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4-4

3학년2반 | 2022.03.04 07:04:23 댓글: 0 조회: 388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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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4 권


제 6 장 광명정(光明停)의 환난(患難)


아미파의 장문인 멸절사태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비록 저 소년의 무공이 몹시 괴이하지만 곤륜, 화산 네 사람의
초수에 이미 그의 수족은 묶여 버리는 형편이 되었다. 서역의 무
공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중원의 박대정심(博大精深)함을 따
를 수 없는 것이다. 양의(兩儀)는 사상(四象)으로 변하게 되고,
사상은 다시 팔괘로 변한다. 정변(正變)은 팔 팔 육십 사 초의
배가 되므로 모두 사천 구십 여섯 가지로 변하게 된다. 그러니
천하무공의 변화도 거의 그 안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지약은 장무기의 일거일동을 처음부터 관심있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미파 문하에 있으면서 멸절사태의 총애를 받고 있어서
이미 그녀에게 역경원리(易經原理)의 심전(心傳)을 받았다.

이때 낭랑한 소리로 물어 보았다.

"사부님, 정반양의 초수가 아무리 많아도 태극(太極)이 음양양
의의 원리로 변한 것이 아닙니까? 제자가 보기에 네 분 선배님의
초수가 과연 정묘합니다. 그 중에서도 발밑에 딛고 있는 보법의
방위(方位)가 제일 무서운 것 같습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단전의 기(氣)로 천천히 토해
낸 것이어서 소리가 몹시 컸다.

장무기는 비록 그들과 역전(力戰)하고 있으나 그녀가 하는 말들
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순간 그는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뭣 때문에 이토록 큰 소리로 말을 하고 있을까? 아마
날 지적해 주려는 속셈일 거다.'

멸절사태가 말했다.

"선배 무공의 핵심을 파악하다니, 너의 안력도 대단하구나!"

주지약은 혼자 중얼거렸다.

"양(陽)은 태양(太陽), 소음(小陰)으로 나누어지고, 음(陰)은
소양(小陽), 태음(太陰)으로 나누어진다. 그 네 가지를 사상(四
象)이라 한다. 태양은 건열(乾悅)이고, 태음은 간곤(艮坤)이고
소양은 손감(巽坎)이고, 태음은 간곤(艮坤)이다. 건남(乾南), 곤
북(坤北), 이동(離東), 감서(坎西), 진동북(震東北), 열동남(열
東南), 손서남(巽西南), 간서북(艮西北), 진에서 건까지가 순
(順)이고, 손(巽)에서 곤까지가 역(逆)이다."

"사부님, 곤륜파의 정양의검법은 진위(震位)부터 손위(巽位)까
지가 순(順)이고, 화산파의 반양의도법은 손위(巽位)부터 곤위
(坤位)까지가 역(逆)입니다. 그렇죠?"

멸절사태는 제자가 지적해 낸 걸 듣자 내심 몹시 기뻐했다.

"넌 내가 평소에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

멸절사태는 기뻐한 나머지 주지약의 말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주지약은 많은 사람의 눈빛이 자기에게로 집
중되는 걸 보자 일부러 박수치고 소리를 지르며 몹시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장무기는 팔괘방위(八卦方位)란 학문을 어려서 부친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막상 주지약이 사상순역(四象順逆)에 대해서 말을
하자, 그제서야 하씨 부부와 두 노자의 보법 초수를 살펴보니 과
연 사상, 팔괘에서 변화시켜 나온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건곤이
위심법이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장무기가 여지껏 버티
고 있는 것은 그가 서역 무공을 최고 경지까지 수련한 것이고,
하씨 부부와 두 노자의 중토 무공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다. 순
간 그의 머리가 번쩍하더니 칠, 팔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
러나 일시에 사용하기를 망설였다.

'만약에 내가 지금 전개하게 되면 멸절사태가 주낭자를 나무랄
것이다. 그 노사태의 심성이 악독하여 무슨 일이든 능히 할 수
있는 위인이다. 그렇게 되면 주낭자가 다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자 그는 초식을 바꾸지 않고 네 사람의 초수를 눈여겨 관찰
했다.

주지약은 그가 호전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매우 초조했다.
더구나 하씨 부부의 공격이 더욱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
녀는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제자인 제가 보기에는 철금선생님의 다음 위치는 귀매
(歸妹) 위를 차지할 것 같은데 어찌 보시는지요?"

멸절사태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반숙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호
통쳤다.

"아미파의 꼬마 아가씨! 저 녀석이 너의 무슨 사람이냐? 우리
곤륜파를 그렇게 호락호락 넘볼 수 없는 것을 모르느냐?"

주지약은 그녀가 자기의 속셈을 알아채는 걸 알자 그만 얼굴이
홍당무처럼 됐다.

"지약아, 더 이상 물어 보지 마라. 그들 곤륜파는 아무나 넘볼
수 없다는 걸 못 들었느냐?"

멸절사태의 말은 자기의 제자를 감싸주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자 장무기는 큰 소리로 웃어대며 말했다.

"나는 아미파의 수하폐장이고, 멸절사태의 포로가 된 적이 있
소. 그러니 아미파가 그대의 곤륜파보다는 훨씬 고명하오."

그러면서 왼쪽으로 두 걸음 내딛더니 오른손에 있는 매화로 한
줄기 경풍을 일으켰다. 그 경풍은 바로 키 작은 노자의 후심을
덮쳐갔다.

장무기의 이 일초는 바로 건곤이위심법을 사용한 것이다. 방위
와 시각이 안성맞춤이었다. 키 작은 노자의 몸이 말을 듣지 않
고, 강도는 반숙한의 어깨로 후려쳐 갔다. 그러나 반숙한은 얼른
검을 돌려서 막아냈다. 훅 하고 소리가 나더니 이번에는 키 큰
노자의 강도가 다시 공격해 왔다.

하태충은 급히 달려가서 검을 쳐들고 키 큰 노자의 만도(彎刀)
를 막아냈다. 장무기는 다시 장풍을 보내서 키 작은 노자의 칼
끝이 하태충의 하복부를 찌르게끔 유도했다. 반숙한은 몹시 화가
났다. 순간 휙휙 삼 검을 연거푸 공격해서 키 작은 노자의 접근
을 막았다. 그러자 키 작은 노자가 소리쳤다.

"저 녀석의 술수에 넘어가지 마라!"

하태충은 금방 알아챘다. 장검을 되돌려서 그에게 공격했다. 장
무기는 다시 건곤이위심법을 전개하자 하태충의 검은 도중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순간 푹 하고 소리가 나면서 키 큰 노자의 왼
팔이 적중됐다. 그러자 키 큰 노자는 비명을 지르면서 칼을 쳐들
고 하태충의 머리를 후려쳤다. 키 작은 노자는 칼을 막아 내면서
호통치며 말했다.

"사제, 덤비지 마라. 모두 저 녀석의 술수다. 아이구....."

바로 이때 장무기는 다시 반숙한의 검초 방향을 바꿔놓자 키 작
은 노자의 어깨 뒤를 적중한 것이다.

삽시간에 화산 이로는 선후로 검을 맞고 부상을 입자, 방관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왕좌왕했다. 비록 그들도 장무기가 중간에서 네
사람의 검법과 도법의 방향을 바꿔 놓은 줄 알고 있지만, 그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직 양소가 전에 건곤이
위심법의 초보적인 것을 배운 것이 있어서 대강 눈치를 챘지만,
저 소년이 그러한 신공을 터득했다는 것은 절대로 믿어지지가 않
았다.

순간 장중에서는 부부끼리가 싸우고 동문끼리가 싸우는 양상이
되었다. 그러자 반숙한이 소리를 쳤다.

"전기망(轉기妄), 진몽위(進蒙位), 창명이(창明夷)!....."

그러나 건곤이위심법 무공이 사면팔방에서 감싸고 있기에 그들
이 아무리 방위를 변환시키고 몸부림쳐 봐도 막상 도검을 쓰게
되면자기도 모르게 자기편의 몸쪽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키 큰 노자가 소리쳤다.

"사형, 출수할 때 좀 살살 할 수 없소?"

"난 저 소적(小賊)을 치려는 것이지 너를 공격하는 게 아니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에 있는
강도가 비스듬하게 키 작은 노자의 허리쪽으로 후려쳐 갔다.

하태충이 말했다.

"부인, 저 소적이....."

탱 하는 소리가 나더니 반숙한은 손에 들고 있는 장검을 땅바닥
에다 던져 버렸다. 키 작은 노자가 생각해 보니 그녀의 행동이
맞는 것 같았다. 만약에 권장으로 상대하게 되면 장무기가 그런
사법(邪法)을 사용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자 그도 따라서 단
도를 버리고 출권하여 장무기의 흉구를 향해 후려쳤다. 그런데
획 하고 소리가 나더니 하태충의 장검이 얼굴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키 작은 노자의 수중에는 병기가 없어졌기에 얼른 고개
를 숙여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반숙한이 소리쳤다.

"병기를 버려라!"

그러자 하태충은 힘껏 던져 장검을 멀리 보냈다.

키 큰 노자도 따라서 칼을 놓고 금나수로 장무기의 뒷덜미를 잡
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손아귀에 뭔가 쥐어지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보니 자기의 강도를 다시 쥐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장무기가 주워서 다시 그의 수중에 쥐어 준 것이다. 그러자 키
큰 노자가 말했다.

"난 병기를 안 쓴다!"

그러면서 힘껏 던져 버렸다. 장무기는 몸을 옆으로 해서 그의
강도를 잡더니 다시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몇 번씩이나 되풀이
해봐도 키 큰 노자의 병기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
자 자신도 이상한지 그만 큰 소리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네 녀석이 마법을 쓰는 거냐?"

이때 키 작은 노자와 하씨 부부는 권각(拳脚)을 함께 써가며 장
무기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화산, 곤륜의 권장지학(拳掌之學)도
병기만큼 위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장무기는 마치 미끄러운 물고
기처럼 요리저리 피해다니면서 이따금 일초 반식을 반격하면 세
사람 모두 쩔쩔매었다.

이쯤되자, 승패는 판가름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사람의 무
공으로는 장무기를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키 큰 노자
가 갑자기 소리쳤다.

"네 이놈, 암기다!"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짙은 가래 한 모금을 장무기에게 뱉어냈
다. 장무기는 옆으로 물러나서 피하자 키 큰 노자는 얼른 등 뒤
로 강도를 던지더니 웃으며 말했다.

"네가 또..... 아유..... 안돼....."

순간 장무기는 좌장을 반인(反引)하여 반숙한을 자기 앞으로 데
려오자. 키 큰 노자의 가래침이 그녀의 양미간에 적중한 것이다.

반숙한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순간 열 손가락을 빳빳하
게 세워서 장무기에게 공격했다. 키 작은 노자는 마침 그의 퇴로
를 막고 있으니 키 큰 노자와 하태충은 기회가 왔다 하고는 동시
에 덮쳐갔다. 그러자 장무기는 양손으로 동시에 건곤이위심법을
전개했다. 순간 그는 몸을 솟구치더니 공중에서 살짝 회전한 후
에 일 장 밖으로 날아가서 착지했다.

그러자 하태충은 자기 부인의 허리를 안고 있고 반숙한은 남편
의 어깨를 잡고 있고, 키가 크고 작은 두 노자는 서로 힘껏 부둥
켜 안으면서 네 사람 모두 땅바닥에 넘어졌다.하씨 부부는 잘못
된 것을 알고 얼른 손을 놓고 일어섰다. 큰 노자가 외쳤다.

"잡았다. 이번에 어디로 도망가겠냐? 아이구, 아니다....."

키 작은 노자가 화를 내며 말했다.

"빨리 놓아라!"

"먼저 손을 놓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손을 놓겠습니까?"

"한 마디라도 덜 할 수 없느냐?"

"한 마디 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키 작은 노자가 두 팔을 풀고 무서운 소리로 말했다.

"일어나거라!"

키 큰 노자는 사형이 몹시 무서운 눈치였다. 얼른 손을 놓고 같
이 일어났다.

키 큰 노자가 다시 소리치며 말했다.

"네 녀석은 무예를 겨루지 않고 사법(邪法)만 쓰고 있는데, 그
건 어느 문파의 영웅적인 행실이냐?"

키 작은 노자는 장무기를 더 이상 물고 늘어져 봤자 창피만 당
할 것임을 알고는 포권을 하면서 말했다.

"각하의 개세신공(蓋世神功)은 이몸이 평생 처음 보는 것이니,
화산파는 패배를 인정하겠소."

장무기는 답례를 하면서 말했다.

"후배가 요행으로 이긴 것이니 선배님들은 너무 마음에 두지 마
시오."

키 큰 노자가 즐거워하며 말했다.

"그렇지, 너도 요행으로 이겼는 줄 아는구나."

"두 분의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중에 만나게 되더라
도....."

"내 사형은 위진....."

"닥쳐라!"

키 작은 노자는 사제에게 호통치더니 장무기에게 말했다.

"패군지장은 몹시 창피한 일인데 이름은 알아서 뭐 하겠소?"

말을 하면서 화산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승패란 병가지상사라, 난 그런 건 개의치 않는다."

키 큰 노자는 웃으며 말을 하고는 땅에 있는 두 자루 강도를 줏
어 들고서 느린 걸음으로 돌아갔다.

장무기는 선우통에게 다가가서 그의 혈도를 두 군데 찍으면서
말했다.

"여기 일이 마무리 짓게 되면 당신의 독을 치료해 주겠소. 우선
독기가 심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오."

바로 이때 갑자기 등 뒤에서 찬 바람이 몸을 기습해 오면서 약
간 통증을 느꼈다. 장무기는 깜짝 놀랬다. 순간 그는 발끝에 힘
을 가해서 몸을 솟구치게 하더니 옆으로 날아서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푹푹 두 번 소리가 나면서 윽! 하는 소리가 따라서 나더
니 긴 비명 소리가 났다. 그가 공중에서 고개를 돌려보니 하태충
과 반숙한의 장검 두 자루가 나란히 선우통의 흉구에 꽂혀 있었
다.

그들 부부는 장무기가 선우통의 혈도를 찍고 있는 걸 보자, 서
로 눈치가 오고 가더니 갑자기 <무성무색> 일초를 써서 동시에
그의 등 뒤를 공격한 것이다.

이 무성무색 초식은 곤륜파 검학 중의 절초(絶招)였다. 필히 두
사람이 같이 사용해야 하고 내경도 비슷해야 된다. 그래야만 검
초가 나갈 때 두 자루 장검에 발생하는 탕격지력(탕檄之力) 파공
지성(破空之聲)을 서로 무마시킬 수 있다. 이 검초는 본시 야전
에 사용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상대방이 소리를 듣지 못하
므로 식별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낮에 등 뒤에서 사
용하게 되면 그 또한 방어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행히 장무기
에게는 구양신공이 몸을 보호하고 있고 초식을 번개처럼 변화시
켰기 망정이지, 정말 너무나도 아슬아슬 했었다. 그래도 입고 있
던 옷 등에는 긴 칼자국이 두 개나 나 있었다. 하씨 부부는 미처
초식을 거두어 들이지 못하여 화산파의 장문인을 죽이게 된 것이
다.

장무기가 착지하자 군중들은 몹시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씨 부
부의 쌍검이 일제히 장무기를 공격했다. 그들의 속셈은 내친김에
아주 죽여 버리려는 것이다.

장무기는 몇 검을 피하고 나서 뭔가 생각난 듯이 몸을 살짝 구
부리더니 왼손으로 땅에서 한 줌의 흙을 집었다. 한편으로 검초
를 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장심의 땀으로 손에 쥔 흙을 두 개의
작은 환약으로 반죽했다. 하태충이 왼쪽에서 공격해 오고 반숙한
이 오른쪽에서 공격해 오는 걸 보자, 그는 얼른 선우통의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두 번 뒤적거리는 시늉을
하고 난 다음, 몸을 돌려서 쌍장으로 두 사람에게 가격했다. 이
쌍장은 육, 칠 성(成)의 공력을 사용했기에 하씨 부부는 그만 숨
통이 막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을 벌려서 숨을 쉴려는 찰나,
장무기는 손을 들어서 두 개의 환약을 두 사람의 입으로 각각 하
나씩 던져 넣었다. 그 환약은 강렬한 힘으로 목구멍으로 돌진해
갔다.

하씨 부부는 기침을 여러번 해 보았으나 그 환약을 토해지지 못
했다. 막상 선우통의 몸에서 꺼낸 걸 보고는 몹시 놀랐다.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 아까 선우통이 금잠충독에
중독되어 괴로워하는 참상을 생각하자 반숙한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장무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선우장문의 몸에는 랍환(蠟丸)에 싸여 있는 금잠을 키우고 있
고, 두 분께서는 이미 한 알씩 삼키었소. 만약에 급히 토해내서
랍환이 미처 녹지 않았다면 혹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이쯤되자 하씨 부부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급해 내력을
운용하여 랍환을 토해내려 했다. 그들 두 사람의 내공이 뛰어나
서 몇 번 위를 누르더니 바로 위 안에 있는 랍환을 토해냈다. 이
때는 이미 위분비물과 범벅이 된 흙으로 변해 있었고, 랍환이란
것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화산파의 그 키가 큰 노자가 다가와서 웃으며 말했다.

