 철이 없는 탓으로, 모친이 푸대
접을 받는다는 단순한 생각에 그만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 같으
니 선배님께선 부녀의 정분을 생각하셔 가벼운 벌로 다스려 주십
시오."

은야왕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넌 대관절 뭐하는 녀석인데 모든 일에 참견을 하
려는 거냐? 이것은 엄연히 우리 집안 일이야. 네가 정말 모든 일
에 관여할 자격이 있는 무림지존이라도 된단 말이냐?"

장무기의 마음이 다시 격동되었다.

---- 저는 남이 아니예요! 저는 바로 당신의 생질입니다! ----

장무기는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은야왕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이놈아, 넌 오늘 목숨을 그냥 주워온 거나 다름없다. 앞으로도
계속 강호의 일에 끼어들어 참견을 한다면 모가지가 열 개 있어
도 모자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며 다시 손을 떨쳐보이자 은무복과 은무수가 주아를
번쩍 들어올려 은야왕의 등 뒤로 데려갔다.

장무기는 다급해졌다. 주아가 이런 상태로 잡혀간다면 십중팔구
요행을 바라지 못할 것이다. 장무기는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
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오직 주아를 빼앗아 와야겠다는 일념뿐이
었다. 은야왕은 대뜸 눈살을 찌푸리며 왼손을 쭉 뻗어내 그의 멱
살을 잡고 살짝 밖으로 던져냈다. 거기에 따라 장무기의 몸이 포
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모래사장에 떨어졌다. 그는 구양신공으로
몸을 호위하고 있으므로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눈, 코, 입, 귀에
모래가 들어가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
나 다시 앞으로 달려왔다.

은야왕은 코웃음을 쳤다.

"이놈아, 첫번이라 사정을 봐 줬지만 다시 시건방지게 남의 집
안일을 참견한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장무기는 애원을 했다.

"그녀는..... 선배님의 딸이 아닙니까? 그녀가 어렸을 때 선배
님은 안아도 주고 몹시 귀여워했을 겁니다. 제발 그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은야왕은 그의 말에 마음이 동요됐는지 짤막하게 숨을 들이키며
다시 주아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푸르퉁퉁하게 부어
오른 얼굴을 보자 절로 혐오감이 생겨 차갑게 소리쳤다.

"저리 비켜라!"

장무기는 오히려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제자 주아를 빼앗아
오려 했다. 이번에는 주아가 그의 도움을 거절했다.

"아우 오빠, 날 내버려 두세요. 오빠가 날 잘 대해 준 것은 잊
지 않을 거예요. 어서 떠나세요. 오빠는 나의 아버님의 적수가
되지 못해요!"

바로 이때였다. 황사 속에서 느닷없이 한 사람이 치솟아 올라
다짜고짜 은무복과 은무수의 목덜미를 잡아 냅다 박치기를 시켜
버렸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변화였다. 은무복 형제같은 내노라
하는 고수들도 아예 손 한 번 못 써보고 서로 머리를 부딪쳐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그것으로서 끝나지 않았다. 불현듯 나타난
자는 잽싸게 주아를 안아 올리더니 질풍처럼 달아났다.

은야왕은 즉시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위복왕! 너도 남의 집안일에 참견할 작정이냐?"

청익복왕 위일소는 광소를 날리며 주아를 안은 채 계속 앞으로
질주해 갔다. 그의 이름은 일소(一笑)지만 결코 그의 웃음은 일
소(一笑)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광소는 계속 이어지며 메아리쳐
퍼졌다.

은야왕과 장무기는 일제히 신법을 전개해 뒤쫓아갔다.

그러자 위일소는 일부러 원을 그리며 돌지 않고 곧장 서쪽을 향
해 날을 듯이 달려갔다. 그의 신속무비한 신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은야왕은 내력(內力)이 심후하여 경공 또한 뛰어났다. 그리고
장무기는 체내에 구양진기가 흐르고 있어 달릴수록 그 속도가 빨
라졌다. 하지만 속도로 따진다면 역시 위일소가 한 수 위였다.
처음에 쌍방의 간격은 서너 장에 불과했지만 갈수록 멀어져 나중
에는 이십 장, 삼십 장으로 벌어지더니 끝내 그림자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은야왕은 화가 치밀어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장무기가 자기
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며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자 내심 놀
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도저히 위일소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무기의 경공을 시험해 볼 생각으로 내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몸은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튕겨져 나
갔다. 그런데도 장무기는 시종 그림자처럼 그의 보조를 나란히
했다. 달리는 도중에 홀연 장무기가 입을 열었다.

