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27~28

나단비 | 2024.03.27 17:55:37 댓글: 0 조회: 64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6869
27
신뢰감





그해 겨울이 지나고 가장 순하고 가장 여린 양처럼 3월이 다가왔다. 황금빛 햇살이 비쳐 살갗을 간질이는 상쾌한 하루가 저물면 하얀빛이 감도는 분홍빛 석양이 찾아들었고 이어 달빛이 반짝이는 요정의 나라가 되었다.
‘패티네 집’여학생들에게도 4월이면 닥칠 시험의 그림자가 어김없이 드리워졌다. 모두들 열심히 공부했다. 심지어 필리파까지도 교과서와 공책을 붙들고 늘어졌다.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모습이었다.
“난 수학에서 존슨 장학금을 받을 거야. 그리스어라면 쉽게 탈 수 있겠지만, 수학에서 타고 싶어. 조너스에게 내가 정말 영리한 사람이란 걸 보여주고 싶거든.”
필리파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조너스는 너의 크고 검은 눈과 웃을 때면 귀엽게 살짝 삐뚤어지는 네 입을 사랑하는 거지, 너의 곱슬머리 밑에 있는 뇌를 사랑하는 게 아냐.”
앤이 말했다.
“내가 소녀였을 땐 수학 따위를 잘하는 게 숙녀답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세월이 변했지. 물론 모두 다 좋은 쪽으로 변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필, 너 요리는 할 줄 아니?”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물었다.
“아니요. 생강빵 말고는 평생 요리라곤 해본 적도 없어요. 빵도 언제나 실패만 했죠. 빵 중간은 푹 꺼지고 가장자리는 울퉁불퉁해지고, 어떨지 상상이 되시죠? 하지만 아주머니, 제가 열심히 요리 공부를 한다면, 수학 장학금을 탈 수 있는 머린데 요리라고 못 하겠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여자가 많이 배워서 어디다 쓰냐는 말은 아니다. 우리 딸도 석사지만 요리도 잘한다. 대학교수가 우리 딸한테 수학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요리를 가르쳤거든.”
3월 중순쯤 미스 패티 스포퍼드에게서 편지가 왔다. 마리아와 함께 다음 해에도 유럽에 머물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내년 겨울까지‘패티네 집’에 머물러도 돼요. 마리아와 나는 이집트를 둘러볼 생각이에요. 죽기 전에 스핑크스를 한번 보았으면 해서지요.

미스 패티 스포퍼드의 편지 내용이었다.
“이집트를 둘러보는 두 숙녀라! 너무 멋있다. 스핑크스를 올려다보며 뜨개질하는 모습을 상상해봐!”
프리실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년까지 이곳에 있을 수 있다니 너무 잘됐어. 사실 두 분이 돌아올까 봐 좀 걱정했었거든. 그럼 우리의 작은 보금자리를 빼앗겨버리는 거잖아. 그렇게 되면 우리 불쌍한 어린 양들은 또다시 하숙집이란 비정한 세상에 내던져지겠고.”
스텔라가 말했다.
“난 공원에 나가려고 해. 내가 여든 살이 되어서도 오늘 밤 공원으로산책 나간걸 기쁘게 생각할 거야.”
책을 옆구리에 끼고 나서며 필리파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니?”
앤이 물었다.
“날 따라와 봐, 그럼 가르쳐줄게.”
필리파와 앤은 3월 저녁 무렵의 신비와 마법에 흠뻑 빠져 공원을 거닐었다. 고요하고 기분 좋은 대기에 감싸인 공원은 생각에 잠긴 듯 하얀 침묵에 쌓여 있었다. 영혼의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은빛 소리가 수없이 깃들인 침묵이었다. 두 아가씨는 진한 붉은빛이 넘쳐흐르는 겨울석양 녘의 심장부로 곧장 이어질 것 같은 기다란 소나무 길을 따라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내가 시를 쓸 수 있다면 이 축복받은 시간에 당장 내 방으로 가서 시를 쓸 것 같아.”
공터에 다다른 필리파가 잠시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공터에는 푸른 소나무 잎에 장밋빛 석양이 물들어 있었다.
“여긴 너무 멋진 곳이야. 이 위대하고 하얀 침묵의 공간, 그리고 저 검푸른 나무들은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것처럼 보여.”
“숲은 신들의 맨 첫 신전이었어. 이런 곳에 들어와서 신성함과 경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소나무 숲 속을 걷고 있으면 난 항상 그분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앤이 말했다.
