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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탐내도 될까? (72회)

죽으나사나 | 2024.04.21 15:20:25 댓글: 29 조회: 349 추천: 0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62956
너를 탐내도 될까? (72회) 필연적 인연. 

“요즘 술을 왜 그렇게 찾으십니까?”

바텐더가 건네주는 위스키를 받으며 도하가 옆에 나란히 앉은 기혁에게 물어왔다. 

“뭐… 나도 좀 변화가 필요해서.”

기혁은 제 앞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잔을 들었다. 그런 기혁을 찬찬히 보던 도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안에 위스키를 털어 넣었다. 술을 피하던 사람이 요즘 며칠째 저를 불러내고 있었다. 

“나야 뭐 며칠 내내 마셔도 별일 없다마는 대표님은 그러다 몸 상합니다. 안 마시던 사람이 매일 같이 마시면.”

충고 같은 도하의 으쓱대는 말에 기혁이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안 마셨었지만 생각보다 나 그렇게 빨리 안 취해.”

“아아. 네.”

음주에는 자신이 있는 도하는 기혁의 호언장담을 우습게 여겼다. 

”허.“

도하의 반응이 살짝 어이가 없었지만 그는 이미 소문난 애주가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그 앞에서 더 술 부심을 피우지 않았다.  

“태국까지 다녀오시더니 요즘 또 한풀 꺾인 걸 봐서는 하려던 일이 잘 안되는가 봅니다?”

도하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권기혁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걸. 

“뭐… 응.”

기혁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었다. 

[아들, 당장 윤하정을 내 앞에 데려다 놓을 것처럼 얘기하더니만 요즘 왜 이리 조용해? 벌써 까인 거야? 천하의 권기혁이??]

요즘 어머니도 전화로 달달 볶는 중이었다. 그 목소리엔 제 아들을 향한 조롱도 꽤 섞여있었다. 

“밀당은 적당히 하시고 그냥 직진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도하의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 도하를 넌지시 건너다보았다. 

“그런 시선은 쏘지 말고요. 전 그 여자 아닙니다.”

픽,

농담도 하고. 도하는 이런 사람이었나?

도연이가 가고 나서 회사 업무 빼고는 거의 따로 본 적이 없던 도하라 어떤 사람이었던지 잊은 거 같다. 생각해 보니 업무를 볼 때를 제외한 도하는 꽤 재밌고 젠틀한 이미지였다. 
회사 내에서 인기도 꽤 있는 편이지. 그럼 연애는 꽤 했으려나? 결혼은 아직이지만 연애만 하는 타입인가?

“뭐 궁금한 게 있으면 저한테 물어도 되고요.”

저를 한참이나 무심히 바라보는 시선에서 기혁의 속마음을 꿰뚫은 건지 도하가 심드렁하게 뱉었다. 

“내가 본부장한테 묻고 싶다고 해서 다 물어도 될까.”

기혁이 도하에게서 시선을 떼어 다시 카운터로 옮겼다. 

도하는 기혁의 조심스러워하는 그 어투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가 돌아가기 며칠 전 사실 저랑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도하가 죽은 제 누나를 언급했다. 

“대표 님이 누나를 힘들게 하나 싶었는데 살이 부쩍 빠진 몸에 비해서 누난 엄청 행복해하더라고요.“

기혁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도하한테서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항상 대표 님을 기다리기만 했는데 생각을 바꿨다면서, 기다리지 않고 이제 다가가는 법을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밀리면 밀리는 대로 계속해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밀리는 게 아니었다면서 진심으로 좋아했었습니다. 아무래도 대표 님과의 결혼은 자기 인생에서 한 결정 중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그랬습니다.“

도하는 그날의 도연을 생각하면서 어느새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무슨 여자가 지조 없이 먼저 들이대? 누나가 그럴 정도의 여자는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기혁 오빠잖아?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거지. 내 남편이기도 하고.]

쯧쯧 하며 나무라는 도하 앞에서 도연은 방실방실 웃기만 했다. 

[어쭈. 이제 다시 오빠라고 부르는 거야? 맨날 기혁 씨, 기혁 씨 하더니만?]

[그럼. 나한테 유일한 남편이자 오빠지. 나 요즘 사는 게 너무 행복해. 매일 그가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너무 설렌다고 할까?]

누나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에게 도박을 건 셈이었다. 누나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권기혁은 몰랐겠지만 그 도박에 응해준 게 그였고. 그래서 누나는 그 짧은 시간을 너무나도 행복해했다. 누나가 끝까지 시도도 안 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더라면 얼마나 후회를 했을까 싶었다. 다행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지켜보지만 말고 다가가는 게 맞는 겁니다. 이것저것 다 따지고 재다 보면 그 인연은 사라지는 게 맞다고 봅니다. 저는.“

이 말을 끝으로 도하는 잔에 남은 위스키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기도에 흘러 들어간  양주는 쓰면서도 달콤했다. 