"은 선배님, 청익복왕의 경공술이 뛰어났다 해도 오래 버티는
뚝심은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우리가 끝까지 쫓아간다
면 틀림없이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은야왕은 흠칫 놀라 즉시 걸음을 멈추고 내심 중얼거렸다.

'나는 평생 동안 쌓아올린 내공을 끌어올려 경공을 전개했기 때
문에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숨을 다시 들이킬 수도
없었는데, 이 녀석은 날 따라오면서도 태연하게 말을 하니 이게
대관절 무슨 무공이란 말인가?'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장무기는 몇 장 밖으로 미끄
러져 나가서야 얼른 고개를 돌려 다시 은야왕 곁으로 되돌아왔
다.

은야왕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좀전과는 달리 말을 약간 높여 물
었다.

"증형제, 자네의 사부님은 어느 고인인가?"

장무기는 황급히 두 손을 내두르며 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
다.

"아..... 안 됩니다. 절대 저를 형제라 부르지 마십시오. 저는
어디까지나 후배입니다. 얼마 전에 멸절사태에게도 말했지만 저
에게는 스승이 없습니다."

바로 이때 멀리서 갑자기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은야
왕은 이내 안색이 변했다. 호각소리는 바로 천응교에 비상 사태
가 생겼다는 신호였다.

'틀림없이 홍수, 열화기의 녀석들이 내가 예금기를 도와주지 않
았다고 트집을 잡아 한바탕 벌인 모양이군. 이 녀석을 살려두면
나중에 우리에게 화근이 될 텐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죽이기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고..... 그래! 녀석이 혼자서
위일소를 쫓아가면 자연히 죽게 되겠지.....'

그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천응교가 강적을 만난 모양이니 난 속히 돌아가 봐야겠네. 자
네 혼자서 위일소를 쫓아가게. 그 사람은 흉악하기 이를데 없으
니 일단 따라잡으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먼저 공격을 해야 하
네."

장무기는 멋적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의 실력으로서 어떻게 그를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강적이라면 대관절 누구죠?"

은야왕은 계속 들려오는 호각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고개
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생각했던 대로 명교의 홍수, 열화, 후토 삼기가 모두 출
동했군."

장무기는 진지하게 말했다.

"모두 명교의 일맥인데 왜 서로 아웅다웅하며 싸워야 하죠?"

은야왕은 즉시 차가운 표정으로 변해 쏘아붙였다.

"조그만한 녀석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 또 그 못된 버릇이 발작
해 남의 일에 참견하려 드는구나!"

그는 이내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달려갔다.

장무기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며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주아가 대악마 위일소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큰일이구나. 만
약 목의 피라도 빨려먹는다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텐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크게 당황해졌다. 그는 곧 한 모금의 진
기를 끌어올려 있는 힘을 다해 달려나갔다. 위일소는 경공술이
빼어난 인물이지만 주아를 안고 있기 때문에 사막에 발자국을 남
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장무기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마음
을 굳게 다졌다.

'네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난 쉬지 않을 것이며 네가 잠자는 동
안에도 난 계속 뒤를 쫓을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사흘이내에 따
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뜨거운 뙤약볕 아래 쉬지 않고 사막을 달린다는 것은 결
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입술이 바싹 바싹 마
르고 비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다
리가 뻑적지근한 느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수년 동안 축
적된 구양신공이 조금씩 발휘되어 힘을 쓸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샘을 찾아 뱃속에 물을 잔뜩 채우고 나서 계속
위일소의 발자국을 따라 질주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갔다. 중천에 떠 있는 초승달의 희뿌연 달빛이
오히려 차갑게 느껴졌다. 장무기는 왠지 으시시한 느낌이 들었
다. 피를 발려 앙상한 피골만 남은 주아의 시체가 곧 눈앞에 나
타날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바로 이때
등 뒤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황급히 고개를 둘려보
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체할 수 없어 다시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 즉시 등 뒤에서 발자국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장무기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두 번째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자세히 살펴본 결과
사막에 세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
는 위일소, 하나는 자기의 발자국임에 분명한데 나머지 하나는
누가 남긴 발자국이란 말인가?! 장무기는 반사적으로 다시 고개
를 돌려 앞쪽을 살펴보니 위일소의 발자국뿐이었다.