“앤,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야.”
갑자기 필리파가 말했다.
“블레이크 씨가 너에게 결국 결혼하자고 말했니?”
앤이 조용히 물었다.
“그래. 난 그가 말하는 동안 세 번이나 재채기를 했어. 너무 끔찍한 일 아니니? 그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난 ‘그래요.’ 하고 대답해버렸단다. 그 사람 마음이 바뀌어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릴까 봐 너무 두려웠거든. 난 정말 행복에 취해버렸어. 전엔 조너스가 나처럼 경망스러운 사람을 좋아할 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는데.”
“필, 넌 경망스러운 사람이 아냐. 너의 그 장난기 넘치는 모습 아래에는 정말 멋진, 굉장한, 여성다운 작은 영혼이 숨 쉬고 있어. 왜 그걸 숨기는 거니?”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앤 여왕님. 네 말이 맞기는 하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은 경망스럽지 않아. 하지만 내 영혼을 덮고 있는 얇은 피부에는 그런 게 들어 있어. 그리고 난 그것을 벗어 던질 수가 없어. 포이저 부인34)이 말했듯이 내가 다시 알을 깨고 나와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 한, 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조너스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알아보았고, 날 사랑하게 되었어. 사실 경박하기만 한 나를 말이야. 그리고 물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해.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만큼 놀란 적이 없는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못생긴 남자와 사랑에 빠지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야. 난 항상 멋진 남자를 만나 안정되게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조너스라는 이름! 하지만 난 그 사람을 ‘조’라고 부를 거야. 조란 이름은 괜찮지? 풋풋하고 귀여운 느낌이야. 알론조 같은 이름에는 별명조차도 붙일 수 없지.”
“그럼 알렉과 알론조는 어떻게 되는 거야?”
“지난 크리스마스 때 두 사람에게 어느 쪽과도 결혼할 수 없다고 말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 둘과 결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게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어. 하여튼 둘 다 굉장히 기분이 상해 보여서 내가 그들 앞에서 엉엉 울어주었지. 아마 울부짖었을 거야. 하지만 이 세상에서 내가 결혼할 남자는 딱 한 사람뿐이야. 그래서 난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그런데 사실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어. 너무 확실하게 느낌이 왔거든. 그리고 그 확신이 딴 사람이 아닌,나 스스로가 가진 확신이라는 게 또 너무 기뻤어.”
“그럼 이제 그대로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결정을 내리는 거 말이니? 글쎄, 하지만 조가 정말 그럴듯한 방법을 일러주었어.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면, 여든 살이 되었을 때 무얼 하고 싶을까 생각해서 마음을 정하래. 어쨌든 조는 무엇이든 굉장히 빨리 결정을 내려. 한 집에 결정을 잘 내리는 사람이 둘이나 있으면 그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
“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뭐라고 말씀하실까?”
“아버지는별말씀안 하실 거야. 내가 무슨 일이든 올바르게 처리한다고 생각하시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분명 무슨 말씀이 있으시겠지. 하지만 어머니의 혀는 번 집안의 혀야. 코가 번 집안의 코인 것처럼. 그러니 곧 괜찮아지실 거라고.”
“그럼 네가 지금껏 품어온 화려한 꿈들은 완전히 포기하는 거니? 블레이크 씨와 결혼하면?”
“하지만 나에겐 그 사람이 있잖아. 다른 건 없어도 돼. 앞으로 1년 후 내년 6월에 결혼하려고 해. 조가 이번 봄에 세인트컬럼비아를 졸업하니까. 그럼 빈민가 패터슨 거리에 있는 작은 선교 교회를 맡게 될 것 같아. 빈민가라니! 하지만 그와 함께라면 그린란드의 눈 덮인 산이라도 갈 거야.”
“이 아가씨가 부자가 아니면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던 그 아가씨란 말인가?”
앤이 어린 소나무를 향해 말했다.
“내가 철부지였을 때 가졌던 어리석음을 다시 꺼내지 말아줘. 난 부자일 때만큼 즐겁게 가난해질 수 있다고. 난 요리법도 배우고 드레스 수선하는 법도 배울 거야. 여기‘패티네 집’에 살면서 장 보는 법도 배웠잖아. 그리고 여름 내내 주일 학교에서 가르친 적도 있고.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내가 조랑 결혼하면 조가 목사로서 사는 데 방해만 될 거라고 하시지만, 절대 그렇지 않을 거야. 나도 내가 분별력도 절제력도 부족한 편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그보다 좋은 점도 많잖아.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비결 같은 것 말이야. 볼링브로크의 기도 모임에서 항상 혀 짧은 소리로 간증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전등불처럼 빛나지 못해도 촛불처럼 빛날 수는 있다.’라고 했단다. 내가 조를 위해 큰일은 못 해도 작은 촛불이 되어줄 수는 있을 거야.”