이제 누나도 괜찮은 거지? 권기혁도 제 삶을 찾아가야지. 누나라면 이해해 줄 거 같았다. 

도하가 옅게 웃었다.

다음날 아침,

회사 로비에 들어설 때부터 왠지 회사 분위기가 다르다는 느낌이 든 하정은 평소와 다른 공기를 느끼며 마케팅 부서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로비에 이어 사무실도 냉랭한 분위기였다. 

하정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제 자리에 바로 착석했다. 눈동자만 굴리며 상황 파악을 해보려 했다. 

”윤 대리님.“

직급은 동일하지만 하정보다 1년은 더 빨리 입사한 장 대리가 목소리를 낮추며 하정에게 손짓을 했다. 휴게실로 들어오라는 몸짓도 보탰다. 

달칵,

조용히 휴게실 문을 닫은 장 대리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뱉는 건지 후~ 하고 큰 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모르는 하정만 궁금했다. 그런 하정과 마주 선 장 대리는 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역시 윤 대리님은 모르실 거 같아서 얘기를 나누자고 한 겁니다.“

장 대리는 손가락을 빠르게  휙휙 저으며 하정에게 제 휴대폰 화면을 보라고 했다. 

장 대리의 바람대로 하정의 시선은 그녀의 폰 화면에 닿았다. 

화면 속에는 영상이 틀어져있었는데  장소는 열심히 가전 부품을 찍어 대고 있는 공장 안이었다. 

”어? 찍고 있는 제품이 저희 꺼 아닌 가요?“

하정이 단번에 거래처인 영진 그룹 로고가 들어간 제품을 발견하고 검지로 그걸 가리켰다. 

”그렇죠? 이렇게 단번에 보이죠? 영진 그룹에 납품할 물건이라는 게?”

“네.”

하정이 화면에 눈을 안 뗀 채 답했다. 

영진 그룹이 뻗은 자리는 너무 넓고 광대해서 사실 그 기업이랑 아예 연관이 없는 회사는 드물었다. 새로 들어온 맥스 라는 이 회사도 영진 그룹에 납품을 하고 있는 하청 업체 중 하나였다. 

영상에는 젊은 여성인 작업자가 기계 앞에서 한창 열심히 제품을 찍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어디선가 낯익은 모습에 하정이 이마살이 찌푸러졌다.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장 대리가 옆에서 속닥거렸다. 

흠….

생각을 잠깐 하던 하정이 두 눈이 번쩍이었다. 

“한 이사님??”

“빙고.”

엄지와 중지로 마찰을 하면서 딱하고 소리를 낸 장 대리가 고개를 끄덕이었다. 왜 이런 걸 보여주는지 이해는 안 갔지만 하정은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어어?? 지금 이사 님이 뭐하시는…”

작업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가더니 손을 뻗어 불쑥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는 게 아닌가. 작업자는 흠칫 놀라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그럴수록 그는 더욱더 작업자의 몸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미친… 왜 저러는 거지?”

하정이 입에서 나지막이 욕이 흘러나왔다. 

“그렇죠? 이사 님이 원래 젊은 아가씨들만 보면 오죽을 못 쓴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긴 했지만 공장 내에까지 들어가서 저럴 줄은 누구도 몰랐죠. 후우…“

장 대리가 치를 떨며 어깨를 들썩이었다. 

계속 틀어져 있는 동영상에는 아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여자 작업자가 자꾸 제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자 꽤 열받은 얼굴을 한 한 이사가 제품 하나를 손에 들더니 그녀의 머리 위로 툭툭 내리치기 시작했다. 엄청 아픈 느낌은 아니겠지만 엄연히 기분 나쁜 행동이었다. 

”헐!!“

하정이 목소리가 커졌다. 

제 뜻대로 안 되자 폭력까지 행사하는 한 이사에 입을 못 다물었다. 

”근데 이건 누가 찍은 거예요?“

장 대리에게 시선을 옮긴 하정이가 물었다. 

“몰라요. 말로는 그 작업자의 남자친구가 아닐까 하는 얘기도 도는데. 저거 미리 한 이사가 올 거란 걸 알고 준비한 거잖아요. 어젯밤에 동영상이 올라왔고 회사가 아침에 발칵 뒤집어졌어요. 영진 그룹에서도 자기들 로고가 떡 하니 찍혀있는 공장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 벌써 연락이 왔다고 하더라고요.”

둘밖에 없는 휴게실에서 장 대리는 누구라도 들을까 봐 그런 건지 하정의 귀에 대고 연신 속삭였다. 