그는 곧 상황이 확연해졌다. 누가 자기를 뒤쫓아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뒤돌아볼 때마다 아무도 보이지 않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장무기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안고 다시 걸음을 날렸다. 영
락없이 등 뒤에서 그 기분 나쁜 발자국소리가 다시 따라다녔다.

장무기는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나?"

그가 다그치자 뒤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대관절 귀신이냐, 사람이냐?!"

역시 반응이 똑같았다.

"대관절 귀신이냐, 사람이냐?!"

장무기는 계속 앞으로 달리다가 느닷없이 몸을 돌렸다. 이번에
는 한 줄기의 그림자가 연기처럼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비로소 상대방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신법을 전개해 이미 자
기의 등 뒤로 돌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가 몸을 돌린다
면 상대방도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 신법을 전개할 게 뻔했다.
장무기는 구태여 조롱을 사서 당할 필요가 없었다.

"왜 나를 따라오는 거요?"

이번에는 상대방이 그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지 않았다.

"내가 왜 널 따라가겠느냐?"

장무기는 어처구니 없게 웃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래서 묻는 게 아니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 그래서 너에게 묻는 게 아니냐?"

장무기는 상대방이 자기에게 악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지껏 쫓아오는 동안에 언제든지 자기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설불득(說不得) 이다."(* 說不得은 말로해서 안 된다는 말로서
즉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장무기는 그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어째서 말할 수 없다는 거죠?"

"설불득이면 설불득인 줄 알고 말할 수 없다면 말할 수 없는 줄
알지. 꼬치꼬치 따질 게 뭐가 있느냐? 너의 이름은 뭐냐?"

"나는..... 증아우라 하오."

상대방이 다시 물었다.

"오밤중에 무엇 하려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쏘다니느냐?"

장무기는 이 사람이 절세무공을 지닌 기인이라는 것을 알고 솔
직하게 대답했다.

"청익복왕이 내 친구를 잡아갔기에 구하려 가는 길이오."

"그렇다면 일찌감치 포기해라. 구해 내지 못할 거다."

"어째서....."

"청익복왕의 무공은 너보다 고강해 넌 그의 적수가 못 된다."

"적수가 못 돼도 싸울 생각이오!"

"좋아. 제법 패기만만하군. 내가 구하려는 친구가 혹시 낭자가
아니냐?"

"그렇소. 그걸 어떻게 알았소?"

"낭자가 아니라면 새파랗게 젊은 네가 목숨까지 걸고 구하려 하
겠느냐? 아주 예쁘게 생긴 낭자인가 보지?"

"그 반대로 아주 못 생겼소."

"그 낭자는 무공을 배웠느냐?"

"그렇소. 바로 천응교 은야왕의 딸이며 영사도의 금화파파로부
터 무공을 배웠소."

"그게 사실이라면 더욱 뒤쫓는 걸 포기하는 게 낫겠군. 위일소
가 그녀를 잡았으니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그렇소?"

상대방은 코웃음을 날렸다.

"너는 아우라는 이름처럼 정말 황소같이 미련하구나. 머리를 쓰
지 않으면 녹슨다는 것을 명심해라. 은야왕과 은천정은 어떤 사
이냐?"

장무기는 시종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부자지간이 아니오!"

"백미응왕 은천정과 청익복왕 위일소 두 사람 중에 누구의 무공
이 높다고 생각하느냐?"

"모르겠소. 혹시 알고 있으면 가르침을 주시오."

"각자 장점을 지니고 있지. 두 사람 중에 누구의 세력이 큰지는
말할 수 있느냐?"

"백미응왕은 천응교의 교주이니 비교적 세력이 크겠죠."

"맞았다. 그러니 위일소는 은천정의 손녀를 순순히 내주지 않을
것이란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녀를 미끼로 삼아 은천정을 굴복
시키려 할 게 뻔하다."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아미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오. 은야왕 선배님께선 한사
코 자기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소."

이번에는 상대방이 장무기의 말에 의문을 느꼈다.