"아하, 이건 금잠의 똥이다. 금잠이 뱃속에 들어가서 똥을 쌌구
나."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있는 반숙한은 마침 발설할 때가 없는 차
에 잘 됐다. 하며, 손을 되돌려서 무겁게 일장을 후려쳤다. 키
큰 노자는 머리를 숙여서 피한 다음 도망가면서 한 소리로 외쳤
다.

"곤륜파의 여편네야, 네가 본파의 장문을 살해한 일은 화산파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이니라."

하씨 부부는 그가 소리치는 걸 듣자 마음이 더욱 심란했다. 비
록 선우통의 인품이 간악해도 화산파의 장문인은 틀림없다. 자기
부부가 실수하여 그를 살해한 것은 이미 무림에도 드문 큰 화를
저지른 것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금잠충독이 뱃속에 들어가서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판에 다른 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
장에는 장무기 저 녀석만이 독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 부
부가 옛날에 그처럼 그를 대해 줬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들
생명을 구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장무기는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소. 비록 금잠이 뱃속에 들
어갔어도 독성이 발작하려면 여섯 시간이나 더 있어야 하오. 그
러니 여기 일이 끝나는 대로 후배가 꼭 방법을 찾아서 구해 주겠
소. 단지 하부인께서는 다시는 저에게 독주를 억지로 마시게 하
면 안 됩니다."

하씨 부부는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고맙다는 말은 차마 하지를
못하고 조용히 물러나기만 했다.

장무기가 말했다.

"두 분께서는 공동파에게서 오동흑석단 네 알을 얻어 복용하시
오. 그래야만 독성이 심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가 있소."

하태충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정말 고맙소."

즉시 큰 제자를 보내서 공동파에게 단약(丹藥)을 얻어 와서 복
용했다. 장무기는 속으로 몹시 우스웠다. 그 옥동흑석단은 해독
하는 약물임엔 틀림없지만, 복용하게 되면 두 시간 동안 배가 뒤
틀리면서 고통이 온다. 잠시 기다리자 하씨부부는 즉시 복통이
시작됐다. 그들은 금잠충독이 발작한 줄만 알지 장무기의 속임수
에 넘어간 줄은 몰랐다.

이때 다른 쪽에서 멸절사태가 송원교에게 소리치며 말했다.

"송대협, 육대파 중에 귀파와 우리만 남았소. 더구나 이 몸은
여자의 몸이니 송대협의 책임이 막중하오."

"난 이미 은교주와 겨루어 봤지만 그를 이기지 못했소. 사태의
검법이 신통해서 필시 저 후배를 제압할 것이오."

멸절사태는 냉소를 한 번 날리더니 등에서 의천검(倚天劍)을 뽑
아들고 느린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무당파의 이협(二俠) 유연주는 장무기의 동태를 계속 눈여겨 보
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 이상한 점에 대해서 자신은 몹시 경이하
게 느끼고 있었다. 이때 그는 잠시 생각을 굴렸다.

'멸절사태의 검법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곤륜, 화산의 사대고
수가 연수한 임에는 미치지 못한다. 만약에 그녀가 이번에도 패
하게 된다면 육대문파는 모두 그에게 패하는 것이다. 더구나 무
당파에서도 그를 제압할 힘이 없다. 그러니 내가 우선 그의 허실
(虛實)을 좀 시험해 봐야겠다!'

그는 즉시 빠른 걸음으로 장중에 들어 가면서 말했다.

"사태, 우리 형제 다섯 사람이 먼저 저 소년과 무공을 겨루게
해 주겠소? 우리가 그의 공력을 소모시켜 버리면 최후의 일전은
사태가 꼭 승리할 것이오."

멸절사태는 그의 저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네
아미파가 무당파의 도움으로 저 소년에게 이기게 되더라도 그건
영광스런 일이 아니다. 아미파가 어찌 그런 비겁한 수단으로 후
생소배(後生小背)를 상대해서 무공을 겨루겠는가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교만한 성품이라 항상 안하무인격이었다. 더구나 장무기
가 전에 그녀에게 손쉽게 잡힌 적도 있지 않은가! 그러자 옷소매
를 한 번 흔들더니 말했다.

"유이협은 돌아가시오. 이몸의 의천검이 출수하게 되면 절대로
그냥 검집에 꽂을 수 없소!"

유연주는 그녀의 말을 듣자 하는 수 없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알겠소."

그리고 물러갔다. 멸절사태는 검을 쳐들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
다. 장반(場畔)이 있던 교중(敎衆)이 그녀가 나오는 걸 보자 모
두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야유를 보냈다. 그러자 멸절사태는
냉소를 날리며 말했다.

"웬 소란이야? 내 저 녀석을 요리한 다음에 너희들을 하나하나
씩 처치하겠다. 빨리 죽지 못해서 환장을 했구나!"

은천정은 그녀의 의천검이 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명교
의 많은 고수가 일합(一合)도 견디지 못하고 병기가 절단되어 그
녀의 검에 죽어 갔었다.

"증소협, 그대는 무슨 병기를 사용하겠소?"

은천정이 장무기에게 물었다.

"나는 병기가 없소. 그러니 어떻게 그녀의 보검을 상대했으면
좋겠소?"

의천검은 아무리 단단한 물건도 자를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
했었다. 막상 생각하니 온몸이 섬찟했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은천정이 신변에 있는 봇짐에서 장검 한 자루를 꺼내며 말했다.

"이 백홍검(白虹劍)을 그대에게 주겠소. 이 검은 의천검보다 유
명하지는 않아도 강호에서는 보기드문 병기라 할 수 있소."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검을 한 번 튕기자, 그 검은 갑자기 구부
러지더니 바로 똑바로 펴지면서 윙윙..... 하고 맑은 소리를 내
며 울었다. 장무기는 아주 공손하게 받아 들고 나서 말했다.

"노인장, 정말 감사합니다."

"이 검은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소. 그러나 근래 십 여 년 동
안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소. 오늘 만약에 그 검이 저 도적같
은 늙은 비구니의 목에 있는 선혈을 마시는 걸 보게 되면 노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장무기는 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난 절대로 사태를 다치게 할 수 없다!'

하고 생각하며 백홍검을 집어들었다. 몸을 뒤로 돌려서 몇 발자
국 다가갔다. 검 끝은 아래를 항하게 하고 양손으로 검을 쥐면서
멸절사태에게 말했다.

"후배의 검법은 너무나 평범하여 절대로 사태님의 적수가 아닙
니다. 선배님은 명교의 예금기 아래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살려
주셨으니 저에게도 선심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멸절사태는 긴 눈썹을 밑으로 떨구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예금기의 도적놈들은 네가 구해준 것이다. 멸절사태는 절대로
용서해 주는 법이 없다! 네가 내 수중에 있는 장검을 이기게 되
면 그 때 가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명교의 예금, 거목, 홍수, 열화, 후토, 오행기에 있는 교중(敎
衆)은 모두들 야유를 보내며 소리쳤다.

"도적같은 늙은 비구니야! 재주가 있으면 육장(肉掌)으로 증소
협과 상대해라."

"너의 검법은 형편없다. 모두가 그 보검의 덕을 보고 있는 것이
다."

"증소협의 검법은 너보다 고명하다. 내가 보통 장검으로 증소협
의 삼초를 막아낸다면 너의 아미파가 고명하다고 인정하겠다."

"삼초라니? 아마 일초 반식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멸절사태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야유를 보
내는 말을 듣고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진초(進招)하라!"

그러나 장무기는 검법을 수련한 적이 없었다. 이때 갑자기 진초
란 말을 듣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까 하태충의 양의검법 초수
가 몹시 정묘하다고 생각되자 그걸 흉내내서 옆으로 일검을 찔러
보았다.

멸절사태는 이상하다며 말했다.

"화산파의 초벽단운(초璧斷雲)이 아니냐?!"

의천검을 살짝 옆으로 비스듬히 세우더니 상대방의 초수를 막아
내지 않고 검 끝을 똑바로 그의 단전에 있는 급소를 찔러갔다.
출수의 악랄함은 마치 도적 무리의 행실 같았다.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순간 걸음을 미끄러뜨려 피했으나 갑자
기 멸절사태의 장검이 번뜩거리더니 검 끝은 인후를 가리키는 것
이다. 장무기는 몹시 놀랐다. 얼른 땅에 엎드리면서 한 번 뒹굴
더니 막 일어나려는 찰나 갑자기 뒷덜미에 섬 한 기분이 들었
다. 그래서 오른쪽 발 끝에 힘을 가하여 몸을 비스듬히 해서 날
아갔다. 그는 절대로 불가능한 상태에서 목숨을 건진 것이다. 방
관하는 사람들이 갈채를 보내려 하자, 멸절사태는 몸을 솟구치더
니 궁중에서 검을 들어올리며 위로 찔러갔다. 그가 미처 착지하
기도 전에 검공은 이미 그의 몸둘레 수 치 밖을 봉쇄했다. 장무
기의 몸이 공중에 있기 때문에 피할 방도가 없었다. 만약에 몸이
밑으로 한 치 정도만 내려가도 멸절사태의 보검에 즉시 양발이
잘릴 것이다. 만약에 세 치 정도 밑으로 내려가게 되면 그 때는
허리가 잘려서 두 동강이 나게 될 것이다.

순간 그는 최고의 위기에 놓였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장검을 뻗어서 백홍검의 검 끝을 의천검의 검 끝에 포개놓았다.
그러자 백홍검이 구부러지더니 툭 하고 살짝 소리 나면서 검신이
튕겨졌다. 그는 그 탄력을 이용해서 다시 높이 솟구쳤다.

멸절사태는 얼른 따라가서 휙휙 하며 삼검을 연거푸 공격했다.
제 삼검이 공격될 때는 장무기는 몸이 다시 밑으로 내려와서 하
는 수 없이 검을 휘둘러서 막아야 했다. 순간 팅 하고 소리가 나
더니 수중의 백홍검이 반 토막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우장을 후려치면서 비스듬히 멸절사태의 정수리를 공격했
다. 그러자 멸절사태는 검을 휘둘러서 그의 손목을 치려 했다.
장무기는 손가락을 내밀어서 검신을 한 번 튕기더니 몸을 반대로
날려서 나갔다. 그러자 멸절사태의 팔이 마비되는 것 같으면서
손아귀가 몹시 아팠다. 하마터면 장검을 놓칠 뻔 했다. 그녀는
몹시 경악했다. 장무기를 보니, 그는 이 장 밖에 떨어져 있으며
반 토막의 단검을 쥐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이 몇 번의 공방전은 정말 전광석화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멸절사태는 연거푸 여덟 번 쾌초(快招)로 공격하며, 매 초마다
치명적인 악랄한 독수였다. 장무기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구사일
생으로 살아났다. 공격하는 것도 정묘무쌍했지만 피하는 것도 너
무나 놀라왔다. 이 눈깜짝 할 시이에 사람들의 심장이 모두 가슴
밖으로 뛰어 나올 것만 같았다. 도저히 인간의 능력이라고는 믿
어지지가 않았다.

한참 지난 후 그제서야 하늘을 찌르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멸절사태가 말했다.

"병기를 바꾼 다음에 다시 겨루자."

그러자 장무기는 수중의 단검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했다.

'외할아버지가 나에게 준 보검인데, 내가 못쓰게 만들어 버렸으
니 그 노인장에게는 정말 면목 없구나. 이 보검도 막아내지 못하
는데 또 무슨 보검이 의천검의 일격을 막을 수 있을까?'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주전(周顚)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에게 보도 한 자루가 있으니 이걸로 저 늙은이하고 겨루어
봐라. 자 가져가라."

"의천검이 너무나 예리하기에 선배님의 보도도 못쓰게 될지 모
릅니다."

"못쓰게 되면 그만이다. 네가 그녀에게 패하게 되면 우리들의
생명도 그만인데 보도가 무슨 필요 있겠냐?"

장무기가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그러자 다가가
서 보도를 받아 들었다.

양소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장공자, 그대는 필히 속공을 가해야 하오. 다시는 얻어 맞아서
는 아니 되오."

장무기는 그가 자기를 <장공자>라고 부르는 것을 듣자 약간 놀
라와했다. 그러나 즉시 알아차렸다. 양불회가 이미 자기를 알아
보았기에 자연히 그녀의 아버지에게 얘기했던 것이다.

"선배님의 가르침, 명심하겠습니다!"

위일소도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경공을 전개할 때 반 발자국도 주춤해서는 아니 되오."

그러자 장무기는 몹시 기뻐하며 다시 말했다.

"선배님의 가르침, 정말 감사합니다!"

광명사자 양소와 청익복왕 위일소 두 사람의 무공은 멸절사태와
한판을 겨루어도 만만찮은 적수들이지만 애석하게도 원진의 공격
을 당했다. 중상을 입은 후 몸에 지닌 무공은 전혀 전개할 수 없
었었다. 그러나 보는 눈이 있기에 두 사람은 각자 한 가지씩 중
요한 관점을 지적해 준 것이다. 이는 바로 멸절사태가 가진 보검
의 쾌초를 대적하는 중요한 공식과 같은 것이다.

장무기는 몸을 뒤로 돌리면서 말했다.

"사태님, 후배가 공격하겠소."

그러더니 경공을 전개하여 마치 연기처럼 멸절사태의 몸 뒤로
돌아갔다. 그녀가 미처 몸을 돌리기도 전에 좌우로 한 번씩 몸을
흔들더니 바로 한 바퀴 돌고 반대로 다시 한 바퀴 돌더니 연거푸
양도(兩刀)를 후려쳤다.

멸절사태는 검을 눕혀서 막아내고 막 검을 뻗어 출초하려는데
장무기는 이미 어디론지 가 버렸다. 그가 건곤대나이법을 연마하
기 전에도 경공은 멸절사태보다 높았다. 시간이 갈수록 빨랐다.
마치 바람 같기도 하고 번개 같기도 했다. 평소에 경공에 자부심
을 갖고 있는 위일소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는 사방을
돌면서 가까이 다가가서 일검씩 공격했다. 그러나 의천검의 예리
함 때문에 감히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가 공격을 할
때는 멸절사태는 전혀 반격할 기회가 없었다. 그가 수십 바퀴를
돌자 체내의 구양진기가 발동되어 땅을 딛지 않고 마치 비행하는
것처럼 빨랐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게 되자 몹시 불안했다. 이
렇게 나가다간 사부님에게 불리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정현이 소
리치며 말했다.

"오늘은 우리가 마교를 쳐부수려 하는 거지 무공을 겨뤄서 승리
를 따내려는 것이 아니오! 사제, 사매 여러분, 우리가 일제히 다
가가서 저 녀석을 막읍시다. 그가 잔재주를 부리지 못하게 하고
진실한 무공으로 사부님하고 겨루게 합시다!"

그러면서 검을 쳐들고 다가갔다. 그러자 아미파의 남녀 제자들
도 일제히 몰려갔다. 손에는 병기를 들고 팔면방위를 지키고 있
었다. 주지약은 서남쪽에 서 있었다.

정민군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사매, 막아 내든가 피해 주든가는 너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자 주지약은 화가 치밀면서도 부끄러워했다.

"뭣 때문에 나에게만 그러는 것이오!"

바로 이때 장무기는 이미 그들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정민
군이 일검을 찔러 보았으나 장무기가 왼손을 내밀어서 그녀의 장
검을 빼앗아 버리더니 바로 멸절사태에게 던졌다. 그러자 멸절사
태는 검을 휘둘러서 다가오는 검을 두 동강이로 잘라 버렸다. 그
러나 장무기가 던진 힘은 너무나 강경하였다. 비록 감은 부러졌
어도 경력이 울려서 그녀의 손목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주춤하
지 않고 즉시 왼손을 내밀어서 빼앗고, 빼앗은 다음 던져 버렸
다.

아미파의 제자들 중 이번에 서역에 온 사람들은 모두 파에 있는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내밀어서 검을 빼앗으려 해도
전혀 피할 여지가 없었다. 순간 수십 자루의 장검은 흰 빛을 번
뜩거리며 계속 멸절사태에게 날아갔다.

멸절사태는 얼굴에 싸늘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오는 검을 일일
이 잘라 버렸다. 나중에는 오른팔이 시큰거렸다. 그러자 검을 바
로 왼손으로 옮겼다. 그녀의 왼손 검솜씨도 오른손에 못지 않았
다. 얼마 후 아미파 제자들은 모두 빈손이었으나 오직 주지약 수
중의 장검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장무기는 아까 그녀가 자기를 도운 것을 보답하는 것이다. 그러
나 이렇게 되고 보니 그녀의 입장만 난처하게 만든 것이다. 순간
주지약은 얼굴을 붉히며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정민군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사매, 과연 그는 너를 다르게 대하는구나."

이때 아미파의 제자들이 비록 장무기를 막고 있어도 그는 하나
도 거북하게 생각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 가면서 멸절사태의 급소
를 공격해 갔다. 멸절사태는 이미 반격할 수 없는 국면에 놓여
있어서 몹시 초조해하고 있는 판국에 정민군의 말소리가 귀에 전
해 왔다.

"넌 사부님께서 저 녀석의 급공을 당하고 있는 걸 보면서도 어
찌 도우려 하지 않느냐? 넌 손에 검을 쥐고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저 녀석이 사부님을 제압하기를 바라는구나?!"

그러자 멸절사태는 잠시 생각을 굴렸다.

'뭣 때문에 저 녀석이 지약의 검만 뺏지 않았을까? 혹 둘이서
몰래 내통하는 게 아닐까? 내가 한 번 시험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지약, 넌 감히 기사멸조(欺師滅祖)하려느냐?"