“오, 필. 넌 정말 못 말릴 애야.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재치 있고 가벼운 축하의 말도 해줄 수가 없어. 네가 행복을 찾아서 정말 기뻐.”
“알아. 네 큰 잿빛 두 눈이 깊은 우정으로 빛나고 있어. 언젠가 나도 너 같은 눈으로 널 바라보게 될 거야. 너도 로이랑 결혼할 거니까. 그렇지, 앤?”

“필리파, 그 유명한 베티 백스터 이야기도 못 들어봤니? 청혼하기도 전에 남자를 거절해버렸다는.35)난 그 여자를 그대로 흉내 내고 싶지 않아. 그래서 정말 나에게 청혼하기 전까지는 어떤 남자든 거절하지도 또 허락하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레드먼드 학생이라면 로이가 너에게 완전히 반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리고 너도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잖아. 안 그러니, 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앤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앤은 이런 고백을 할 때는 마땅히 얼굴이 붉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앤의 볼은 붉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길버트 블라이드와 크리스틴 스튜어트 이야기를 하면 앤의 얼굴은 항상 붉게 달아올랐다. 길버트 블라이드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어떻게 지내건 앤에게 무슨 상관이라고. 하지만 왜 앤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까? 그 이유를 따져 묻는 일도 포기해버렸다. 물론 앤은 로이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열정적인 것이었다. 앤이 어떻게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는 앤이 꿈꾸어온 이상형이 아니던가? 그 검은 눈동자와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레드먼드 여학생 반은 그에게 빠져 있다. 그가 생일날 앤에게 보낸 멋진 시와 상자 가득 담겨 있던 제비꽃은 또 어떻고. 앤은 로이의 시에 감격했다. 로이의 시는 굉장히 훌륭했다. 물론 키츠나 셰익스피어의 시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앤이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어 있다 해도 그 정도는 분별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로이의 시는 잡지에 실릴 정도가 될 정도로, 충분히 읽어줄 만했다. 그리고 그 시는 로라나 베아트리체, 아테네의 여신이 아닌, 바로 그녀, 앤 셜리 앞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그녀의 눈은 아침 별과 같으며, 그녀의 볼은 붉게 타올라 일출의 빛을 훔쳤다. 그녀의 입술은 천상의 장미보다 더 붉다.’ 이런 시들은 온몸에서 전율이 일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길버트는 앤의 눈썹에 바치는 시 같은 것은 영원히 짓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길버트에게는 유머가 있었다. 언젠가 앤이 로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지만 로이는 그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문득, 똑같은 이야기를 놓고 길버트와 한바탕 크게 웃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유머 감각이 없는 남자와 한평생을 산다면 정말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신비로 가득한 영웅에게 어찌 유머를 이해하는 낭만까지 바라겠는가.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34. 영국 작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1819∼1880)의 <아담 비드(Adam Bede)>에 등장하는 현실적이고 입심 좋은 인물.
35. 토머스 라이트(Thomas Wright)가 1906년에 내놓은 《리처드 버턴 경의 생애(The Life of Sir Richard Burton)》에 나오는 일화. 리처드 버턴은 《아라비안나이트》를 번역한 영국의 작가이며, 탐험가, 동양학자이다.




28
6월의 어느 멋진 저녁에





앤이 말했다.
“세상이 언제나 6월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앤은 석양빛 물든 아름다운 과수원에서 나와‘초록 지붕 집’베란다 계단으로 걸어갔다. 계단에는 마릴라와 린드 부인이 나란히 앉아 방금 다녀온 삼손 코츠 부인의 장례식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도라는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열심히 오늘 배운 것을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잔디 위에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데이비는 한 개뿐인 보조개가 허락하는 한 한껏 우울하고 실망스러운 표정이었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마릴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피곤하긴 하지만 오늘같이 아름다운 날에는 쉬이 피곤해지지 않아요. 유월에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거든요. 데이비, 왜 이렇게 꽃피는 계절에 우울한 11월의 얼굴을 하고 있니?”
“그냥 사는 게 지겨워서.”

어린 염세주의자가 말했다.
“겨우 10년 살고서? 어머, 슬프기도 해라!”