"어째서 그러지?"

장무기는 주아가 아버지의 애첩을 죽이고 생모마저 지쳐 죽게끔
만든 경위를 대충 얘기해 주었다.

상대방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 혀를 차며 칭찬을 했다.

"훌륭해, 정말 대단해. 잘만 키우면 큰일을 해낼 수 있겠어. 아
주 좋은 재목이야."

"뭐가 좋은 재목이라는 거요?"

"어린 나이에 직접 서모를 죽이고 생모마저 죽게 만든데다가 영
서도에서 금화파파의 고약한 성깔을 모조리 배웠을 테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호감이 가는구나. 그런 훌륭한 재목
이라면 위일소가 제자로 삼으려 할 게 틀림없다."

"어떻게 그것을 장담할 수 있소?"

"위일소는 나의 절친한 친구야. 난 그의 생각을 손금보듯이 잘
알고 있다."

장무기는 눈빛이 변했다.

"맙소사! 그렇다면 큰일났군!"

그는 냅다 위일소의 발자국을 따라 달려갔다. 상대방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장무기는 달리면서 물었다.

"왜 자꾸만 날 따라오는 거요?"

"그야 호기심 때문이지. 심심하기도 하고..... 그런데 계속 위
일소를 쫓아갈 생각이냐?"

장무기는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주아는 그렇지 않아도 요사스러운 면이 있는데, 위일소를 스승
으로 모셔 다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로 변한다면 난 도
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오!"

"너는 주아를 몹시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왜 그녀에 대해서 그
렇게 관심을 갖느냐?"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는 건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소.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나의 어머님을 좀 닮았다는 사실이
오."

"음..... 이제보니 너의 어머니는 저팔계처럼 못 생겼구나!"

장무기는 얼른 변명을 했다.

"당치도 않은 말이오! 우리 어머님은 정말 잘 생기셨소."

상대방은 혀를 끌끌 내찼다.

"아깝다, 아까와.....!"

"뭐가 아깝다는 거요?"

"너는 젊은 패기에다 뜨거운 가슴까지 갖고 있어 장래가 기대되
는데, 아깝게도 머지 않아 체내의 피가 몽땅 빨린 송장으로 변할
테니 말이다."

장무기는 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맞는 말이다. 설령 위일소를 따라붙는다 해도 무슨 수로 주아
를 구한단 말인가? 나까지 개죽음을 당할 게 뻔할 텐데.....'

그는 넌지시 물었다.

"당신이 날 도와줄 수 없겠소?"

"안 된다. 위일소는 나의 절친한 친구라는 것은 고사하고 난 그
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위일소가 당신의 친구라면 잔인한 짓을 못하게끔 왜 타이르지
를 못하죠?"

상대방은 대답에 앞서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아무리 타일러도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위일소 자신도 흡혈귀
노릇을 하고 싶어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
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자신인들 어찌 괴롭지 않겠느냐?"

장무기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기 때문이라뇨?

"위일소는 내공을 연마하다가 주화입마되어 그 후로부터 매번
내력을 끌어올릴 때마다 사람의 피를 빨아먹게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해 동사할 것이다."

장무기는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니 불쑥 물었다.

"혹시 삼음맥락(三陰脈絡)에 손상을 입은 게 아니오?"

상대방은 의아해 했다.

"아니.....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

"단지 추측일 뿐 맞는지 모르겠소?"

"난 불두꺼비를 잡아 그의 병을 치료해 주기 위해 세 번이나 장
백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세 번 다 헛수고였다. 첫 번째는 그
래도 운이 좋아 불두꺼비를 발견했는데 놓치고 말았다. 두 번째
와 세 번째는 아예 불두꺼비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이번 눈앞
에 닥친 난관만 넘긴다면 다시 장백산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다."

"나도 함께 가고 싶은데 되겠소?"

"음..... 너의 내력은 충분하지만 경공술이 형편없으니..... 그
때 가서 다시 논하기로 하자. 참 그런데 불두꺼비를 잡는일에 돕
겠다고 나서는 이유가 무엇이냐?"

"불두꺼비를 잡는다면 위일소의 병을 치료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위일소가 다시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지 않아도 되니 많
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 선배님, 그가 이
렇게 오랫 동안 달렸으니 내력이 많이 소비되어 어쩌면 주아의
피를 빨아 먹을지도 모르겠군요?"