말이 끝나자 검을 쳐들고 주지약의 가슴으로 찔러갔다.

주지약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감히 검을 들어올려서 막지 못했
다.

"사부님, 전....."

그녀가 '전'이란 말이 떨어지자 멸절사태의 장검은 이미 그녀의
가슴에 다가왔다.

장무기는 멸절사태가 시험하는 줄 모르고 얼른 몸을 튕겨서 다
가가더니 주지약을 끌어안고 일 장 밖으로 날아갔다.

멸절사태는 오랫만에 주객의 입장이 뒤바뀌어졌다. 즉시 장검을
쳐들고 그의 후심을 똑바로 찔러갔다. 장무기의 내력이 비록 강
해도 한 번도 제대로 경공을 연마한 적이 없어서 위일소같이 사
람을 안고 가볍게 달릴 수는 없었다. 막상 등 뒤의 바람소리를
듣자 할 수 없이 칼을 돌려서 다가오는 검을 막았다. 순간 탕 하
는 소리가 나더니 수중의 보도가 다시 반 토막이 잘려 나갔다.
멸절사태의 장검이 바로 따라서 공격해 왔다. 그러자 장무기는
손을 되돌려서 운경하여 반 토막 보도를 멸절사태에게 던졌다.
이는 구 성(成)의 공력을 사용했기에 멸절사태는 즉시 숨을 죽이
고 땅에 엎드려 피했다. 반 토막 보도는 그녀의 머리위로 스쳐갔
지만 경풍이 너무나 강했기에 그녀의 얼굴을 몹시 아프게 했다.
장무기는 찬스를 포착하자 주지약을 내려 놓지 않고 즉시 앞으로
다가가서 오른손을 뻗어 일장을 후려쳤다. 멸절사태는 오른쪽 무
릎을 땅에 꿇고 있었기에 검을 쳐들어서 그의 손목을 공격했다.
장무기는 후려치는 자세를 잡는 자세로 변하더니 손을 되돌려서
가볍게 의천검을 빼앗았다.

이처럼 순식간에 화강위유(化剛爲柔)하는 수법은 건곤이위심법
의 제 칠 층 신공에 속한다. 멸절사태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해도
상대방의 강맹한 장력이 몸에 기습해 올 때는 절대로 경연한 금
나수법을 막아내지는 못한다.

비록 장무기가 승리를 했어도 멸절사태 같은 막강한 적수에게는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치의 방심도 하지 않
고 즉시 의천검을 그녀의 인후에 갖다 댔다. 혹 그녀가 다시 괴
상한 초수를 펼칠까봐 천천히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주지약은 몸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빨리 날 내려 줘라!"

"아, 네."

장무기는 얼굴을 붉히면서 얼른 그녀를 내려 놓았다. 비록 그녀
의 표정은 두려운 것처럼 보였으나 눈빛은 좋아하는 듯이 나타났
다.

멸절사태는 천천히 몸을 똑바로 일으키더니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주지약을 쳐다보고 다시 멸절사태를 쳐다보더니 얼굴색
은 갈수록 시퍼렇게 변했다.

장무기는 검을 돌려서 검 끝을 잡고 주지약에게 말했다.

"주낭자, 귀파의 보검이니 당신이 존사에게 돌려주시오."

주지약은 고개를 돌려 사부를 쳐다보니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순간 그녀는 잠시 생각을 굴렸다.

'오늘의 국면은 너무나도 난감했다. 장공자가 그처럼 나에게 대
해 줬으니 사부는 필시 나와 그가 무슨 관계가 있는 줄 알 것이
다. 앞으로 나는 아미파의 버려진 제자가 될 것이다. 이 망망한
대지 위에 나더러 어디로 가란 말인가. 장공자가 나에게 잘 대해
주지만 난 절대로 사문을 배반할 수 없다.'

갑자기 멸절사태가 무섭게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약, 일검에 죽여 버려라!"

주지약은 장삼봉을 따라서 무당산에 갔던 해, 장삼봉은 무당산
에 여자가 없어서 모든 일이 불편하다고 하며, 즉시 추천서를 써
주었다. 그래서 멸절사태의 문하에 투입한 것이다. 그녀는 몹시
영특하고 또 어려서 부모가 비참하게 돌아가신 참변을 당했기에
이를 악물고 무예를 닦았다. 그래서 진보가 몹시 빨랐고 사부의
총애도 듬뿍 받고 있었다.

지금까지 칠 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면서 사부의 일언일동(一言
一動)을 그녀는 마치 진리처럼 느껴왔다. 마음 속으로 한번도 위
배하고 또 무시한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이때 사부의 갑
작스런 호통소리를 듣자 엉겁결에 의천검을 받아들고 바로 장무
기의 가슴으로 찔러갔다.

장무기는 그녀가 자기에게 출수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
다. 그래서 전혀 피하려 하지 않았다. 순간 검 끝이 가슴에 와
닿는 걸 느끼자 이미 때는 늦었다. 주지약은 손을 떨면서 생각을
굴렸다.

'내가 정말 그를 죽이려 하는가?'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손목을 약간 옆으로 하고 장검을 살짝 비
스듬히 해서는 척 하고 가벼운 소리를 내더니, 의천검은 장무기
의 오른쪽 가슴을 관통했다.

주지약은 비명을 한 마디 지르며 장검을 뽑아내보니 검 끝이 빨
갛게 물들어 있었고, 장무기의 오른쪽 가슴에는 선혈이 마치 샘
솟듯 했다. 순간 사방에서 놀라는 외마디 소리가 크게 일어났다.
장무기는 손을 내밀어 상처 부위를 눌렀다. 몸을 휘청거리면서
얼굴에는 괴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네가 진정으로 날 죽
이려 했느냐 하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자 주지약이 말했다.

"나..... 나....."

얼른 다가가서 그의 상처를 살펴보고 싶지만 용기가 없었다. 그
러자 그녀는 얼굴을 가리며 뛰어 돌아갔다.

소조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얼른 다가가서 장무기를
부축하며 소리쳤다.

"당신..... 당신....."

그러자 장무기는 소조에게 말했다.

"네..... 네..... 네가 뭣 때문에 날 죽이려 했느냐.....?"

이 일검은 다행히 살짝 빗나가서 심장을 피해갔다. 그러나 우측
폐엽을 상했다. 그가 몇 마디 말을 하더니 폐에 숨을 들이마실
수 없기에 허리를 굽히고 심한 기침을 했다. 그는 중상을 입어서
소조와 주지약을 분간하지 못했다. 선혈이 너무 많이 흘려서 소
조의 상의를 반이나 빨갛게 물들었다.

방관하는 군중들은 육대파나, 명교, 천응교 할것없이 일시에 모
두 조용히 지켜 보기만 했다.

소조는 그를 부축하면서 천천히 앉으며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최고로 좋은 금창약(金創藥)을 갖고 계신 분 있습니까?"

그러자 소림파의 공성신승이 잽싸게 다가가서 품에 있는 약분
한 봉지를 꺼내면서 말했다.

"비파의 옥령산(玉靈散)은 상과의 성약이오."

손을 내밀어서 장무기의 앞가슴 옷을 찢어보자 상처는 무려 몇
치의 깊이에 달했다. 얼른 옥령산을 상처 부위에다 덮었으나 흘
러나오는 선혈에 의해서 약분은 씻기고 말았다. 그러자 공성은
속수무책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태충 부부는 더욱 조급했다. 그들은 금잠충독을 복용한 줄만
알고 있으니 만약에 이 사람이 중상으로 죽게 되면 자기 부부들
은 독을 제거해 줄 사람이 없어서 죽게 되는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자 하태충은 얼른 장무기에게 다가가서 급히 물었다.

"금잠충독은 어떻게 제거하느냐?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하라니
깐!"

소조는 울면서 말했다.

"비켜 서시오. 뭐가 그렇게 바빠요. 장공자가 살아나지 못하면
모두가 죽게 될 것이오."

그래도 하태충은 연신 물어보았다.

그러자 공성이 화를 내며 말했다.

"철금선생, 그래도 비켜서지 못하겠다면 빈승은 가만 있지 않겠
소!"

바로 이때 장무기는 눈을 뜨고 약간 정신을 가다듬더니 왼손 식
지로 자기의 상처 주위에 있는 일곱 군데 혈도를 찍자, 즉시 피
가 흐르는 속도가 늦어졌다. 공성은 몹시 기뻐하면서 옥령산을
다시 그의 상처에 붙여 주었다. 소조는 옷자락을 찢어서 그의 상
처를 감싸주었다.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돼 버리며 전
혀 핏기가 없는 걸 보자, 내심 말할 수 없이 초조하고 두려워했
다.

장무기의 정신이 약간 돌아왔다. 내식(內息)을 암운(暗運)하여
유전(流轉)시켜보니 오른쪽 가슴에 와서 바로 막히는 것이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육대파가 명교 사람을 죽이게 할 수는
없다.'

오직 이러한 생각을 하고 진기를 왼쪽 흉복간에 몇 번 운전(運
轉)하더니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아미, 무당 양파에서 만약에 소인의 조처가 부당하다고 생각되
는 분은 나오셔서 저와 겨뤄 보시죠?"

그가 이같은 말을 하자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멸절사태가 냉
랭하게 말했다.

"아미파는 오늘 패배를 인정한다. 만약에 네가 죽지 않으면 나
중에 다시 계산하자, 우리는 무당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구나.
육대파의 승패는 모두 무당파의 손에 달려 있소!"

육대파가 광명정을 위공(圍攻)해서 공동, 소림, 화산, 곤륜, 아
미 오(五) 파의 고수는 모두 장무기에게 패했지만, 유독 무당 일
파만 아직 그와 겨루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몸에는 중상을
입고 있는 터라 일류 고수는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자 몇 명이
달라붙어서 한동안 싱갱이하면 제풀에 지쳐서 죽을지 모른다. 그
러니 무당오협 중에 어느 한 분이 다가가도 전혀 힘들이지 않고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원래의 계획대로 명교를 섬멸할
수 있다.

그러나 무당파는 예로부터 협의를 매우 중시했다. 그들에게 몸
에 중상을 입은 소년을 상대해서 출수하라 하면 아마 무당오협은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무당파가 출수하지 않는
다면 <육대파위공광명정>이라는 무림의 일대 거사는 너무나 허무
하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육대파는 강호에서 어떻게 얼
굴을 들고 다니겠는가!"

송원교, 유연주, 장송계, 은이정, 막성곡 다섯 사람은 서로 얼
굴만 쳐다볼 뿐 모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갑자기 송청서가 말
했다.

"아버님, 네 분 사숙님, 소자가 그를 요리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유연주가 말했다.

"안 된다. 우리가 너에게 출수하라고 허락하면 우리가 손수 출
수하는 것과 별다를 게 없다!"

장송계가 말했다.

"둘째 형님, 아우가 보기에는 대국이 중요하지 우리 오 형제의
명성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됩니다."

막성곡이 말했다.

"명성은 몸 밖에 있는 물건이오. 단지 우리가 중상을 입은 소년
을 상대해야 하니 양심에 미안할 따름이오."

일시에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다. 각자는 송원교의 눈치를 바라
보면서 그의 지시를 받기로 했다.

송원교는 은이정이 시종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은 분노
해 있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약혼자인 기효부가 명교의 양
소에게 몸을 더럽힌 후 목숨까지 잃은 것이다. 실로 일생일대의
치욕이고 원한이다. 만약에 명교를 섬멸하지 않고 간악음도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의 분노를 어디에다 발설할 것인가. 그러자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교의 잔악무도 하였기에 제악무진(除惡務盡)하여야 하오. 이
거야 말로 우리 협의도(俠義道)의 대절(大節)이오. 명성도 중요
하지만 지금은 큰 일을 택하는 수밖에 없소. 청서, 몸조심 하거
라!"

"네, 알겠습니다!"

송청서는 허리를 굽혀서 대답한 다음, 장무기에게 다가가더니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증소협, 만약 그대가 명교의 사람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여길
떠나가서 상처를 요양해도 좋소. 육대파는 오직 마교의 사도들을
섬멸할 뿐 그대와는 무관하오."

장무기는 왼손으로 상처를 누르며 말했다.

"송형의 호의는 대단히.....대단히 고맙소. 하지만 이몸은.....
이몸은 명교와 동존공망(同存共亡)하기로 작정했소."

그러자 명교와 천응교의 사람들은 모두가 외쳐 댔다.

"증소협, 이쯤 됐으니 그만 두는 게 좋겠소!"

은천정은 완만한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송가야, 노부가 너의 고초(高招)를 받을 수 있게 해다오."

그러나 진기를 끌어올리지 못하여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송청서는 장무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증형, 소제는 대국을 위해서 실례를 범하는 수밖에 없겠소."

소조가 장무기의 몸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나 먼저 죽여라!"

"소조, 걱정하지 마라. 그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당신..... 몸에는 상처가 있잖아요?"

"소조, 당신은 뭣 때문에 이처럼 나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오?"

"그건..... 그건 당신이 날 잘 대해주기 때문이예요."

장무기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내심 생각을 굴렸다.

'설사 내가 지금 죽더라도 진정으로 나를 잘 대해주는 지기(知
己)가 있어서 후회하지는 않겠다.'

송청서는 소조에게 호통쳤다.

"물러서라!"

장무기가 분연히 말했다.

"그대는 이 낭자에게 너무 거칠고 무례하게 대하는구나!"

송청서는 소조의 어깨를 밀어서 몇 걸음 밖으로 물러나게 한 다
음 말했다.

"요녀사남(妖女邪男)들 같으니! 빨리 일어나라!"

장무기가 말했다.

"영존 송대협께서는 천하가 인정하는 군자신데, 각하는 몹시 거
칠구료. 당신 같은 인간하고 싸움을 하는데 일어..... 일어설 것
까지는 없겠소."

사실 그는 내경을 끌어올리지 못해서 일어설 힘이 없는 것이다.
장무기가 중상을 입은 후 허약무력한 상황은 모두가 알고 있었
다. 그러나 유연주가 낭랑한 목청으로 외쳤다.

"청서야, 그의 혈도를 찍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된다. 구태
여 그의 목숨을 상하게 할 것까지는 없다."

"알겠습니다!"

송청서는 대답하고 나서 왼손을 허인(虛引)하더니 오른손을 뻗
어서 장무기의 어깨를 향하여 찍어갔다. 장무기는 꼼짝하지 않았
다. 그의 손가락이 견정혈에 찍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력을 사
인하여 그의 지력을 옆으로 옮겨 버렸다. 그러자 송청서의 인지
는 마치 물 속에 빠진 것처럼 전혀 힘을 가할 곳이 없었다. 너
무 뜻밖에 당한 일이라 몸을 정지하기가 힘들었다. 하마터면 장
무기의 몸을 부딪칠 뻔했다. 순간 몸을 급히 고정시켰으나 그래
도 다소나마 불안정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어서 오른발을 날려 장무기의 가슴을 걷어
찼다. 이 일격은 육, 칠 성의 공력을 사용했다. 비록 유연주가
그 보고 장무기의 목숨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웬지
모르게 그의 마음은 눈앞의 이 소년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
워진 것이다. 아마 이는 주지약에 대한 그의 질투심에서 일어
난 것 같았다.

송청서는 문무쌍전(文武雙全)하여 무당파 제 삼 대 제자중에
서 제일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사람 됨됨이도 의를 편중하
는 외골수였다. 그러나 정(情)이란 걸 부딪치게 되면 감정을
가눌 수가 없었다.

군중이 보기에는 송청서의 이 일격을 장무기가 피하려면 몸을
튕겨서 피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출장하여 받아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일어서기 조차 힘든 판국에 이 일격은 아
마 그의 목숨을 앗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발 끝이 가슴에 닿으려는 찰나 장무기는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살짝 흔들자 송청서의 오른쪽 다리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그의 몸에서 세 치 거리나 빗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이
일격도 헛치고 만 것이다. 송청서는 이런 자세에서 발을 거둬
들일 수 없어서 바로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면서 뒷꿈치로 장무
기의 배심(背心)을 공격하였다. 이 일초는 너무나 빠르고 악랄
하여 누구라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손가락을
다시 살짝 흔들어서 그의 발뒷꿈치 공격을 또 막아냈다.

삼초가 지나자 방관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다고 생각됐
다. 그러자 송원교가 소리쳤다.

"청서, 그의 몸은 전혀 경력이 없다. 그건 네 냥으로 천근을
움직이는 방법이다!"

역시 그의 안목은 대단했다. 그는 장무기가 이미 경력을 전부
상실하였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비록 사용하는 무공이 괴이
하지만 기본 도리는 무학 중에서 차력타력(借力打力)에 불과한
것이다.

송청서는 부친의 깨우침을 받자 갑자기 초수를 바꿔 쌍장을
살포시 후려치면서 공격했다. 이는 바로 무당절학 중의 하나인
면장(綿掌)이었다. 차력타력은 원래 무당파 무공의 근본이었
다. 그가 사용한 면장은 자신의 경력을 사용하는 것 같기도 하
고 안하는 것도 같아서 상대방은 전혀 힘을 빌릴 수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건곤이위신공을 이미 제 칠 층 경지까지 연
마해서 제아무리 면장이 가볍다 해도 역시 유형유경(有形有
勁)했다. 그는 왼손으로 가슴에 있는 상처를 누르고 오른손 다
섯 손가락은 마치 가야금을 연주하듯 갑자기 튕기고 뜯고 하
며, 상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삽시간에 송청서의 삼십 육
초 면장 장력을 모두 막아냈다.