“나, 농담하는 거 아니야.”
데이비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난 정말 낙, 낙담이야.”
데이비가 무척 힘들게 그 어려운 단어를 입 밖에 냈다.
“왜, 무엇 때문에?”
데이비의 옆에 앉으며 앤이 물었다.
“홈스선생님이 아파서 선생님이 새로 왔거든. 새로 온 선생님이 덧셈 문제를 10개나 내주고 월요일까지 해오라고 했어. 그 문제 풀려면 내일 온종일 걸릴 거야. 토요일 날 공부해야 된다는 건 정말 불공평해. 밀티 볼터는 안 한대. 근데 마릴라 아줌마는 내가 해야 된다고 하잖아. 칼슨 선생님 정말 미워.”
“선생님을 그렇게 말하면 쓰니, 데이비 키스. 칼슨 선생님은 매우 훌륭한 여성이야.흠잡을데 없는 분이다.”
린드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별로 매력적인 분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앤이 웃었다.
“전 약간은 흠이 있는 사람이 더 좋아요. 하지만 제가 아주머니보다 칼슨 선생님을 더 좋아할걸요. 어젯밤 기도 모임에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눈빛을 보니 항상 똑 부러지게 행동할 분은 아니겠던데요. 자, 데이비. 용기를 내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거란다.’ 내가 도와줄게.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이런 멋진 시간에산수 문제로 걱정하면서 보내면 안 되지.”
“그럼, 안 되지.”
데이비의 기분이 좀 나아졌다.
“누나가 도와주면 산수 숙제도 얼른 끝낼 수 있으니까 밀티랑 낚시 갈 수 있어. 아토사 할머니의 장례식이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나도 장례식에 가볼 수 있었잖아. 밀티 엄마가 아토사 할머니는 분명히 관에서 벌떡 일어나버릴 거랬어. 자기가 땅에 묻히는 걸 보러 온 사람들한테 빈정대는 말을 하려고. 근데 마릴라 아줌마가 그런 일은 없었대.”
“불쌍한 아토사의 잠든 모습이 참 편안해 보이더라.”
린드 부인이 엄숙하게 말했다.
“아토사의 얼굴이 그렇게 밝은 건 처음 봤어, 그럼. 그런데 관 앞에서 그 불쌍하고 늙은 영혼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 엘리샤 라이트네 식구들은 아토사가 세상에서 없어졌다고 얼씨구나 좋아하더군. 그런데 내가 그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비난할 수가 없는 거야.”
“세상을 떠나도 슬퍼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정말 슬플 거예요.”
앤이 몸을 떨면서 말했다.
“불쌍한 아토사, 부모님 말고는 아토사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정말 그랬어, 심지어 남편조차 말이야.”
린드 부인이 말했다.

“아토사는 네 번째 부인이었지. 그 남편은 결혼을 무슨 습관처럼 하는 사람이었어. 결혼하고 한 2~3년 살았지. 의사는 남편이 소화불량증으로 죽었다고 말했지만 난 그 남편이 아토사의 혀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 그럼. 불쌍한 영혼이지.이웃 사람들을 그렇게 잘 알았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을 알지 못했거든. 어쨌든 아토사는 이제저세상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다이애나의 결혼이 이 마을의 다음 관심사가 되겠구나?”
“다이애나가 결혼한다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해요.”
앤이 한숨을 지으며 무릎을 양팔로 감싸 안고‘유령의 숲’사이로 불빛을 응시했다. 다이애나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었다.
“뭐가 끔찍하다는 거냐? 다이애나에게는 잘된 일인데. 프레드 라이트는 좋은 농장도 있고 굉장히 반듯한 젊은이지 않니.”
린드 부인이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한때 다이애나가 원했던 거칠지도, 열정적이지도, 사악하지도 않은 사람이에요. 다이애나의 이상형이 아닌 너무 착하기만 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앤이 웃었다.
“그래, 프레드는 그런 사람이야. 그럼 넌 다이애나가 사악한 남자랑 결혼했음 싶으냐?아니면네가 그랬으면 좋겠니?”
분별력 있는 마릴라가 말했다.
“아니, 아니에요. 전 사악한 남자랑은 결혼 안 해요. 하지만 사악할 수 있는 남자가 사악하지 않다면 좋겠죠, 뭐. 프레드는 정말 너무 착하기만 하니까요.”
“언젠가는 너에게도 분별력이 좀 더 생기겠지.”
그것이 마릴라의 바람이었다.