상대방은 약간 주춤하더니 입을 열었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물론 상황이 다급하면 설령 자기의
친딸이라 해도 피를 빨아먹겠지만....."

장무기는 생각할수록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려나갔다. 그 때 상대방이 별안간 놀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아니?! 너의 뒤에 있는 게 뭐냐?"

장무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확인하려 했다. 그 순간 돌연
눈앞이 캄캄해지며 온몸이 커다란 주머니에 씌워져 허공으로 번
쩍 들어올려졌다. 장무기는 당황하여 주머니를 찢으려 했으나 도
저히 불가능했다. 그 주머니는 비단도 아니고 가죽도 아닌 것이
매우 질겼다. 손에 닿는 축감은 포대 같았으나 도무지 찢어지지
가 않았다.

상대방은 들어올렸던 포대를 땅에다 팽개치며 껄껄 웃었다.

"네가 그 포대속을 뚫고 나온다면 네 재주를 진짜 인정해주마."

장무기는 내력을 끌어올려 두 손으로 힘껏 밀었으나 포대자체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도무지 힘을 받지 않았다. 그는 다시 발로
걷어찼으나 마대가 약간 바깥쪽으로 불룩해졌을 뿐 결과는 마찬
가지였다. 그가 제아무리 밀고 당기고 뒹굴어도 헛수고였다.

상대방이 낄낄 웃으며 한 마디 던졌다.

"자, 그만 하면 굴복하겠느냐?"

장무기는 별 수 없었다.

"완전히 두 손 들었소!"

상대방은 포대속에 들어 있는 장무기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또
낄낄 웃었다.

"이놈아, 얌전히 내 건곤일기대(乾坤一氣袋) 속에 있어라. 널
데리고 좋은 데로 가겠다. 네가 쓸데없이 입을 열어 다른 사람한
테 발각되는 날엔 내 능력으로 널 살리진 못할 것이다."

"대관절 날 어디로 데려갈 작정입니까?"

"더 이상 묻지 말아라. 넌 내 건곤일기대 속에 들어 있으니 목
숨을 나한테 내준 거나 다름이 없다. 얌전히 입 다물고 있으면
절대 너한테 손해볼 게 없다."

장무기는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버둥거
리지 않았다.

상대방은 제법 우쭐대며 말했다.

"네가 내 포대 속에 들어간 것도 따지고 보면 사실은 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포대를 번쩍 어깨에 짊어지더니 신법을 전개해 달리기 시
작했다.

장무기는 자신보다도 주아가 더 염려되었다.

"주아는 어떻게 되는 거죠?"

"네가 어떻게 알겠느냐? 다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당장 포대
에서 꺼내 팽개쳐 버리겠다!"

장무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포대 속에서 꺼내 팽개쳐 주기만 한다면 오죽 좋으련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일 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상
대방의 달리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장무
기의 느낌으로 몇 시진이 지난 것 같았다. 포대안은 찌는 듯이
무더웠다. 햇볕이 내리쬐는 대낮이려니 생각했다. 아마도 산 위
로 오르는 듯 싶었다. 산에 오르는 데만 다시 두 시진 가량이 경
과되었다. 한낮의 무더위와는 반대로 장무기는 차츰 추위를 느끼
기 시작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높은 산 위에 오른 것이라 추
측되었다. 순간 그의 몸이 갑자기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장무
기는 흠칫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의 몸이 곧 사뿐이 착지했다. 그는 상대방이 절벽 같은 곳을
뛰어오른 것이라 짐작했다. 피부로 느끼는 차가운 기운으로 미루
어 주위엔 필시 빙설이 깔려 미끄러울 텐데, 만약 상대방이 자기
를 짊어진 체 약간만 실수하여 발을 헛딛는다면 영락없이 분신쇄
골될 게 아니겠는가?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상대방은 그의 노파
심 따위는 아랑곳 않고 계속 몸을 날렸다. 장무기는 포대 안에서
바깥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단지 지세가 갑자기 높아졌다가
갑자기 낮아지며 그런 상황이 부단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 추측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장무기는 그저 갑갑하기만 했다. 상대방은 대관절 자기를 어디
로 데려가는 것일까?


----- 제 4 권 1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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