송청서는 내심 몹시 경악했다. 얼핏 고개를 뒤로 돌리자 갑자
기 주지약의 눈빛과 마주쳤다. 그녀가 몹시 염려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자, 그만 가슴에는 시샘과 분노가 엇갈렸다.
그녀가 염려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장무기란 걸 명백히 알고
있었다.

그러자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왼손으로 일장을 후려쳐서 장
무기의 오른뺨을 맹격했다. 오른손으로는 그의 왼쪽 어깨의 결
분혈을 찍어갔다. 이 일초는 화개병제(花開병帝)라고 하는 것
이다. 이름이야 듣기 좋아도 초수는 몹시 예리했다. 양 손을
거둬들인 다음 바로 우장으로 그의 왼뺨을 후려치고 왼손 식지
로 그의 오른쪽 어깨 뒤에 있는 결분혈을 찍어갔다. 화개병제
양초를 일초로 묶어서 연속 사 식을 공격하기를 마치 광풍폭우
처럼 전개했다. 군중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게 되자 일제히 비
명을 지르며 약속한 듯 앞으로 한 발씩 다가갔다.

순간 팍팍 하고 맑은 소리가 두 번 나더니 송청서의 왼손 일
장은 자기의 왼뺨을 후려치면서 오른손 식지는 자기의 왼쪽 어
깨에 있는 결분혈을 찍었다. 바로 오른손 일장은 자기의 오른
뺨을 후려치고 왼손 식지는 자기의 오른쪽 어깨에 있는 결분혈
을 찍었다. 그의 화개병제 사 식을 장무기는 건곤이위 무공으
로 한꺼번에 그의 몸에다 옮긴 것이다. 비록 그의 왼쪽 어깨에
있는 결분혈은 찍혀도 수족은 아직 마비되지 않았다. 그가 나
중의 화개병제 이 식을 전개한 후 그제서야 수족이 마비되면서
꽝 하는 소리가 나더니 뒤로 넘어졌다. 몇 번 몸부림을 쳐보았
으나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자 송원교는 얼른 다가가서 왼손으로 몇 번 주물러서 아
들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의 양쪽 뺨을 보니 몹시 부어 있
었고 손가락자국 다섯 개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비록 상
처는 깊지 않았으나 아들의 성품으로는 죽는 것보다 더 괴로워
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자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손
을 잡아서 본파로 돌아갔다.

이때 사방에서는 환호성이 끊임없이 울렸고 말소리가 몹시 소
란스러웠다. 갑자기 장무기는 입을 벌리더니 몇 모금 선혈을
토해 내면서 상처를 누르고 다시 기침을 하였다. 군중들은 그
를 눈여겨 보면서 몹시 염려했다. 한결같이 똑같은 생각을 하
였다.

'그가 중상을 입은 몸으로 송청서의 급공을 막아내면서 비록
승리는 했으나 내력은 너무나 많이 소모했을 것이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무당파의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무당파가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으
면 다시 사람을 보내서 겨룰지 모두 다 궁금해 하고 있었다.

송원교가 말했다.

"오늘 일에 무당파는 이미 전력을 다했소. 아마 하늘에서 이
괴상한 소년을 보내면서 마인을 섬멸치 못하게 하는 것 같소.
우리가 이대로 물러서지 않으면 명문정파와 마교는 뭐가 다를
게 있겠소!"

유연주가 말했다.

"큰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린 즉시 산으로 돌아가서 사부님
의 가르침을 더 받읍시다. 나중에 무당파가 다시 오게 될 때는
이 소년의 상처도 완쾌될 줄 믿습니다. 그 때 가서 다시 승부
를 가립시다."

그러자 장송계와 막성곡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갑자기 획!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은이정이 장검을 뽑아 들었
다. 두 눈에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장무기에게 칼 끝을 들이대
며 말했다.

"증가야, 난 너와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다. 지금 다시 너를
상하게 하면 나 은이정은 <협의>란 두 글자를 다시는 쓸 수 없
게 된다. 그러나 양소와 나는 바다처럼 깊은 원한이 있어서 나
는 그를 꼭 죽여야 한다. 그러니 물러서라!"

장무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당신들이 절대로 명교 사람을 죽
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난 너부터 죽여야겠구나."

그러자 장무기는 선혈을 한 모금 토해 내면서 희미한 소리로
말했다.

"은육숙(殷六叔), 절 죽여 주세요."

은이정은 <은육숙>이란 말을 듣자 몹시 귀에 익은 듯했다.

'무기가 어렸을 때 나에게 자주 이렇게 불렀다. 그렇다면 이
소년.....?'

자세히 그의 용모를 살펴보니 볼수록 무기와 닮은 것 같았
다. 비록 구 년이나 헤어져 장무기는 어린애에서 건장한 소년
으로 성장해 용모도 매우 달라졌지만, 기억 속의 무기의 용모
가 조금씩 나타났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네가 무기냐?"

장무기의 몸은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자기가 죽어가는 것을 알
고 있기에 더 이상 숨기려 들지 않고 소리치며 말했다.

"은육숙,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은이정은 눈물을 흘리며 장검을 떨어뜨렸다. 얼른 그를 안으
며 소리쳤다.

"네가 바로 무기구나. 네가 우리 다섯째 형님의 아들 장무기
구나!"

송원교, 유연주, 장송계, 막성곡 네 사람도 일제히 무기를 둘
러싸면서 경악과 기쁨이 엇갈리고 있었다. 순간 기쁜 마음이
충만되어 육대문파와 명교의 일은 모두 잊어 버렸다.

은이정이 소리치자 하태충 부부, 주지약, 양소 등 몇 사람은
놀라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
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명교를 보호하려는 소년이 무당파 장취
산의 아들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은이정은 장무기가 혼절하는 걸 보자, 얼른 천왕호심단(天王
護心丹)을 한 알 꺼내 그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를 유연
주에게 안으라 하고 장검을 주워 들고 양소에게 돌진해 가더니
칼 끝으로 그의 목에다 대면서 욕을 했다.

"양가야, 이 개돼지만도 못한 음도야! 내.....내.....!"

그러나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순간 장검을 뻗
쳐서 양소의 가슴을 향해 찔러갔다.

양소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살짝 웃음을 보이더니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갑자기 한 소녀가 달려와서 양소의 몸을 막
고 소리쳤다.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은이정은 검을 멈추고 그 소녀를 자세히 바라본 순간, 그만
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온몸이 싸늘해졌다. 이 소녀의 몸매
며 눈동자는 영락없는 기효부였다. 그가 기효부와 혼인을 약속
한 후부터는 여가가 있을 때마다 항상 기효부의 모습을 회상하
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양소에게 납치돼서 그에게 몸을 버리
고 목숨까지 잃어 버리게 되자 가슴에는 원한으로 사무쳐 있었
다. 갑자기 지금 그녀를 다시 보게 되자 몸이 휘청거렸다.

은이정은 소리치며 말했다.

"효부, 당신..... 당신 죽지.....!"

그 소녀는 양불회였다.

"전 성이 양입니다. 기효부는 저의 어머님이죠. 어머니는 돌
아가신 지 오래 됐습니다."

은이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아, 맞다. 참 나도 멍청하구나. 넌 물러서라. 오늘 난 너의
어머니의 한을 풀어 줄 것이다."

그러자 양불회는 멸절사태를 가리키며 말했다.

"좋습니다. 은육숙, 그렇다면 당신은 저 늙은 비구니를 죽이
세요!"

은이정이 말했다.

"뭣..... 뭣 때문이냐?"

"우리 어머님은 저 늙은 비구니가 일장으로 후려쳐서 죽인거
예요."

"허튼소리 마라. 너 같은 어린애가 어떻게 아느냐?"

그러자 양불회는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그날 호접곡에 있을 때, 저 늙은 비구니가 우리 어머님을 시
켜서 우리 아버님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님이 말을 듣지
않자 늙은 비구니는 우리 어머님을 타사(打死)했습니다. 제가
직접 목격했고 장무기 오빠도 목격했습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
시겠다면, 직접 저 늙은 비구니에게 물어보세요."

은이정은 멸절사태에게 고개를 돌려 의문스런 표정으로 물었
다.

"사태, 말해 주시오, 기 낭자는....."

"그렇소. 그처럼 염치를 모르는 인간을 뭣 때문에 세상에 남
겨 놓겠소. 그녀는 양소와 정을 통하고 그녀는 죽음을 무릅쓰
고 사문을 배반했고, 사부의 명을 거역하면서까지 그 음도 악
적(淫徒惡賊)을 죽이려 하지 않았소. 은육협, 당신의 체면 때
문에 난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소. 흥, 그러한 여자를 당신은
뭣 때문에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난 믿을 수 없소, 난 믿을 수 없소!"

"그렇다면, 당신은 저 여자아이의 이름을 물어 보시오."

"내 이름은 양불회예요. 어머님께서는 그 일을 영원히 후회하
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탕! 하고 소리가 나더니 은이정은 장검을 떨어뜨리고 말았
다. 순간 그는 몸을 뒤로 돌리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산
밑으로 질주했다. 그러자 송원교와 유연주는 크게 소리쳤다.

"여섯째 아우! 여섯째 아우!"

그러나 은이정은 대답도 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갑
자기 실족을 하여 한 번 넘어지더니 바로 일어나 눈깜짝할 사
이에 그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와 기효부의 일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 십여 년이 지
난 지금에도 그가 이처럼 상심하는 걸 보자, 모든 사람들의 마
음도 착잡했다.

이때, 송원교, 유연주, 장송계, 막성곡 네 사람은 각각 사각
에 나누어 앉았다. 각자 일장을 내밀어서 장무기의 가슴, 복
부, 등, 허리 네 곳에 있는 대혈(大穴)을 누르면서 일제히 내
력을 운용하여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사 인의 내력이 장
무기의 체내로 투입되자, 즉시 그의 체내에서 한 줄기 강한 흡
인력이 사 인의 내력을 계속 빨아들였다. 순간 네 사람은 몹시
놀랬다. 이처럼 빨아들이면 한 두 시간만 지나면 자기들의 내
력은 모두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이 걸려 있
는 판국인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
가! 잠시 후 장무기는 천천히 눈을 뜨고 외마다 소리를 질렀
다. 송원교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그의 장심에 한줄기 아주
따스한 열력이 전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구양신공이 응화
(應和)를 일으키면서 네 사람의 체내로 내력을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송원교가 소리쳤다.

"안 된다. 너 자신을 정양하는게 급하다!"

네 사람은 급히 철장(撤掌)하며 일어섰다. 그러나 마치 한줄
기 흐르는 물이 온몸을 스치는 것처럼 말할 수 없이 편안한 느
낌이었다. 이는 그가 흡입한 내력을 네 사람에게 돌려 주면
서, 동시에 그의 체내에 있는 구양진기로 네 사람의 내공을 더
욱 강하게 해준 것이다. 송원교 등 네 사람은 서로 번갈아 쳐
다보면서 내심 놀라워했다.

이때 장무기의 외상은 여전히 심했으나 내식(內息)은 이미 자
유롭게 운전되었다. 무기는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송대백, 유이백, 장사백, 막칠숙, 조카의 무례를 용서하시
오. 태사부님께서는 옥체 안녕하십니까?"

유연주가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안녕하시다. 무기야, 너..... 너 많이 컸구
나.....!"

백미응왕 은천정은 생명의 은인이 자기의 외손자란 걸 알고
몹시 기뻐했지만, 끝내 일어서지는 못했다.

멸절사태는 얼굴을 붉히면서 손을 흔들고 나서 아미파 제자들
을 이끌고 하산했다. 주지약은 고개를 숙이고 몇 걸음 옮겼으
나 끝내 참지 못하고 돌아서서 장무기를 바라보았다. 마침 장
무기도 그녀의 뒷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자 주지약의 창백한 얼굴에는 금새 붉은 구름이 끼인 것
같았고, 눈빛은 마치 내가 당신에게 그처럼 중상을 입혀서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 부디 몸조심 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장
무기도 마치 그녀의 의사를 아는 양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주지약은 금방 밝은 얼굴을 하며 고개를 돌려 얼른 일
행을 뒤쫓아갔다.

무당파와 장무기가 서로 알아보고, 더구나 아미파까지 떠났으
니, 육대문파가 마교를 섬멸하는 일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공
동, 화산 양파도 사상자들을 끌고 곧 떠나버렸다.

하태충이 앞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젊은이, 당신들의 친인(親人)이 알아 본 것을 축하하오."

장무기는 그가 말하는 걸 기다리지 않고, 품에서 피장기와 거
수악 환약을 두 개 꺼내더니 그에게 주면서 말했다.

"하태충 부부께서는 각자 한 일씩 복용하시면 금잠충독을 제
거할 수 있을 것이오."

하태충은 환약을 받아들고 보니 거무스름한 게 아주 볼품이
없었다. 이걸로 천하 제일의 극독인 금잠충독을 제거할 수 있
다는 걸 믿지 않았다. 장무기가 다시 말했다.

"소인이 제거된다고 말했으니 부디 믿어 주시오."

'설사 그가 날 속인다 해도 무당 사협이 곁에 있는데, 어찌
그를 협박하여 진짜 약을 달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소림파의
저 공성 중놈도 이녀석을 보호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오
늘은 이대로 물러나는 게 좋겠다.'

순간 그는 억지 웃음을 띄며 말했다.

"대단히 고맙소."

말을 마친 그는 반숙한과 환약을 하나씩 복용한 후, 제자들을
지휘해 죽은 자의 시신을 정리하고 하산하였다.

유연주가 말했다.

"무기야, 넌 중상을 입어서 하산할 수가 없으니 여기서 요양
하는 수밖에 없겠다. 우리는 여기 남아서 널 돌봐주지 못하겠
구나. 부디 하루속히 완쾌되어서 무당산으로 한 번 오너라. 그
래야 사부님께서도 기뻐할 게 아니냐?"

장무기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는 많은 걸
물어보고 싶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의 연약한
표정을 보자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갑자기 소림파 중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원진사형의 시신이 안 보인다!"

막성곡은 호기심이 일어 얼른 다가가 살펴보니, 칠, 팔 명의
소림승들이 본문의 전사자 법채를 수습하고 있는데 유독 원진
의 시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원음은 명교의 무리들을 가
르키며 큰 소리로 호통쳤다.

"우리 원진사형의 법채를 빨리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불을
질러서 모두 태워 죽이겠다!"

주전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정말 우습고 괴이한 일도 다 있구나. 너처럼 살
이 있는 중놈도 우리는 필요하지 않은데, 죽은 화상이 무슨 쓸
모가 있겠느냐? 그를 소나 돼지처럼 잡아먹기라도 할 수 있느
냐?"

소림의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즉시 십여 명의 승인이
사방으로 수색해 보았으나 역시 원진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
다. 얼마 후 소림과 무당 양파 사람들은 모두 하산하였다. 장
무기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허리를 굽히며 전송했다.

송원교가 말했다.

"무기야, 오늘의 일전에서 넌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명교로서
는 태산 같은 은혜를 입은 것이다. 앞으로 명교는 네가 충고를
많이 해줘서 명문정파로 인도하기 바란다."

"소자, 사백님의 교훈을 헛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장송계가 말했다.

"부디 몸조심하고 항상 잔악한 소인배들을 조심해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무당 사협과 무기는 오랫만에 만났는데 또다시 헤어지게 되
니, 다섯 사람은 모두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양소와 은천정은 육대파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리자 서로 얼
굴을 마주 보다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명교와 천응교의 전체 교중들은 장대협의 호교 구명의 대은
을 감사드리는 바이오."

삽시간에 사람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그러자 장
무기는 어쩔 줄 몰랐다. 더구나 그 중에는 외할아버지, 외삼촌
같은 사람들도 있기에 얼른 무릎을 꿇고 답례를 하였다. 그는
급히 무릎을 꿇는 바람에 가슴의 상처가 파열되어 선혈을 몇
모금 토해 내면서 즉시 기절해 버렸다.

소조가 얼른 다가가서 일으켰다. 그러자 명교 중에서 부상을
입지 않은 두목 두 사람이 그를 들어서 침대에다 눕혀 주었
다. 양소가 말했다.

"빨리 장대협을 나의 방으로 모셔가서 정양토록 해드려라."

그 두 목 두 명은 허리를 굽혀 대답한 후, 장무기를 양소의
방으로 데리고가 눕혔다.

소조가 양불회의 앞을 지날 때 양불회는 냉랭한 말투로 말했
다.

"소조, 넌 잘도 흉내내는구나. 난 벌써 알고 있었다. 단지 너
처럼 못생긴 것이 천교백미(千嬌百媚)한 미인일 줄은 정말 뜻
밖이다."

소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요 며칠 동안 명교도들은 상처를 치료하느라고 몹시 분주하였
다. 지옥같은 대전을 치르고 난 그들은 모두들 한 번씩 반성해
보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들은 한결같이 장무기의 상처를 염
려하며 누구도 얽히고 설킨 원한 관계를 언급하지 않았다.

비록 검상은 심했지만 장무기는 이미 구양신공을 수료한 터라
칠, 팔 일 정도 정양하게 되자 상처는 차츰 아물어갔다. 은천
정, 양소, 위일소, 설불득 등은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매일
사람들에게 들려서 장무기를 방문했다. 그가 날이 갈수록 회복
이 순조롭자 모두들 몹시 기뻐했다.