마릴라의 말에서 가시가 느껴지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마릴라는 앤에게 실망이 컸다. 앤이 길버트를 거절했다는 소식은 익히 알고 있었다. 에이번리 사람들이 모두 그 일로 수군댔지만 어떻게 그 이야기가 새어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찰리 슬론이 마음대로 추측해서 그것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얘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다이애나가 프레드에게 비밀을 털어놓았고, 프레드가 그것을 무심결에 말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이제 모두들 길버트와 앤의 일을 알게 되었다. 블라이드 부인은 사람들 앞에서건, 혼자 있을 때건 앤에게 요즘 길버트 소식을 들었느냐고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차갑게 고개만 끄덕하고는 지나쳐 버렸다. 명랑하고 항상 젊음을 간직한 길버트의 어머니를 좋아했던 앤은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려 몹시 서글펐다. 마릴라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린드 부인은 화가 나서 앤에게 이것저것 따지고 물어댔다. 하지만 이 모르는 일이라고는 없는 부인에게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무디 스퍼전 맥퍼슨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로, 레드먼드 대학에 앤의 연인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 연인은 부자이며 잘생겼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는 린드 부인도 입을 다물었지만 마음속 깊이 앤이 길버트를 다시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은 여전했다. 부자라면 나쁠 것은 없지만, 린드 부인이 아무리 현실적인 사람이라 해도 돈만 있으면 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누군지는 모르지만 잘생겼다는 그 남자를 앤이 길버트보다 더 좋아한다면 더 이상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앤이 혹시 돈 때문에 결혼하려는 것은 아닌지 린드 부인은 내심 무척 걱정이었다. 마릴라야 그런 걱정을 할 만큼 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순리대로 일이 되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에 슬픈 마음이 들었다.
“될 일은 되고 말지. 하지만 절대로 그래선 안 되는 일들이 가끔씩 일어나기도 하지. 앤에게 바로 그런 일이 생긴다는 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신이 말려주시겠지, 그럼.”
린드 부인은 한숨을 지었다. 신도 간섭하지 않는데 스스로 나서서 간섭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앤은‘드리아드의 샘’까지 산책을 나가 무성히 자란 고사리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여름이면 앤이 길버트와 함께 앉아 있곤 했던 크고 하얀 자작나무 아래였다. 방학이 되자 길버트는 다시 신문사로 돌아갔고, 길버트가 없는 에이번리는 너무 지루했다. 길버트는 앤에게 편지 한 통도 보내오지 않았고 앤은 오지도 않는 편지를 기다렸다. 하지만 로이는 정확하게 매주 두 통씩 편지를 보내왔다. 그의 편지에 담긴 글은 회고록이나 자서전의 글처럼 매끈했다. 앤은 로이의 편지를 읽고 있을 때만큼은 그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정작 로이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언젠가 하이람 슬론 부인에게서 건네받았던 길버트의 편지를 보았을 때만큼 갑작스럽고 묘한 저릿함이 없었다. 편지 봉투에 검고 또박또박 쓴 길버트의 글씨를 보았을 때 앤은 달콤한 통증이 휙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었다. 앤은 로이의 편지를 받으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동쪽 방에서 봉투를 뜯었다. 학교에서 발행하는 소식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앤은 오늘도 그 재미없는 편지를 방 건너편으로 훌쩍 던져버리고는 자리를 잡고 앉아 유달리 친절한 투로 로이에게 답장을 썼다.
다이애나의 결혼식이 닷새 후로 다가왔다. 회색의‘비탈길 과수원집’은 음식을 만드느라 굽고, 찌고, 끓이고 온통 분주했다. 크고 성대한 옛날식 결혼식을 열 예정이었다. 물론 앤은 신부의 들러리가 되었다. 그것은 열두 살 때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길버트도 신랑의 들러리가 되려고 킹스포트에서 돌아올 것이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앤은 무척 즐거웠다. 하지만 분주하게 결혼식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간간이 마음이 저렸다. 어떤 면에서 앤은 이제 오랜 친구를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이애나의새집은‘초록 지붕 집’에서 3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예전처럼 둘이 항상 붙어 다니지는 못할 것이다. 앤은 다이애나 방 창문에서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지난 시간 동안 그 불빛이 자기 삶에 등대가 되어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여름의 석양을 건너 비쳐오는 그 불빛을 더 이상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알싸한 아픔과 함께 눈물 두 방울이 앤의 잿빛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
“아, 어른이 되어 결혼하고 변해가는 것은 너무 서글픈 일이야.”
앤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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