“곧 영진 그룹과의 계약이 끝나가서 재계약을 해야 할 타이밍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이 터진 거라 위에서 난리에요. 아침 댓바람부터 저희 대표 님이 영진 그룹으로 갔다는데 일이 제대로 풀릴지 모르겠어요.“
이때,
휴게실 문이 열리면서 다른 사람이 들어오자 장 대리는 언제 뭔 일이 있었냐는 듯 일부러 큰 소리를 냈다.
"윤 대리님. 방금 얘기했던 문서 정리해서 팀장 님한테 갖다 드리면 돼요."
"네? 아, 네."
뜬금없는 장 대리의 말에 하정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저를 보고 찡긋 웃는 그녀에 바로 수긍했다.
점심쯤 되니 회사의 분위기는 더욱 안 좋아졌다. 영진 그룹에 다녀온 대표의 안색이 안 좋다는 말이 빠르게 퍼져 나왔다. 재계약은커녕 영진 그룹 얼굴에 먹칠을 한 책임을 따질 판이었다.
부장실에 가서 결재 서류를 갖다주고 나온 팀장도 긴 한숨과 함께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동영상에 관련해 좀 검색을 해보니 댓글이 장난 아니게 많이 달렸다. 직장 내 성희롱, 폭행이 난무한 회사라고 욕을 먹고 있었고 제품 로고를 보고 영진 그룹도 덩달아 쓰레기라고 욕을 먹고 있었다.
영진 그룹도 때아니게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게 뻔했다.
눈치를 보며 화장실에 들어간 하정은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았다. 
타닥타닥,
타자 소리와 함께 정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너네 회사 분위기 괜찮아?>
답은 바로 왔다.
<괜찮지 않아. 너도 동영상 봤구나?>
<응, 봤지.>
<세상에 글쎄 이게 뭔 일이라니. 그 회사 이제 완전 아웃 당할 거 같아.>
<너네 회사에서 어쩔 생각이야?>
<법적 대응 얘기도 나오는데... 근데 왜 이렇게 궁금해하지?>
얼굴은 안 보이지만 마지막 그 질문을 하면서 정연의 두 눈이 제법 가늘어졌겠지.
<이상한 생각은 말고. 나 그 하청 업체에 있잖아.>
하정의 마지막 문자를 확인한 정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
하정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뭐야, 너 맥스에 다녀?"
"응."
"새로 입사한 곳이 맥스라고?"
"응."
"헐..."
짤막한 답에 연신 물어대는 정연이. 믿을 수가 없겠지. 나도 그래. 내가 영진 그룹에 마가 꼈나. 가는 곳마다 이 난리가 나니...
"너 퇴사해야겠는데? 그 회사 영진 그룹에서 버릴 거 같아. 그냥 버리는 것도 아니고 아주 지독하게 짓밟아서 버릴 거 같아."
"그, 그 정도야?"
"그럼~. 그런 말도 안 되는 동영상이 올라왔는데 우리 회사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무엇보다 로고가 너무 잘 찍혔잖니..."
그건 그래. 영진 그룹 이미지도 있는데 괜히 날벼락으로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으니...
"동영상은 일단 더 퍼지지 않게 막고 있는 거 같은데 이게 사실 우리 회사에서 일어난 일도 아닌데 같이 욕을 먹고 있어서  꽤 난감한 사안이잖아. 그 영상 속 사람은 어떻게 처분한대?"
"아직 그런 거까진 들은 바가 없어."
이제 갓 들어온 회사에서 흘러나오는 소문은 하정의 귀까지는 좀 걸리는 편이었다.
"그래. 거기선 아직 병아리인 네가 뭘 알겠니. 알았어. 나 지금 본부장 님 따라서 회의 들어가야 해. 동영상 때문인 거 같아."
"어. 알았어. 수고해, 그럼."
급하게 통화를 끝낸 하정은 자리에서 나왔다. 문을 닫고 세면대로 향하던 하정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팀...장님."
언제부터일지 모르지만 하정의 통화를 들은 게 틀림없는 마케팅 1팀 김 팀장이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하정이 약간의 묵례로 인사를 하고 수돗물을 틀어서 손을 집어넣었다.
"윤 대리."
말없이 저를 쳐다보던 김 팀장이 하정의 뒤에서 입을 열었다.
"네."
물을 끈 하정이가 재빨리 뒤돌아서며 답했다.
"나 확인할 게 있어. 영업 팀 한 과장한테서 들은 얘기가 있는데 윤 대리가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큰 건을 해결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
별안간 하정은 보았다.
김 팀장의 기대에 가득 찬 검은 눈빛을.
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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