팔 일째 되던 날 장무기는 일어나서 앉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도 양소와 위일소는 문병을 오자 장무기가 물어 보았다.

"두 분께서 당하신 현음지(玄陰指)는 좀 어떠하십니까?"

양, 위 두 사람은 날로 증세가 더욱 심해져 뼈를 깎는 듯이
아팠지만, 그가 걱정을 할까 봐 많이 좋아졌다고 거짓말을 했
다. 장무기는 두 사람의 얼굴에 흑기가 서려 있고 말할 때도
기력이 없는 걸 보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저의 내력이 육, 팔 성(成)이나 회복했으니, 제가 두 분을
치료해 보겠소."

그러자 양소가 급히 말했다.

"아직은 안되오. 나중에 그대가 완쾌된 다음에 치료해도 늦지
않소. 만약에 힘을 많이 써서 상처가 다시 재발되는 날에는 우
리의 마음이 더 괴로울 것이오."

위일소도 말했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소. 장대협께서 귀채를 정양하는 일
이 더 시급합니다."

"저의 외할아버지인 백미응왕과 의부 사왕은 두 분하고는 같
은 항렬입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는 저의 선배입니다. 그런데
어찌 저에게 <대협>이라고 칭하십니까? 다시 그렇게 부르신다
면 저는 절대로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양소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장래에 모두 그대의 부하가 되고 그대의 앞에서는 감
히 앉을 수도 없는데, 무슨 선배 평배를 따지겠소?"

장무기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양백백, 뭐라고 하셨습니까?"

위일소가 말했다.

"장대협, 이명교 교주의 중책을 당신이 맡지 않으면 누가 그
중책을 맡겠소?"

장무기는 양손을 마구 흔들면서 말했다.

"그러한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때 동쪽 멀리에서 호각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다. 이는
바로 광명정 산하에 경계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양소와 위일
소는 깜짝 놀랐다.

"육대문파가 다시 돌아온 게 아닐까?"

양소가 말했다.

"어제 잡수신 인삼은 괜찮지요? 소조, 네가 약실로 가서 인삼
을 더 꺼내와서 장대협에게 달여드려라."

서쪽, 남쪽에서 동시에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가 물었
다.

"외적의 침공입니까?"

"본교와 천응교에도 고수가 많으니 장대협은 안심하시오."

순식간에 호각소리가 가까와졌다.

"제가 나가서 지시를 할 것이니, 위형은 장대협과 여기에 계
십시오. 허허, 명교가 약해지니까 아무나 와서 넘보려 하는구
나."

그는 비록 상처를 입어 움직일 수 없었지만, 말 속에는 여전
히 호기(豪氣)가 충만했다.

장무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림, 아미 같은 명문정파들은 절대로 신의를 저버리고 다시
오지는 않는다. 온 자들은 분명 잔악한 무리들일 것이다. 광명
정의 모든 고수들은 중상을 입었다. 이 칠, 팔 일 동안에 한
사람도 완쾌된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절대로 외적을 막아낼
수 없다. 만약에 이대로 출전하게 되면 목숨만 헛되이 버리는
꼴이다.'

갑자기 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나더니 한 사람이 문을 박
차고 들어왔다. 얼굴은 피투성이고 가슴에는 단도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적들이 삼면에서..... 산 위로 공격..... 형제들이 적을 막
지..... 못해서....."

위일소가 물었다.

"어떤 자들이냐?"

그 자는 밖을 가리키며 말을 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앞으로
넘어지더니 그대로 죽고 말았다.

곧이어 호각소리가 여기저기서 몹시 다급하게 들려왔다. 또다
시 두 사람이 실내로 뛰어들었다. 맨 처음 들어온 자는 홍수기
의 장기부사였다. 그의 온몸은 피로 목욕한 것 같고 안색은 마
치 귀신 같았다. 그래도 안간힘을 다해 침착한 자세로 살짝 몸
을 구부려 아뢰었다.

"장대협, 양좌사, 위법왕님, 산 밑에서 공격해 오는 건 거경
방, 해사파, 신권문의 인물입니다."

양소는 콧방귀를 한번 뀌더니 말했다.

"그런 오합지졸들이 감히우리를 넘보려 하느냐?"

"적들은 대단치 않지만 우리 형제들 대다수가 상처를 입고 있
어서....."

그가 여기까지 말을 하자 냉겸, 철관도인 장중, 팽영옥, 설불
득, 주전 등 오산인이 각각 사람에게 들린 채 들어왔다.

주전은 식식거리며 큰 소리로 소리쳤다.

"개방 이놈들, 잘 놀고 있구나. 우리 명교가 힘이 없는 틈을
타서 삼문방과 무산방을 끌어들여서 공격해 오는구나. 나 주전
이 숨을 쉬고 있는 동안은 그들과 영원히....."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은천정 부자가 지팡이를 짚고 들어
왔다.

은천정이 말했다.

"무기야, 너는 잠을 자거라. 제기랄! 그 <오봉도>와 <당혼
창> 같은 작은 문파들이 감히 우리를 어떻게 하겠느냐?"

이들 중에서 양소가 명교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고, 은천정
은 천응교의 교주고, 팽영옥은 지계(智計)가 제일 풍부했었
다. 이 세 사람은 평생 동안 수많은 풍파를 만났어도 항상 슬
기롭게 헤쳐나가서 기사회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눈앞에 닥
친 정세는 실로 절벽에 부딪친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은 중상을
입었으며 적은 대거 공격해 왔다. 다른 방회나 문파들은 별거
아니지만 개방은 강호에서 제일 큰 방이다. 방내에 고수들이
구름 같이 많아서 그 위세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러니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모
두는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장무기를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
기 기계(奇計)를 생각해 내서 이 위기에서 모면해주기를 바라
고 있었다.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그는 자기의 무공이 양소, 외
할아버지, 위일소들보다 높은 줄은 알고 있지만, 견식계모(見
識計謀)로 따지자면 그 고수들이 당연히 그보다는 높았다. 그
들조차 별 대책이 없는데 자기가 또 무슨 대책이 있겠는가! 한
참 망설이고 있던 장무기는 순간적으로 뭔가 생각난 듯 소리치
며 말했다.

"빨리 비도(秘道)에 들어가서 잠시 적을 도피하면 적들은 우
릴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발견되더라도 금방 공격해
들어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장무기는 이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웬지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 도무지 찬성하지 않았다. 마치 이
방법을 절대로 행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자 장무기
는 다시 말했다.

"대장부는 굽힐 땐 굽힐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잠시 피신
을 하자는 것은 상처가 완쾌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적들과
승부를 겨루자는 것이니,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양소가 말했다.

"장대협 말대로 이 방법이 묘책입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소조에게 다시 말했다.

"소조, 넌 장대협을 부축해서 비도로 들어가거라."

"여러분들도 함께 갑시다."

"먼저 가시오. 곧 뒤따라서 가겠소."

장무기는 그의 말투에서 그들은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는 걸
느꼈다. 단지 자기만 피신시키려는 게 분명했다. 그러자 낭랑
한 소리로 말했다.

"선배 여러분, 전 비록 귀교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대로 귀교
와 일장 환난을 함께 겪었으니, 생사지교(生死之交)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여러분들을 버려두고 혼자 피신
하겠습니까? 제가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는 줄 아십니까?"

그러자 양소가 말했다.

"장대협은 오해하고 있는 것이오. 명교에는 역대로 전해 내려
온 엄한 규칙이 있소. 이 광명정의 비도는 교주 말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소. 들어가는 자는 죽음만 있을 뿐이오. 당신과
소조는 본교에 속하지 않으니 그 규칙을 지킬 필요는 없소."

이때 사면 팔방에서는 죽이라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다행히 광명정의 도로가 꼬불꼬불하고 지세가 험한데다가 도처
의 관문에는 철갑(鐵閘) 석문이 있었다. 비록 명교에서 맹렬하
게 저항하지는 못해도 공격자는 쉽게 다가올 수 없었다. 더구
나 명교의 이름이 평소에 널리 퍼져 있어서 기습해 온 적들은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감히 깊숙하게 파고들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 발씩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피하지 않는다면 아마 명교의 사람들은 한 시간 내에
모두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장무기는 이러한 생각이 들자 즉시 입을 열었다.

"비도에 들어가지 못하는 규칙은 절대로 변경할 수 없는 것입
니까?"

그러자 양소는 엄숙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 제 4 권 6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4 권


제 7 장 천응교(天鷹敎)의 반본귀종(返本歸宗)


"여러분들은 내 말을 들으시오. 장대협은 무공이 개세(蓋世)하
고 의박운천(義博雲天)하여 본교에게는 끊을 수 없는 대은을 베
풀었소. 우리는 장대협을 본교의 제 삼십 사 대 교주로 추대 합
시다. 만약에 교주의 명이 있으면 사람들을 호령하여 비도로 들
어가게 할 수 있을 것이오. 교주의 명을 준수하는 건 규칙에 어
긋나는 게 아니오."

양소, 은천정, 위일소 등은 벌써부터 장무기를 교주로 추대하고
자했던 터라 막상 팽화상이 말을 듣자 모두들 찬성했다.

장무기는 얼른 손을 흔들며 말했다.

"소자는 젊고 무식하고 무덕무능(無德無能)한데, 어찌 그같은
중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의 사부 장진인께서도 제
게 명하기를 명교에 가입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은천정이 말했다.

"나는 너의 외할아버지다. 내가 너보고 명교에 가입하라고 하겠
다. 설사 외할아버지가 너의 태사부보다는 못하지만 다 비슷비슷
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니 나와 장진인의 말은 모두 못 들은 걸로
하면 되지 않느냐? 명교에 가입하든 안 하든 간에 그건 네 자신
이 결정해라."

은야왕이 말했다.

"외삼촌을 하나 더 보태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옛
말에도 외삼촌을 보면 어머니를 본 것 같다고 했다. 너의 어머니
가 안 계시니 나는 마치 너의 친어머니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장무기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말을 듣자 내심 괴로웠다.

"왕년에 양교주님께서는 한 통의 유서를 남겨 놓았습니다. 제가
비도에서 갖고 나왔는데, 여러분들의 상처가 완쾌된 다음에 보여
드리려고 했습니다. 양교주님의 유명(遺命)은 저의 의부인 금모
사왕에게 교주의 자리를 물려 주셨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품안에 있는 그 유서를 꺼내 양소에게 건네주
었다.

팽영옥이 말했다.

"장대협, 대장부의 신변에 큰일이 닥쳤을 때는 작은 귀절에 급
급할 수 없소. 사사왕은 당신의 의부이니 마치 친부와 같은 것이
오. 예로부터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고 합니다. 사사왕께
서는 여기에 안 계시니, 당신이 양교주님의 유언을 따라 교주의
존위를 승계하시오."

"옳소! 옳소!"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장무기는 살성(殺聲)이 점차 가까이 들려오자 내심 다급한 나머
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사람을 구하는 게 시급하다. 다른 일은 천천히 상의해
도 된다.'

장무기는 이런 생각을 하자, 즉시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의 의사가 그러하니, 소자가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명교의 대죄인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소자 장무기가 잠
시 명교 교주의 직위를 승계하면서 오늘의 난관을 헤쳐 나가겠으
니, 다음에 여러분들은 다른 현능(賢能)을 선택 하십시오."

그러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비록 대적이 가까이
다가오고 화가 눈앞에 닥쳐왔지만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
르며 모두들 기뻐했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즉시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은천정과 은야왕은 비록 존친(尊親)이었지만 예외 될
수 없었다.

그러자 장무기는 얼른 무릎을 꿇고 답례를 하면서 말했다.

"여러분들 일어나십시오. 양좌사님, 당신이 호령을 전하십시오.
본교의 상하 모든 사람은 일제히 후퇴해서 비도로 들어가라고 하
십시오."

"네, 교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교주님께 아뢰오, 우린 열화
기에게 불로 적을 막으라 명하였는데, 그들은 광명정에 있는 가
옥을 모두 태우고 말았소. 적은 우리가 도주한 줄 알고 있소. 어
찌 하면 좋겠소?"

"이 계책은 아주 묘합니다. 양좌사께서 명을 전하시오. 이 방법
은 왕년에 주장령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계책 자체는 본시 좋은
건데, 그는 이 방법으로 나를 기만했던 것입니다."

양소는 즉시 명령을 하달했다. 각처를 수비하고 있는 교도들을
철수시키고 홍수와 열화기에게 명하여 뒤를 차단하라고 했다. 그
리고 나머지는 각자 비도로 후퇴하라고 명했다. 명교는 주인 입
장이고 천응교는 손님 입장이므로, 천응교의 교중을 먼저 후퇴하
라고 명했다. 따라서 천지풍뢰 사문과 광명정에 있는 사람들과,
예금, 거목, 후토 삼기, 그리고 오산인과 위일소 등도 선후로 후
퇴해 들어갔다. 장무기와 양소가 퇴입한 지 얼마 후 홍수기 사람
들이 나누어서 들어오자 동서 양면의 불빛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불길은 타오를수록 왕성했다. 열화기의 사람들은 손에 분통(噴
筒)을 들고 끊임없이 서역의 특산인 석유를 분사했다. 그러자 공
격해 온 각 문파의 사람들은 불이 무서워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는 못했다. 단지 사방을 몇 겹으로 포위해서 명교 사람이 빠져나
가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열화기 사람들이 비도에 들어가고 곧
이어 철문을 잠그어 버리자, 가옥들이 쓰러지면서 비도의 입구를
화염 밑으로 감추어 버렸다. 이 화재는 계속 이틀 밤낮을 타도
꺼지지 않았다. 광명정은 명교의 청단으로서 백여 년의 역사와
함께 수백 칸의 아름다운 청당 가옥들이 모두 초토로 변해 버린
것이다.

공격해 온 적들은 불길이 약해지자 화장으로 다가가 뒤적거리며
수색해 보았다. 많은 명교도의 전사자 시체들을 발견했지만 모두
가 얼굴을 식별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명교도들이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택해서 모두 자진한 줄 알고 있었다. 양소, 위일소 등도
모두 화장 안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천응교와 명교 사람들은 비도의 지도가 지시한 대로 나누어서
석실에 입주했다. 그곳은 깊은 지하였기 때문에 비록 위에는 큰
불이 활활 타고 있었지만 비도 안에는 전혀 아무런 소리도 들리
지 않고, 또 하나도 더운 느낌이 없었다. 사람들은 충분한 양식
과 물을 휴대하였기에 한두 달은 나가지 않아도 굶어 죽거나 목
말라 죽을 염려는 없었다. 명교와 천응교의 사람들은 이 비도가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성지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 교
주의 은전으로 들어와서 피난하게 되니 어느 누구도 감히 함부로
떠들거나 행동하지 못했다.

양소 등 수뇌급 인물들은 모두 양정천의 유해 옆에 모여서 장무
기가 어떻게 양교주의 유서를 발견하고 어떻게 건곤이위심법을
연성하게 되었는지를 듣고 있었다. 그는 말이 끝나자 심법을 기
록해 놓은 양피지를 양소에게 넘겨 주었다. 양소는 받지 않고 허
리를 굽히며 말했다.

"양교주님의 유서에 분명히 적혀 있소. <건곤이위심법은 잠시
사손이 보관하고 있으니 나중에 신교주에게 전송하여라> 그러니
이 심법은 당연히 교주님께서 보관하시오."

그러자 사람들은 양정천의 유서를 돌려보면서 모두들 개탄하며
말했다.

"양교주님 같은 인물이 부부의 정 때문에 목숨을 잃을 줄 몰랐
소. 우리가 만약에 진작 이 유서를 보게 되었더라면 오늘 같은
비참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오."

모두는 죽음을 같이한 동료가 참변을 당하는 것과 자신들이 비
참하게 도망다니는 걸 생각하자 모두 이를 갈면서 성곤에게 욕을
했다.

양소가 말했다.

"그 성곤은 비록 양교주 부인의 사형이고, 금모사왕의 사부였지
만, 우리는 전에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소. 그러니 그 사람
은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겠소? 수 십년 전부터 그는 본교
를 섬멸하려고 작심하였던 것이오."

주전이 말했다.

"양좌사, 위복왕, 당신들은 모두 그의 계략에 빠져들었는데도
전혀 느끼지 못했으니 정말 무능하구료."

그는 은천정까지 함께 말하려 했지만, 교주의 체면을 생각해서
<백미응왕> 네 글자를 도로 삼켜 버렸다. 그러자 양소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 성곤 악적은 결국 야왕 형의 장력에 죽고 말
았다."

열화기의 장기사는 이를 갈며 말했다.

"성곤, 그 악적은 그렇게 큰 죄악을 범했는데, 어찌 그처럼 곱
게 죽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토론을 끝마치고 나누어 앉아서 내력으로 상처를 치료
했다.

비도에서 칠, 팔 일이 지나자 장무기의 검상은 거의 완쾌되었
다. 그러자 그는 외상을 입은 형제들을 치료해 주었다. 비록 약
품은 많이 부족했으나 그의 침술과 마사지 기술은 그야말로 착수
성춘(着手成春)이었다. 사람들은 단지 이 소년 교주의 무공의 깊
이를 측정할 수 없는 줄만 알았는데, 그가 의도에도 이처럼 깊은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치 왕년의 <접곡의선> 호청우가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장무기의 검상은 완쾌되었다. 즉시 구양신
공을 운용하여 양소와 위일소, 그리고 오산인에게 체내에 있는
현음지의 한독을 몰아내 주었다. 삼 일 동안에 여러 고수들은 내
상이 모두 완쾌되었다. 한결같이 의기풍발(義氣風發)하여 비도를
박차고 나가서 공격해온 적을 모조리 토벌하려고 했다. 그러자
장무기가 말했다.

"여러분들의 상처는 이미 완쾌되었으나 내력은 아직 부족하오.
이왕 많은 날을 참아왔으니 며칠만 더 기다려 주시오."

이 며칠 동안 모든 사람들은 열심히 내공을 연마하였다. 무공이
얕은 사람은 도검을 갈고, 무공이 깊은 사람들은 연기운경(練氣
運勁)하였다. 육대문파가 광명정에 위공(圍攻)해 올 때부터 명교
는 시종일관 매를 맞고 모욕을 당했다. 그러니 그 원한이 얼마나
뼈에 사무쳐 있겠는가.

그날 밤 양소는 명교의 교의종지(敎義宗旨), 교도들에게 역대로
전해 내려온 규칙이며 각지에 있는 명교의 지단(支壇)의 세력,
교도들의 수요(首要) 인물의 재능, 성격 등등을 하나하나 장무기
에게 상세히 아뢰었다.

찰랑찰랑하는 쇠사슬 소리가 들리더니 소조가 쟁반에 차 두 잔
을 갖고 왔다. 장무기가 말했다.

"양좌사, 근래 이 어린 낭자는 별다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
니 사슬을 풀어 주어서 그녀를 놓아 주시오."

"교주님의 명이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즉시 양불회를 불러 말했다.

"불회야, 교주님께서 분부하셨으니 네가 소조의 사슬을 풀어 주
어라."

"그 열쇠는 제 방에 있는 서랍에 있는데, 미처 갖고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그럼 됐소. 열쇠는 불에 타지 않으니 얼마든지 다시 쓸 수 있
소."

양소는 딸과 소조가 물러나간 후 다시 말했다.

"교주님, 소조란 계집은 비록 나이는 어려도 몹시 이상한 아이
입니다. 그녀에게 약간의 경계는 하는 게 좋겠소."

"저 작은 낭자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반 년 전, 불회하고 하산하여 놀러다니는데 그녀 혼자 사막에
서 두 구의 시체 앞에서 울고 있는 걸 보게 되었소. 우리가 다가
가서 연유를 묻자, 그녀는 죽은 사람이 자기의 부모라고 했소.
그녀의 아버지는 중원 사람인데 관부에게 잘못보여 일가구가 종
군하며 서역까지 오게 되었소. 며칠 전에 몽고 관병의 등살에 못
이겨서 도망나왔는데, 결국 그녀의 부모는 상발력진(像發力盡)되
어 한꺼번에 죽게 된 것이오. 난 그녀가 어린 나이에 홀로 된 것
도 안쓰러웠고, 비록 용모는 추악해도 말하는 것은 둔하게 보이
지 않아서 그녀의 부모를 묻어 주고 나서 그녀를 데리고 와 불회
의 시중을 들라 하였소."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조의 부모는 모두 돌아가셨구나. 가련한 신세가 나와 똑같
군.'

양소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소조를 데리고 광명정에 돌아온 후, 하루는 내가 불회
에게 무예를 가르치고 있는데 소조도 옆에서 듣고 있었소. 그런
데 내가 육십 사 괘(卦) 방위(方位)를 설명해 주고 있을 때, 불
회는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소조의 눈빛은 이미 정확한 방위를
쳐다보고 있었소."

"아마도 그녀의 머리가 영특하여 깨우침이 불회 누이보다는 조
금 빠른 게 아닙니까?"

"처음에 저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몹시 기뻐했지요. 다시 생각해
보니 의심이 가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불회에게 가르치지 않은
어려운 구결(口訣) 몇 마디를 하면서 일부러 방위를 틀리게 말을
하자 그녀는 이마를 약간 찌푸리며 나의 틀린 점을 발견한 것이
오. 그 후부터는 난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소. 이 어린 낭자가 필
시 어떤 고인의 전수를 받고 몸에 상승무공을 지니고 있으며, 광
명정에 오게 된 것은 무슨 목적이 있다고 생각되었소."

"혹시 그녀의 부친이 역리(易理)를 정통하였고, 그건 가전비학
인 줄도 모르지 않소?"

"문사가 배운 역경은 무공 안에 있는 역리와는 다른 곳이 많습
니다. 만약에 소조가 배운 게 그녀의 부모에게서 전수받은 것이
라면 그녀의 부모는 필시 무림에서는 일류 고수일 텐데, 어찌 몽
고 관병의 등살에 못 이겨서 죽게 되었겠소? 그 때는 그냥 지나
치고 며칠 지난 후에야 그녀의 부모 이름과 신세를 물어 보았소.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전혀 흔적을 보이지도 않
았소. 난 화를 내지 않고 단지 불회에게 몰래 살펴보라고 당부하
였소. 하루는 내가 우스운 얘기를 했는데 불회가 깔깔대며 크게
웃자 옆에서 듣고 있던 소조도 참다못해 웃어 버렸소. 그 때 그
녀는 우리 부녀 두 사람의 등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녀를 볼 수 없는 줄 알았던 모양이오. 마침 불회는 수중에 비수
한 자루를 갖고 있었는데, 그 비수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비추어
주었던 거지요. 그런데 그녀는 불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소. 그
런데 내가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그녀는 즉시 눈을 이상하게 하고
입이 비틀어진 괴상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소."

장무기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온종일 그런 괴상한 모습으로 위장하려면 정말 어려운 일일 텐
데요?"

양소는 다시 말했다.

"그래도 난 참고 말을 하지 않았소. 하루는 모두 잠들고 조용한
밤에 난 살며시 딸아이 방에 가서 소조의 행동을 염탐하였는데,
그 계집애가 마침 불회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소. 그녀는 동쪽에
있는 가옥을 지나면서 뭘 찾고 있었소.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
여 그녀에게 다가가서 뭘 찾고 있는지, 누가 보내서 광명정에 잠
복하였는지를 물어 보았소. 그녀는 몹시 침착해 전혀 당황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자기를 보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단지 여기저기
놀러다니는 걸 즐길 뿐이며 호기심 때문이라고 했소. 난 여러 방
법으로 호통을 쳐보고 유도를 해 보았으나, 그녀는 시종일관 엉
뚱한 소리만 하고 있었소. 그래서 난 그녀를 칠 일 동안 굶기면
서 캐물었으나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소. 그래서 난 교중에서 옛
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 현철(玄鐵) 사슬로 그녀를 묶어 버린 것
이오. 그녀가 행동할 때마다 찰랑찰랑 소리가 나니까, 몰래 불회
를 해칠 염려를 없게 한 것이오.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는 이유
는 그녀의 내력을 알아 내기 위함이오. 교주님, 그 계집은 적이
보내온 염탐꾼이 틀림없을 것이오. 그녀가 팔괘방위(八卦方位)에
정통한 걸 보면 곤륜파가 아니면 바로 아미파일 것이오."

장무기는 웃으면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우리 모두 지하 감옥에서 오랫 동안 갇혀 있었으니, 이제 나가
볼 때도 된 것 같소."

"당장 나갈 것입니까?"

"상처가 완쾌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완쾌된 사람들만 모두 나갑시다. 좋습니까?"

양소가 나가서 명을 하달하자 비도에는 즉시 환호성이 우뢰 같
았다.

사람들이 비도에 들어올 때는 양불회의 방으로 들어왔지만, 나
갈 때는 뒷산으로 통하는 옆문으로 나갔다. 장무기는 맨 먼저 나
가 문을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밀어내었다. 그리고는 나올 만
한 사람들이 다 나오자 다시 바위를 밀어서 막아 놓았다. 후토기
의 장기사 안원(顔垣)은 명교 중에서 제일가는 신력지사였다. 그
도 운경하여 그 거대한 바위를 밀어 보니, 마치 잠자리가 돌기둥
을 미는 것처럼 바위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혀를 내두르
며 젊은 교주에게 더욱 탄복했다.

사람들은 비도를 나간 후 적에게 발각될까 봐 기침소리도 내지
않았다.

장무기는 큰 바위 위에 서 있었다. 달빛을 빌어 아래를 바라보
니 천응교 사람들은 서쪽의 빈위(貧位)에 나란히 서 있었다. 천
미(天微), 자미(紫微), 천시(天市) 삼당과 신사(神蛇), 백호(白
虎), 청룡(靑龍), 주작(朱雀), 현무(玄武)단은 각각 통솔자에 의
해 질서정연하게 나란히 서 있었다. 동쪽에는 명교 오기인 예금
(銳金), 거목(巨木), 홍수(洪水), 열화(烈火), 후토(厚土), 각기
의 장기사가 본기의 형제들을 이끌고 오행 방위에 나누어 버티고
있었다. 중간에는 양소의 부하인 천, 지, 풍, 뢰 등 사문 문주가
통솔한 광명정 무리들도 보였다. 그 천자문에 속해 있는 것은 중
원의 남자 교도들이고, 지자문의 소속은 여자 교도들이고, 풍자
문의 소속은 석가, 도가 등 출가한 교도들, 그리고 뢰자문의 소
속은 서역 변방 인씨의 교도들이었다. 위일소, 냉겸 등 오산인은
장무기의 뒤에 서서 그를 호위하면서 모두들 조용히 교주의 명령
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무기는 천천히 말을 했다.

"본인은 살생을 많이 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유념
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응교는 은교주께서 이끌고 서쪽에서 공격
하십시오. 오행기는 거목기의 장기사 문창송(聞蒼松)이 통솔하여
동쪽에서 공격하십시오. 양좌사께서는 천자문, 지자문을 이끌고
북쪽에서 공격하십시오. 오산인은 풍자문, 뢰자문을 이끌고 남쪽
에서 공격하십시오. 그리고 위복왕과 본인은 중앙에서 책응(策
應)하겠소."

사람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 명에 순순히 따랐다.

장무기는 왼손을 한 번 흔들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가십시오."

네 패의 교도들은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서 광명정 사방을 포위했
다.

장무기는 위일소에게 말했다.

"복왕님, 우리 두 사람은 비도로 나가서 그들의 허를 찌릅시
다."

위일소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묘책이오."

두 사람은 다시 비도로 들어간 다음 양불회의 방에 있는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많은 기와며 타다 남은 나무 같은
게 잔뜩 쌓여 있어서 빠져 나오기가 힘들었다. 이때 명교의 사람
들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광명정 위에 남아 있는
적들은 이미 그들을 발견하고는 당황한 채 소리를 지르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장무기와 위일소는 서로 바라보며 살짝 웃었
다.

"저 녀석들이 저토록 의아해 하고 있으니, 싸울 필요도 없이 승
패는 이미 판가름 났소."

두 사람은 반이나 쓰러진 돌담 뒤에 숨어 있었으나, 달빛아래
검은 그림자가 왔다갔다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설불득과 주전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먼저 다가왔다.
이미 남쪽에서 공격해온 것이다. 그들은 적의 무리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마치 호박을 자르고 야채를 쓸 듯 적을 죽이고 있었다.
이와 함께 은천정, 양소, 오행기 사람들도 일제히 다가와서 적을
공격하니 마치 호랑이가 양떼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광명정에 공격해 온 것은 원래 개방, 무산방, 해사파 등 십여
개 크고 작은 방회였다. 그런데 광명정이 잿더미로 변하고 명교
사라들을 한 병도 잡지 못하자 이미 전승을 얻은 줄만 알고 있었
다. 개방, 거경방 등 반수 이상의 방회들은 요 며칠 사이에 모두
하산해 버려서 광명정에는 오직 신권문, 삼강방, 무산방, 오봉도
네 개 방회 문파만 남아 있었다. 명교 교도들이 갑자기 나타나자
이 네 개 문파에도 고수가 몇몇 있긴 했으나 어찌 양소, 은천정
등의 적수가 되겠는가! 잠깐 사이에 사상자는 반 이상이나 되었
다.

장무기가 몸을 타나내며 낭랑한 목청으로 말했다.

"명교의 고수들은 지금 광명정에 모두 모여 있다. 여러 방회,
문파는 들어라. 다시 싸워 봤자 그대들에게는 불리하니 일제히
병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너희들 목숨을 살려주겠다!"

신권문, 삼강방, 무산방, 오봉도 중에 있는 고수들은 이미 반
이상 사상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투지를 잃은 지 오래
였다. 그들은 병기를 버리고 모두 투항했다. 이 십여 명의 용감
한 무리가 맹렬하게 저항했으나 순식간에 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십여 일 동안에 무산방 등의 사람들은 이미 산 위에다 많은 오
두막을 짓고 잡시 거주하였다. 거목기 밑에 있는 교중은 다시 벌
목을 하여 오두막을 지었다. 지(地)자 문하에 있는 여신도들은
서둘러 물을 끓이고 밥을 지었다.

광명정 위에는 활활 타오르는 큰 불을 피워 명존화성(明尊火聖)
이 보호해 줌을 감사했다.

백미응왕 은천정이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천응교의 교하 사람들은 들어라! 본교와 명교는 본시 일맥이
다. 이 십여 년 전 본인은 명교의 동지들하고 불화가 있었기에
멀리 떨어진 동남쪽으로 가서 문호를 자립한 것이다. 지금 명교
는 장대협께서 새로운 교주가 되었으니 <천응교>란 이름은 오늘
서부터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모두 교중이
며 우리 모두 장교주의 호령을 들어야 한다. 만약에 복종할 수
없는 자가 있으면 빨리 산 밑으로 꺼져 버려라!"

그러자 천응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천응교의 근본은 명교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 우리는 반본귀종
(返本歸宗)하는 것이오. 우리가 모두 명교에 가입하는 건 대단히
영광스런 일입니다. 은교주나 장교주는 친척간이니 어느 분 교주
의 명령을 들어도 모두 같은 것이오!"

은천정이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부터는 오직 장교주만 존재한다! 누구든 나에게 <은교주>
라 부르면 범상반역(犯上叛逆)이다!"

장무기는 포권을 하며 말했다.

"천응교와 명교가 다시 합쳐진 것은 실로 하늘만큼 큰 경사입니
다. 그러나 본인은 정세에 눌려서 하는 수 없이 잠시 교주의 자
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제 대적도 제거했으니 우리는 다시 교
주를 선출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명교인 중에는 많은 영웅호
걸이 계신데, 본인은 나이도 어리고 배운 것도 없는데 어찌 감히
오래 동안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교주, 당신도 우리를 위해서 생각 좀 해주십시오. 우리가 이
교주의 자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천신만고 끝에 당신을 선출했는데, 당신이 만약에 마
다한다면 당신이 다른 사람을 추천해서 교주를 하라고 하시오.
흥! 누구든 간에 나 주전이 먼저 불복할 것이오. 만약 나 주전더
러 교주를 맡으라 하면 다른 사람이 또 불복할 것이오."

팽영옥이 말했다.

"교주, 만약에 또다시 옛날 같은 비참한 길을 갈 것이라면, 그
때 가서 당신이 다시 구하려 올 것입니까?"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이 사람들의 말이 옳다. 이러한 정세에 놓여 있으니 나로서는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난 교주의 자격도 없거니와 또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여러분들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본인도 더 이상 마다하지 않
고 잠시 교주의 중임을 맡아 보겠소. 그러나 세 가지 조건이 있
으니 여러분들이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은 죽어
도 교주직을 맡지 않겠습니다."

"교주의 명인데 세 가지가 아니라 삼 십가지 일지라도 감히 위
반하지 못합니다. 그 세 가지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남들은 본교를 사마외도(蛇魔外道)라 보고 있습니다. 비록 명
교 외의 사람들이 본교의 진상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고 있다지
만, 본교의 교도들 수가 많아지면 행실이 방종한 자도 더러 있을
겁니다. 그러니 첫 번째 일은 지금부터 본인 이하 여러분들은 모
두 본교의 규칙을 엄수하여야 하고, 선을 행하되 악을 물리쳐야
하며, 협의지심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본교의 형제지간은 필히
화목하게 지내서 마치 수족과 같이 되어야 하고, 서로 투쟁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장무기는 주전을 한 번 쳐다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입씨름하며 욕지거리하는 건 무관하지만 손을 쓰는 건 절대로
안 됩니다. 본인은 냉겸 냉면 선생이 형당집법의 직책을 맡으시
길 부탁 드립니다. 규칙을 위반하는 모든 자는 일제히 중벌로 다
스릴 것이며, 설사 본인의 외할아버지나 외삼촌 등 존장도 예외
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옳소!"

냉겸은 한 걸음 다가가서 말했다.

"봉명(奉命)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일은 말하기가 좀 거북스럽습니다. 본교와 중원의 각
문파와는 이미 깊은 원한 관계가 있는 줄은 알고 있습니다. 앞으
로는 절대 각 문파를 찾아가서 원한을 갚으려 하지 맙시다."

사람들은 그의 이 말에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
켰다.

주전이 말했다.

"만약에 각 문파가 다시 와서 시비를 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겠
습니까?"

"그 문제는 그 때가서 임기웅변하십시오. 만약 상대방이 자꾸
만 억압하면 우리도 가만히 앉아 죽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어차피 우리의 목숨은 모두 교주께서
구해 주셨으니, 교주께서 하라는 대로 우리는 따르겠습니다."

팽영옥이 큰 소리로 말했다.

"형제 여러분, 중원의 각 문파는 우리의 동도들을 많이 살해했
지만 우리도 각 문파의 사람을 많이 죽였소. 만약 쌍방에서 서로
복수하려고 하면 여러분은 점점 더 많이 죽게 될 것이오. 교주께
서 우리에게 복수하지 말라고 명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하는 말씀이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옳다고 대답하였다.

장무기는 몹시 기뻐하며 포권의 예를 취하고 말했다.

"여러분의 하해 같은 도량은 실로 무림의 복입니다."

그는 즉시 오행기의 각 기사에게 명하여, 신권문, 무산방 등 문
파방회의 포로를 석방하고 그들에게 명교는 중원의 각 문파들과
다시는 적으로 대적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전해 주고, 포로들의
뜻대로 광명정을 떠나라 했다.

"다음 세 번째 일은 양교주의 유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양 교주
의 유서에 따르면, 성화령(聖火令)을 찾아온 자를 제 삼 십 사대
교주로 승계하고 했습니다. 그가 돌아가신 후 교주의 자리는 금
모사왕 사법왕에게 승계하고 했습니다. 우리는 당장 해외로 나가
서 사법왕을 맞아들여서 그에게 교주의 자리를 승계해야 됩니다.
그런 다음에 성화령을 찾는 방도를 강고해야 합니다. 그 때 가서
본인이 교주직을 물러나면 여러분은 절대 다른 의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양소가 말했다.

"양 교주의 유언은 이 십여 년 전에 쓴 것이오. 그 때의 시국은
지금과 아주 달랐습니다. 금모사왕은 당연히 모셔와야 되고 성화
령도 마땅히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교주의 직을 맡
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심복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장무기는 양교주의 유명을 절대로 위배해서는 안 된다고 고수하
자, 모두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뜻을 따랐다.

이 세 가지 일은 장무기가 십여 일 동안 계속 생각해 온 것인
데, 사람들이 모두 이를 따르자 장무기는 매우 기뻤다. 즉시 사
람을 시켜서 소와 양을 잡고는 절대로 이 세 가지 일을 위배해서
는 안 된다고 교중들과 피로 맹세하였다.

장무기가 말했다.

"본교의 제일 시급한 큰 일은 해외에 나가서 금모사왕 사법왕을
영접해 오는 것입니다. 이번에 가게 되면 본인이 직접 가야 하니
어느 분께서 동행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말했다.

"교주를 따라서 해외로 같이 나가겠소!"

장무기는 소리를 낮추어서 양소와 잠시 상의한 후 그제서야 낭
랑한 소리로 말했다.

"해외에 나가는 것은 많은 사람이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
나 이번에 나가게 되면 많은 큰 일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양좌사께서는 천, 지, 풍, 뢰 네 문을 이끌고 광명정을
지키면서 총단을 중건하십시오. 금목수화토 오기는 각지로 나누
어 나가서 본교의 분산된 사람들을 모집하여, 우리가 아까 약속
한 세 가지 일을 전해 주십시오. 외할아버지와 외삼촌께서는 천
응교를 이끌고 적이 아직도 본교와 시비할 의사가 있는지 염탐하
시고, 광명우사와 자형룡왕, 두 분의 행방을 알아 보십시오. 그
리고 위복왕께서는 육대파 장문인의 거처로 가서 본교의 의사를
말해 주십시오. 설사 적을 친구로 만들지 못해도 우리의 도리는
해야 합니다.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위복왕께서는 반드
시 성사시키시리라 믿습니다. 해외에 나가서 사법왕을 영접하는
일은 본인과 오산인이 동행하겠습니다.

양불회가 말했다.

"아버님, 저도 해외에 나가서 만년빙산의 풍경을 보고 싶습니
다."

"교주에게 부탁하거라. 난 결정할 수 없다."

양불회는 입을 삐쭉거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살짝 웃더니 수년 전 양불회를 서쪽으로 데리고 오던
일이 생각났다. 그녀는 떼를 쓰면서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
라 댔다. 그래서 자기는 빙화도에 있는 여러 기경과 백곰, 바다
표범, 괴어 등 각종 진기한 동물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가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불회 매자, 바닷길은 몹시 험난하다. 그래도 겁나지 않는다면
양좌사께서도 안심하고 보낼것이다. 그렇게 되면 양좌사와 불회
매는 함께 나를 따라서 해외로 갈 수 있는 거지."

양불회는 박수를 치며 말했다.

"난 두렵지 않아요. 아버님, 우리 둘이서 모두 무기 오빠를 따
라서..... 아니, 교주님을 따라갑시다."

양소는 대답하지 않고 장무기를 바라보면서 그의 의사를 따르기
로 했다.

"정히 그러하다면, 냉 선생의 신세를 져야겠습니다. 냉 선생님
은 광명정에 남아서 잠시 천, 지, 풍, 뢰 네 문을 통솔하시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자 주전은 박수를 치며 발까지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묘합니다, 정말 묘합니다."

설불득이 말했다.

"주형, 뭐가 묘하다는 것이오?"

"교주께서 이토록 냉겸을 의중하시는 것은 우리 오산인의 체면
때문이오. 다시 말해서 망망대해에서 며칠 밤낮을 항해 하게 될
지 모르는데, 양좌사 부녀가 따라가면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얼마나 즐겁겠소? 만약에 냉겸이 같이 가게 된다면 그건 입을 열
지 않는 나무토막이 하나 더 많아진 것이 아니오."

사람들은 일제히 웃어 댔다. 하지만 냉겸은 화를 내지도 웃지도
않는 것이 마치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날 사람들은 양껏 배를 채우고 나서 각자 휴식을 취했다. 장
무기는 양불회에게 소조의 현철사슬을 풀어 주라고 하였지만, 열
쇠를 화장의 초옥 기왓장더미에 잃어 버려서 다시는 찾지를 못했
다. 소조가 담담하게 말했다.

"난 이 찰랑찰랑하는 쇠사슬을 달고 있으면 걸어다닐 때 오히려
듣기 좋아요. 그러니 그대로 차고 있는 게 좋겠어요."

"소조,넌 안심하고 광명정에서 기다려라. 내가 의부를 영접해
돌아오면 그의 도룡보도를 빌려서 너의 사슬을 풀어 주겠다.

소조는 고개를 흔들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장무기는 사람들을 이끌고 냉겸에게 작별을 했다.
그러자 냉겸이 말했다.

"교주, 몸조심 하십시오."

"냉 선생님, 총단을 맡아 수고해 주십시오."

냉겸은 주전에게 말했다.

"괴어가 널 잡아먹을지 모르니 조심해라."

주전은 그의 손을 쥐고 내심 몹시 감동하였다. 오산인의 정은
마치 형제 같았다. 냉겸이 오늘 예상을 뒤엎고 이처럼 말을 길게
한 것은 혹시라도 바다에 있는 괴어가 형제를 잡아 먹을지 몰라
몹시 걱정스러워서 말한 것이다.

냉겸과 천, 지, 풍, 뢰 네 문의 수령들은 광명정의 밑까지 배웅
해 주고 다시 그제서야 작별을 했다.

일행은 백여 리 길을 걸어와 바로 산막에서 야영을 했다. 장무
기는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쪽 끝에서 달그
락달그락하고 금속성이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잠이 깨어 살
며시 소리나는 곳으로 가 보니, 달빛에 작은 그림자가 아른거리
는 것이 보였다. 그는 더욱 빨리 달려갔다.

"소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왔지?"

역시 소조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장무기를 보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장무기의 품에 안기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훌쩍훌쩍 우는 것이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울지 마라, 착하지."

소조는 그 동안 많은 설움을 당하고 이제서야 발산할 곳을 찾았
다는 듯이 더 큰 소리로 울어 댔다.

"어딜 가시든 저도 따라갈 거예요."

'이 어린 아가씨는 부모를 모두 잃고 거기다 양좌사(陽左使) 부
녀에게 의심마저 받고 있었으니 정말 가련하구나. 아마 내가 그
동안 잘 대해 주어서 나를 이렇게 따르는 모양이구나.'

장무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말했다.

"그래, 이제 그만 울어라. 해외에 너도 데리고 가마."

소조는 고개를 들어 웃음을 보였다. 희미한 달빛이 그녀의 자그
마한 얼굴을 비추자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망울엔 아직 눈물이 고
여 있고, 입가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무기도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소조야, 넌 앞으로 크면 정말 아름다울 거야."

"어떻게 아세요?"

장무기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동북쪽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적어도 백여 명이 되는 인마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위일소와 양소
가 달려왔다.

"교주님, 깊은 밤에 이 많은 인마가 달려가는 것을 보니, 아마
본교의 적인 것 같습니다."

장무기는 소조를 팽영옥 등과 함께 있으라고 하고는 위일소와
양소를 데리고 말발굽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달려가
보니, 사막 한 가운데 말 발자국이 나 있었다. 위일소가 몸을 낮
춰 모래 한 줌을 쥐어 보면서 말했다.

"핏자국이 있군."

장무기도 모래를 한 줌 주워 냄새를 맡아 보니, 피 비린네가 물
씬 풍겼다. 세 사람은 말 발자국을 따라 몇 리를 쫓아갔다. 양소
가 갑자기 모래 위에서 두 동강이 난 칼을 주워 자세히 살펴 보
니, 손잡이에 풍원성(풍遠聲)이란 세 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자는 공동파의 인물이야. 교주님, 아마 공동파가 여기에서
말들을 준비하고 중원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 같습니다."

위일소가 다시 말했다.

"광명정에서 내려온 지 벌써 반 달이 훨씬 넘었는데, 아직도 여
기 있다니 무슨 수작들을 부리고 있는지 모르겠군."

세 사람은 공동파라는 것을 알자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다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이 일째 되는 날이었다. 앞쪽의 초원에서 일행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대부분이 여승들이었는데, 약 칠, 팔 명의
남자도 끼어 있었다. 쌍방이 서로 가까와지자 한 여승이 외쳤다.

"마교의 도적들이예요!"

그들은 그 말에 모두 병기를 뽑아 들고 흩어져 공격 태세를 취
했다. 장무기는 이들이 모두 아미파 사람들인데, 어째서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있는지 이상했다. 더구나 이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아미파 사람들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물었다.

"아미파 문하의 사태님들입니까?"

몸이 가냘픈 중년 여승 한 명이 뛰쳐 나와 날카롭게 외쳤다.

"마교의 도적들아, 뭘 물어 볼 게 있느냐? 어서 죽을 각오나 해
라!"

"사태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어째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겁니까?"

"이 도적들아, 네놈들이 감히 내 이름을 알려고 하다니! 넌 누
구냐?"

위일소가 잽싸게 뛰쳐나와 그들의 무리 속에 들어가 남제자 두
명의 혈도를 찌르고는 목덜미를 움켜잡아 멀리 던져 버리고는 제
자리로 잽싸게 돌아왔다. 그의 동작은 정말 번개와 같았다.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분은 바로 당세 무공의 제일인자이시고 담력이 천하무쌍이신
기남자이시며, 좌우광명사 사대호교법왕(四大護敎法王) 오산인,
오행기를 통솔하시는 명교의 장교주이시다. 지금 막 아미파를 하
산시키고 멸절사태의 의천검을 뺏은 훌륭한 인물이시니, 너의 이
름을 물어본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아라!"

위일소가 한참 소리치고 나자 아미파 제자들은 모두 그만 겁에
질렸다.

조금 전에 믿기 어려운 위일소의 무공을 한 수 본 그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중년 여승은 잠시 정신을 차리고 나
서 물었다.

"귀하께선 누구신지요?"

위일소가 웃으며 말했다.

"나의 성은 위요, 별명은 청익복왕이라 하오."

아미파 제자들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모두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그들 중 네 명이 조금전에 위일소
에게 던져진 동문을 구하러 달려갔다.

위일소는 다시 말했다.

"장교주님의 호령에 따라 명교와 육대문파는 무기를 거두고 우
호를 맺었다. 귀동문께서는 이번에 운이 좋아 나 청익복왕이 그
들의 피를 빨지 않았소!"

위일소는 장무기의 구양신공에 의해 치료를 받은 후론 현음지한
독(玄陰指寒毒)을 말아 낸 것뿐만 아니라 체내에 쌓였던 독도 반
이상이나 없어져, 매번 무공을 펼쳐 경력을 소비한 후 추위를 이
겨내기 위해 피를 빨아 먹을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네 사람이
두 동문을 안고 와 점혈을 당한 혈도를 풀어 주려고 방법을 생각
하고 있는데, 갑자기 획! 획! 하고 두 개의 작은 돌맹이가 바람
을 가르고 날아와 두 사람의 혈도를 때렸다. 순간 두 사람은 즉
시 혈도가 풀렸다. 그것은 바로 양소가 탄지신통(彈指神通)으로
정석점혈(挺石點穴)을 펼쳐 보였던 것이다. 중년 여승은 상대의
인원수가 적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잠깐 보인 신
수를 보자 무공이 정말 기괴하리 만치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서 만약 섣불리 공격을 했다간 크게 다칠 것이 뻔한 사실이라,
무기를 거두면서 우호를 맺었다는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아
랑곳 없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빈니의 법명은 정공(靜空)이라 합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저의
사부님을 보셨습니까?"

그 말에 장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존사께서는 광명정을 내려가신 지 반 달이 훨씬 넘었는데, 제
생각엔 지금쯤 옥문관(玉門關)까지는 가셨으리라고 생각되는군
요. 혹 여러분이 이쪽으로 오면서 그분과 엇갈린 게 아닙니까?"

정공 뒤에 서 있던 약 삼십여 세로 보이는 한 여자가 외쳤다.

"사저님,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세 갈래로 나눠 마중을 했고 연
락을 취하는 불화살이 있는데, 어떻게 길이 어긋납니까?"

주전이 그녀의 무례한 말에 몇 마디 나무라고 싶어 입을 열었
다.

"그래요? 그거 이상하군."

그러자 장무기가 낮은 소리로 그를 타일렀다.

"주 선생, 저 여자와 상대할 필요 없습니다. 저들은 자기네 스
승을 못 찾아 마음이 조급해서 그러는 겁니다."

정공은 크게 의심을 하고 있었다.

"우리 스승과 동문들이 모두 명교에게 당한 게 아닌가요? 대장
부라면 자기가 한 일에 자기가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어째 속
이려고 하는 거죠?"

그 말에 주전이 웃으며 대꾸를 했다.

"사실은 아미파에서 자기 주재도 모르고 광명정을 공격하려다,
멸절사태와 그의 문하들은 모두 생포당해 지금 감방에 갇혀 있
고. 자기네들의 죄를 뉘우친다 해도 칠, 팔 년 지나면 그 때가서
풀어줄까 말까 하오."

팽영옥이 잽싸게 주전의 앞을 가로 막았다.

"여러분 믿지 마십시오. 이 주형께서 농담을 한 겁니다. 멸절사
태의 신공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고 그의 문하들의 무예도 하
나 같이 다 고강한데 어떻게 명교에 생포 당하겠습니까? 지금 우
리와 귀하는 이미 단합을 했으니, 아미로 돌아가시면 자연히 만
나실 겁니다."

정공은 그 말을 반신반의하며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위
일소는 웃으며 그녀를 나무랐다.

"우리 주형께서 농담을 하기 좋아해서 한 말이지만, 당당지존
(堂堂之尊)이신 우리 명교 교주께서 당신네 같은 소인배들을 어
찌 속이겠소?"

"마교에서는 항상 간사하고 교활한 계략을 많이 써 왔는데, 어
떻게 믿겠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갑자기 홍수기 장기사 당양(唐洋)이 왼
손을 쳐들었다. 순간 거목기는 동쪽으로, 열화는 남쪽, 예금기는
서쪽으로, 홍수는 북쪽, 후토기는 주위에서 맴돌며 아미파 사람
들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은천정이 큰 소리
로 호통을 쳤다.

"노부가 바로 백미응왕이다. 나 혼자 너희들을 상대해도 너의
같은 소인배들쯤은 모조리 해치울 수 있다. 오늘은 명교에서 너
희들을 용서해 줄 테니, 앞으로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외침은 벼락과도 같이 울렸다. 아미파 제자들은 귀가 쨍쨍
울렸고, 그의 백발과 흰 수염의 당당한 위세에 눌려 모두 겁에
질려 버렸다. 장무기는 읍을 하며 말했다.

"존사에게 전해 주십시오. 명교의 장무기가 안부를 전하더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앞장 서 동쪽을 향해 걸어갔다. 당양은 위일소,
은천정 등 일행이 모두 지나가자 그제서야 손짓을 하며 오행기를
불러 들였다. 아미파 제자들은 그들의 성세에 눌려 겁에 질린 채
장무기 등의 일행들이 멀리 떠나는 것을 멍청하게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팽영옥이 이상하다는 듯이 입을 열
었다.

"교주, 제가 보기엔 여기에 무슨 영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멸
절사태와 저들의 길이 어긋날 리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각 문
파에서 모두 연락을 취하는 신호가 있는데, 전혀 그림자도 보지
를 못했다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걸어가면서, 아미파의 그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사막에서 종적을 감춘 것을 이해할 수 가 없었
다. 더욱이 장무기는 주지약이 걱정됐으나 누구와 의논할 수 없
는 처지였다.

이 날은 날이 저물 때까지 걸었는데, 후토기 장기사 인원은 갑
자기 이상한 것을 느꼈다.

"여기가 좀 이상합니다."

그러면서 숲으로 뛰어가 동정을 살폈다. 그는 한 부하의 손에서
삽을 받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조금 파 들어가자 시체 한 구가
보였는데, 얼굴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옷차림으로 보아
곤륜파 제자가 틀림없어 보였다. 후토기 부하들이 달려들어 같이
삽질을 하자 웅덩이 속에서 여섯 구의 시체가 더 나왔다. 모두
곤륜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몸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장무
기는 시체를 모두 다시 안장 시키도록 지시했다. 그들은 모두 서
로 쳐다보며 누가 한 짓인지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었다. 팽영옥
이 의혹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 일은 꼭 진상을 알아 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또 우리가 이
누명을 쓰게 될 거야."

설불득이 다시 말했다.

"모두들 듣게나. 만약 상대가 정정당당히 나선다면 우리는 교주
님의 인솔하에 천하무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누구한테
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상대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이
상 이제부터는 물을 마실 때나 야영을 할 때나 항상 적의 기습을
조심해야 된다."

명교인들은 그 소리에 모두 네! 하고 한결같은 대답을 했다. 다
시 한참을 걸어오자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독수
리 한 마리가 밑으로 내리치더니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 순간 날
개에서 털 몇 개가 떨어져 휘날리며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에게
몸에 무엇으로 적중당한 것이 분명했다. 예금기의 장기사 장정이
의천검에 목숨을 잃은 후, 부기사 오경초는 장무기의 명령으로
장기사로 승진됐었다. 이때 그는 독수리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
각했다.

"제가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부하 두 명을 데리고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따라갔던 한 명이 먼저 돌아와 장무기에게 보고했다.

"교주님께 보고 드립니다. 무당파 은육협이 저 모래 계곡밑에
쓰러져 있습니다."

"뭣이! 육협이 크게 다쳤는가?"

"중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오기사께서 그를 구하러 계곡 아래
로 내려갔습니다....."

장무기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
갔다. 양소와 은천정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적어도 십여 장 깊
이는 되는 큰 모래 계곡이었다. 오경초는 왼팔로 은이정을 안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매우 힘겨워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장무기는
황급히 달려가 귀를 가슴에 대로 자세히 살펴보니 숨은 아직 쉬
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오경초의 팔에서 은이정을 뺏어 안고 몇
번 몸을 날려 올라와 그를 눕히고 자세히 살펴본 순간, 크게 놀
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이정은 사지의 뼈마디 마디마다 다 부
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숨은 희미하게 쉬고 있었으나 조금도 움
직일 수가 없었다. 누가 이런 잔인한 수법을 쓰다니, 정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은이정은 아직 기절하지는 않아 장무기를 보자 얼굴에 회색이
감돌았다. 그러면서 입에서 작은 돌맹이 두 알을 내뱉었다. 그는
계곡 밑으로 떨어져 아직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데, 독수리가 자
기를 물어 뜯으려 덤벼들자 그는 자신의 정순한 내력으로 옆에
있던 돌을 입에 물고 덤벼드는 독수리를 격퇴시켰던 것이다. 이
런 식으로 버티기를 이미 며칠이 됐던 것이다. 공중엔 아직도 네
마리의 독수리가 사람들이 은이정을 버리고 가면 다시 그를 쪼기
위해 빙빙 돌고 있었다. 양소가 돌맹이 네 개를 들어 던지자 꽥!
꽥! 하고 소리내며 모두 머리통이 부서져 땅에 떨어졌다.

장무기는 먼저 그에게 지통호심단(止痛護心丹)을 먹이고 다시
자세히 보니, 전신 이십여 곳의 뼈마디가 부러져 있었다. 상처마
다 모두 무서운 지력에 뼈마디가 부러져 있어 더 이상 접골할 방
법이 없었다. 은이정이 신음소리를 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삼사형과 마찬가지로 소림파..... 금강지력에 당한....."

장무기는 갑자기 옛날에 삼사백 유대암이 당했던 일이 뇌리를
스쳤다. 그도 역시 소림파 금강지력에 의해 뼈마디가 모두 부려
져 가루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십 여 년이 지난 지금 또
한분의 사숙이 소림 금강지에 당한 것이다.

"육숙, 괴로와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이 조카에게 맡기십시오.
누구든 피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혹시 소림파 중에 어떤 인물
이 한 짓인지 육숙님은 아십니까?"

은이정은 고개만 흔들더니 그만 기절해 버렸다. 그는 며칠 동안
이를 악물고 버티어오다 이젠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무기는 자기 부모가 자살한 이유도 바로 삼사백에게 미안한
생각에서 저지른 것인데, 오늘 육사숙이 또 이런 비참한 꼴을 당
하자 더 이상 소림파에 죄인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으면 유삼백이
나 은육숙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 허무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은이정은 기절을 했
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부러진 뼈를 접골하지 못해
유대암과 똑같은 운명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장무기는 경력이 짧고 또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데 언제나 신중
을 기하였다. 그는 훌쩍 멀리 걸어와 작은 모래 언덕에 앉아서
곰곰히 생각했다. 그의 마음엔 두 가지 생각이 서로 교차했다.

소림사에 가 죄인을 찾아 부모와 유삼백, 은육숙의 원한을 갚아
야 할 것인가? 만약 소림사에서 순순히 죄인을 내놓는다면 다행
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명교와 무당파가 합심하여 소림에게 도전
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미 여러 형제들에게 앞으로
절대로 원한을 갚는 행동은 하지 않기로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사건이 직접 나에게 부딪치자 맹세했던 일을 금방 잊어
버린다면, 앞으로 어떻게 그들을 통솔할 것인가? 또 계속 이런
식으로 원한이 원한을 낳게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칠 것
인가? 그는 너무도 괴로웠다.

이때 날을 이미 어두워, 명교인들은 모두 불을 피우고 솥을 걸
고 밥을 짓느라 부산을 떨었다. 장무기는 혼자서 외롭게 언덕에
앉아 새벽이 되어 해가 뜨려고 할 때까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소림사에 가서 장문인 공문(空門) 신승(神僧)을 만나 원
인을 설명드리고 나서, 그에게 정당한 대답을 들어야겠다. 그러
나 서로 말다툼이 생겨 꼭 손을 쓰지 않고서는 안 될 때는 어떻
게 하는가?'

그는 장탄식을 토하며 일어서면서 괴로운 심정을 억누를 수 없
었다.

'내가 이 어린 나이에 대임을 맡자, 바로 이런 큰 어려운 문제
가 닥치는구나. 전쟁을 막으려고 해도 이런 사건들만 자꾸 터지
다니..... 명교의 교주라는 중임을 맡았으니 앞으로는 이런 고민
이 그칠 날이 없을 거야. 교주 노릇을 안 한다면 얼마나 좋을
까?'

장무기가 돌아와 보니 모두는 배가 고팠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아직 밥을 들지 않고 있었다. 장무기는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었
다.

"나를 기다리지 말고 어서들 드십시오."

은이정을 쳐다보니 양불회가 뜨거운 물로 그의 상처를 씻어 주
고 미음을 먹이고 있었다.

은이정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갑자기 두 눈을 부
릅뜨고 양불회를 멍하니 쳐다보며 헛소리를 했다.

"효부매(曉芙媒), 내가 얼마나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시
오?"

양불회는 얼굴이 빨개지며 매우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다
시 미음을 떠 먹였다.

"몇 모금만 좀더 드세요."

"이젠 다시 내 곁은 안 떠나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양불회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이제는 미음이나 좀 더 드세요."

은이정은 매우 기쁜 듯이 미음을 받아 먹었다.

다음날 장무기는 모두 숭산의 소림사로 같아 가서 은이정을 타
상시킨 원인을 알아 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위일소나 주전 등 모
두는 은이정이 중상을 입은 것을 보고 울화가 치밀어 있었는데,
교주가 소림사로 따지러 간다고 하자 모두 즐거워했다.양소는 기
효부의 일로 항상 은이정에게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
런 일이 닥치자 그는 꼭 은이정을 위해 복수를 할 것을 다짐했
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속죄하려는 마음이었
다.

소림사로 향하는 장무기 일행에겐 별달리 이상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은이정은 잠이 들었다 깼다 했다. 장무기는 그에게 어떻
게 된 것인가를 물었다. 은이정은 아무 설명 없이 망연히 대답만
했다.

"소림사 화상 다섯 명이 나를 협공한 거야. 소림파의 무공이 틀
림없어."

이날 이들은 옥문관에 당도하자 낙타를 팔아 버리고 다시 말로
바꾸었다. 그들은 남에게 발각될까 두려워 장사꾼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몇 명은 노새를 사서 마차를 끌게 한 후 차에다 약재 같
은 짐을 싣고 장사꾼 행세를 했다.

다음날 새벽, 그들은 깊을 재촉했다. 그들은 감량(甘凉)의 큰길
을 달리고 있었는데, 뜨거운 햇살로 날씨가 매우 덥기 시작했다.
그들이 두 시간 남짓 달려오자 앞에 이십여 그루의 버드나무가
보였다. 그들은 나무 그늘에서 쉬려고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가
까이 가자 버드나무 밑엔 누군가 아홉 명이 앉아 있었다. 여덟
명의 대한들은 모두 사냥꾼 차림새에다 허리엔 칼을 차고 등 뒤
엔 활통을 메고 있었고, 거기다 사냥할 때 필요한 배가 대여섯
마리 있었다. 모두 흑색 털에 날카로운 발톱으로 위세가 당당했
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은 젊은 공자였다. 남색 비단 옷에 접선
(摺扇)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부귀스러운 모습이었다.

장무기는 말에서 내려 그를 훔쳐 보니, 그의 얼굴이 매우 아름
다와 보였다. 총명한 눈동자엔 흑백이 분명하였고, 백옥으로 된
부채 손잡이를 든 손으로 얼마나 흰지 백옥 손잡이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허리에 찬 장검에 눈길이
쏠렸다. 그의 검집에 의천(倚天)이라는 두 자가 새겨져 있었다.
검의 모양이나 길이로 봐서 바로 멸절사태가 명교인들을 일대 도
살했고, 주지약이 그 검으로 장무기를 죽일 뻔하게 중상을 입혔
던 의천검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전이 참지 못하고 물어보려고 하자, 바로 그 때 동쪽 큰 길에
서 말발굽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한 무리가 요란스럽게 말
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원나라 병사들이었고 약 오, 육십 명은 되어 보였
다. 그리고 그들 뒤엔 백여 명이나 되는 부녀자들이 묶여 말 꼬
리에 끌려오고 있었는데, 모두 잘은 발에 걷기도 힘든데 어떻게
말에 끌려 뛸 수 있겠는가! 어떤 부녀자는 쓰러진 채 질질 끌려
오고 있었다. 이 부녀자들은 모두 한족(漢族)들이었다. 모두 이
원나라 병사들에게 체포돼 그중 반 이상은 이미 옷이 땅에 끌려
다 떨어져 반 이상이나 알몸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 울고불
고 하는 모습이 매우 처절했다. 병사들은 술병을 들고 마시며 어
떤 자는 이미 취하여 부녀자에게 채찍질을 가하고 있었다. 원래
몽고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말 위에서 자라 그들의 채찍질은 매우
훌륭했다. 채찍질 할 때마다 부녀자의 옷이 찢겨져 나갔고, 그들
은 모두 기뻐 날뛰었다.

몽고인..... 중국을 점령한 지 이미 약 백 년이 되었다. 그들은
한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밝은 대낮에 부
녀자들을 학살하고 희롱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심하게 행동한
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명교인들은 화가 치밀어 장무기의 명
령만 떨어지면 모두 뛰쳐나가 그들을 모두 죽이고 싶었다.

갑자기 그 공자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성이 들려왔다.

"오육파, 네가 가서 저 부녀자들을 풀어 주라고 해. 이런 못된
짓을 하다니!"

그의 음성은 여자의 목소리 같이 들렸다. 원병 무리들 중에서
한 군관이 타고 있는 말 위에서 뛰쳐 내려오더니 취한 눈으로 그
를 노려보면서 외쳤다.

"하! 하! 하!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어른신네가 하는
일을 간섭하다니....."

오육파가 그를 나무랐다.

"야, 이놈아! 대낮에 이런 나쁜 짓을 하다니, 너희들의 우두머
리가 누구냐? 빨리 풀어 주지 못할까?"

그 군관은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쳐다 보며, 그들의 당
당한 기세에 의아해 했다. 그러면서 그 소년 공자의 두건에 두
개의 큰 구슬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욕심이 생겨 크게 웃었다.

"어이 상공! 이 어르신네를 따라오면 좋은 구령을 시켜 주지."

그 공자는 원래 원병들의 이런 난폭한 행동을 보고도 별로 화내
지 않고 안색이 부드러웠으나, 이 무례한 말에 그만 눈을 치켜
뜨며 화를 냈다.

"한 명도 살려 보내지 마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획! 하고 한 개의 화살이 날아가 그
군관의 가슴을 뚫고 날아갔다. 바로 그 공자의 옆에 있던 사냥꾼
차림의 한 남자가 쏜 것이었다. 그의 놀랍도록 빠른 화살 쏘는
수법과 그 강한 경력은 무림의 일류 고수와 같았다.

연이어 획! 획! 하는 소리와 함께 여덟 명이 모두 화살을 쏘아
댔다. 정말 그들은 백발 백중이었다. 한 개의 화살도 빗나가지
않았다. 원병들은 갑자기 변이 생기자 모두 당황해 하며 그들도
화살로 응수했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원병은 삼십여 명이나 죽
어갔다. 그러자 남은 원병들은 부녀자들을 내동댕이치고 달아났
다. 여덟 명의 남자들이 탄 말들은 모두 훌륭한 말들이라 번개같
이 쫓아가 곧 원병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자 소년 공자는 말에 올라 여덟 명을 이끌고 떠나 버렸다.

"여보시오, 잠깐 할 말이 있소!"

주전이 외쳤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덟 명의 호위를 받
고 이미 멀리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장무기와 위일소는 자신들의 경공(勁功)을 시전(施展)하여 그들
을 따라가 자세히 물어볼 수도 있었으나, 그 여덟 명의 신기와
같은 화살로 적들을 죽인 협기가 가상해 내심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실례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양소가 말했다.

"저 공자는 분명 여자가 틀림이 없어. 그리고 저 사냥꾼 차림의
여덟 명은 모두 고수들인데 그녀에게 그렇게 공손하다니! 그 여
덟 명은 궁술이 저토록 신묘한데, 중원의 어느 문파인지 모르겠
군."

양불회와 후토기 등 여러 사람들은 부녀자들을 안심시키고 물어
보니, 근처 촌마을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죽은 시체들 품속에
서 금은 재물들을 찾아 내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모두 돌려 보냈
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며칠간 그들은 항상 그 원병들을 무찌른
아홉 명의 얘기를 나누며, 그들과 친분을 맺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했다.

주전이 양소에게 물었다.

"양형, 당신 딸도 사실 미녀인데 그 남장을 한 아가씨와 비교하
니, 정말 비교가 안 되는군."

"맞어. 만약 그들이 우리 명교에 가입한다면, 그 여덟 명은 아
마 지위가 오산인 위가 될 거야."

"허튼 소리! 말타고 화살쏘는 무공이 뭐 별건가? 나 주전과 한
번 겨뤄 보라고 해 봐!"

"음! 그러나 무공으로 따지면 냉겸형보다는 한 수 위인 것 같은
데.....!"

명교 오산인 중에서 냉겸(冷謙)의 무공이 제일 뛰어났다. 이것
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양소는 주전과 평소 불목하고 지
내왔다. 서로 겉으로 싸우지는 않았으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
전이 양소에게 말싸움을 걸곤 했었다. 그런데 양소가 여덟 명의
무공을 냉겸보다 높다고 비교하면서 오산인들을 놀리자 화가 치
밀어 무슨 말로 다시 대꾸하려고 했는데, 팽영옥(彭營玉)이 웃으
며 말했다.

"주형, 또 양좌사에게 당했군요. 일부러 당신을 화나게 하려고
한 겁니다."

주전이 크게 웃었다.

"내가 화를 절대로 안 내면 어쩔 수가 없겠지."

잠시 후, 주전은 또 양소의 기마술이 뒤떨어졌다고 비꼬았다.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고 그들의 말다툼을 말렸다.

은이정은 매일 장무기의 치료 덕택에 정신이 많이 맑아져, 그날
광명정에서 내려온 후 생겼던 일들을 얘기했다.

그날 그는 마음의 안정을 못 찾고 그만 사막에서 길을 잃어 버
렸다. 황사가 날리는 망망한 사막에서 팔, 구 일을 헤매다 다시
원래의 길을 찾았을 땐 이미 무당파 사람과 연락이 끊겼던 것이
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다섯 명의 소림사 중들이 나타나 아
무 말도 없이 갑자기 도전을 한 것이다. 다섯 명의 무공은 모두
매우 고강했다. 은이정이 그 중 두 명을 쓰러뜨렸으나 여전히 숫
적으로 당해 내지 못해 그만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틀림없이 소림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명정에서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후원을 온 자들인지는 모르나,
왜 갑자기 자기에게 독수를 뻗쳤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은이정이 먼저 자신을 소개한 터라 사람을 잘못 알아 볼
리도 없었다.


----- 제 4 권 7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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